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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지배 규탄하고 민중주권 나라를 만들어야〉 … 코리아국제포럼 〈동북아의 미군기지환수와 평화를 위한 민중연대〉세션

25일 17시 서울용산 철도회관에서 제8회코리아국제포럼 <평화와 통일, 민주주의>의 2부 특별대담 <동북아의 미군기지환수와 평화를 위한 민중연대>가 두시간반가량 열렸다. 

오키모토 히로시오한민중연대활동가가 발제를 맡았다. 

오키모토는 <미군기지 신기지레 반대하는 투쟁 중인 오키나와에서 왔다. 오키나와-한국민중연대의 오키모토 히로시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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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미군은 점령군

오키나와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미군기지문제다. 관련해서 역사와 현상, 그리고 오키나와섬민들의 끝나지 않는 투쟁에 대해 말씀드리겠다. 

오키나와에는 미군기지와 육군, 공군, 해군, 해병대의 미군이 다 있다. 육군부대는 요미탄촌 토리이 스테이션이라고 부르고 특수부대이다. 해군부대는 우루마시 화이트비치라고 부른다. 공군부대로는 가데나비행장과 가데나탄약고가 있다. 도시 한가운데 미군비행장이 있다. 

미군의 모든 군사가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상황이다. 군대, 가족 포함해서 5만명이 있다. 미군기지 70%가 오키나와에 있다. 오키나와 본섬에 15%가 주둔하고 있다. 땅뿐만 아니라 하늘과 바다도 미군이 지배하고 있다. 오키나와 본섬 주변의 항공과 해역을 미군이 지배하고있다. 

요즘들어 미군부대에서 새로 임시훈련구역을 정하고 마음대로 이용하는 것을 일본정부가 인정하고 있다. 오키나와의 미해병대기지가 여러 곳에 있는데 미군기지에 오키나와 전쟁에서 73년 전에 죽은 미군병사들의 이름이 붙어있다. 예를 들어 캠프 바트라, 캠프 킨자, 캠프 레스터, 캠프 호서터, 다 오키나와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이름이다. 

상병, 상사, 1병, 소령, 2병, 1병 이렇게 해서 미군들이 오키나와해병대의 기지이름으로 되어있다. 왜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지었는가?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사령관을 포함해 가장 많은 손해를 입은 전쟁터가 오키나와다. 미군에게 오키나와는 전리품이다. 전승국이 패전국에 주둔하는 것과 같은 점령군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정부가 미군의 지배를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오키나와 마지막전쟁터가 된 곳이 있다. 미군 1만4000명, 일본군이 7만7000명, 오키나와사람들 약15만명이 죽었다. 여기서 북코리아사람 82명, 남코리아사람 380명도 죽었다. 

미군이 오키나와전쟁에서 저지른 범죄가 무엇인가. 첫번째는 10.10공습이다. 아이스버그 작전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첫째로 비행장이나 선박, 항만시설 등 일본군 시설을 목표로 했는데 나중에는 무자비한 폭격으로 학교, 병원이 다 공격받고 오키나와가 폐허가 되었다. 

두번째 전쟁범죄는 무엇인가 하면 전쟁 중에 섬 한가운데서 기지를 만든 것이다. 여기가 후텐마비행장이다. 기지가 지어지기 전에 9000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피난했을 때. 1945년 6월에 여기에 있던 학교나 마을 사무소, 집, 밭을 다 파괴해서 만든 기지가 후텐마비행장이다. 

오키나와의 기지가 지금처럼 미군의 군사적 요새로 만들어진 것은 코리아전쟁후에 있었던 미군기지건설이었다. 코리아전쟁이 1953년이었는데 미군은 본격적으로 오키나와에 미군기지를 건설했다. 강제적으로 토지를 수용하고 기지를 만들었다. 그 기지가 지금까지 있는 상황이다. 


사회전반에서 미군에 의한 피해가 막심하다 

미군기지가 일본 전체의 70%, 오키나와 본섬의 15%를 차지하고 있는데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많은 땅을 빼앗겼다. 마을 공동체가 통째로 없어졌다. 2800미터의 활주로가 마을 가운데 있다. 거기에 있던 마을이 없어졌다. 기지주변에 새로 마을이 도넛 모양으로 생겼다. 

도시계획과 교통을 저해해서 추락위험성과 소음 속에서 사람들이 생활해야한다. 전에는 주변에 음식점이 많이 생겼지만 지금은 거의 없어졌다. 

해외로 이민 가는 것도 문제다. 대부분은 기지 주변으로, 일부는 해외이민으로 나갔다. 오키나와에서는 1900년부터 1879년 명치정부의 류큐 평합 후 생활곤궁으로 이민이 시작됐다. 

예전에는 기지경제 비율이 50%였다. 기지밖에 일하는 장소가 없었다. 1972년쯤에는 15%이고 현재는 5%가 됐다. 미군기지가 경제발전에 최대 저해요인이라는 공통인식이 있다. 

1년에 한번씩 비행기, 헬기가 추락한다. 어디에 추락하는지도 모른다. 바다에 추락하는 경우도 있고 섬에 추락하는 경우도 있다. 14년 전에는 대학교에도 추락했다. 1959년에는 초등학교에 추락해서 200여명 이상의 교사나 주민들이 사망했다. 

교통사고도 많다. 대표적인 교통사고는 1963년 미군트럭이 중학생을 역살한 일이다. 태양빛이 눈부셔서 문제가 됐다고 이야기 한다. 이런 문제들이 오키나와에 많이 발생하고 있다. 

2년전 미해병대에 의해 20대여성이 폭행당하고 살인된 사건이 있었다. 미군들이 오키나와에 상륙한 후 살인, 강간 등의 사건들이 발생해왔다. 특히 해병대에서 범죄가 많다. 

미군에 의한 환경파괴가 심각하다. 훈련장의 모래색을 보면 빨간색이 돼있는데 원래는 빨간색이 아니다. 오키나와 모래색은 하얀색이다. 미군기지가 바로 옆에서 공사하고 훈련함으로 인해 바다가 오염된 것이다. 아이들 축구장에서 고엽제를 매립한 일이 있었다. 100개가 넘는 드럼통이 있었고 그로인해 축구장이 폐쇄됐다. PCB, 석면, PFOS에 의해 토양, 가옥, 하천이 오염됐다. 

오키나와북부는 <생물의 다양성의 숲>인데 여기에 미군이 헬기패드를 건설중이다. 지금 공사가 진행중이다. 듀공과 425종의 산호가 서식하는데, 425종은 유명한 호주의 바다보다 더 많은 산호가 오키나와에 서식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전부 합쳐서 5800종의 생물이 살고 있는 바다가 파괴되고 있다. 그래서 오키나와사람들은 환경과 관련해서 가장 많은 투쟁을 하고있다. 

군용기 훈련, 짐운반 훈련 등 매우 위험한 훈련을 하고 있고 소음도 심각하다. 이런 소음 때문에 마을을 떠난 주민들도 생겼다. 

주민들의 생활문화가 아메리카화 됐다는 문제도 있다. 미군의 문화가 오키나와에 들어왔다. 


오키나와의 자기결정권을 위해, 동북아평화를 위해 미군기지반대투쟁

미군기지 건설의 배경은 무엇인가. 일본에 의한 오키나와 식민지화가 먼저 있었다. 아시다시피 오키나와는 옛날에 류큐라는 독립국이었다. 독립국이 무력침략, 1789년 천황제 명치정부에 의한 병합, 1845년 오키나와를 무대로 한 미군의 지상전과 미군정지배의 수난을 겪었다. 그런 역사가 미군의 오키나와기지건설의 배경에 있다. 

1970년대 미군에 대한 반기지투쟁이 있었는데 당시에, 1970년대에는 미군정이었다. 그런 가운데 기지반환으로 한비비행장이나 마치나토주택기지 등을 반환 받을 수 있었다. 반환 후에도 반기지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가데나기지를 포위하는 인간의 쇠사슬, 인간띠잇기 투쟁도 몇 번 했다. 

1995년을 기점으로 새로운 오키나와 투쟁의 고조가 이루어졌다. 소녀폭행사건에 대한 8만5천명의 항의 투쟁이 있었고 같은 해에 평화의 초석이 세워졌다. 교과서 검정반대 현민대회, 오키나와 현민대회, 해노코기지반대 현민대회에 10만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계속해서 사람들은 투쟁하고 있다. 

다카에 헬기패드 반대투쟁을 이야기 하겠다. 미군은 기지를 반환한 대신에 새로운 헬기패드 6개를 만들 계획이었다. 500명의 경찰들이 오키나와섬에 와서 공사를 진행했다. 사람들이 길에 자동차를 세워두고 투쟁을 했다. 기지안에 들어가서 공사저지투쟁도 했다. 

헤노코신기지반대투쟁 어떠했는가. 미군기지를 헤노코바다, 생물다양성이 넘치는 바다에 V자로 만들고 여기에 군함을 만들었다. 탄약고도 있었다. 카누71정, 항의선9척 약140명이 참가해 해상연좌투쟁을 했다. 해외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방문을 한다. 

헤노코신기지 반대운동의 중심이 된 조직은 정당, 현의회파, 경제단체 등이 속한 오키나와회의이다. 현민회는 각지역의 시마구루미회의, 지방의 헬기기지반대협의회들로 구성되며 그런 조직들을 중심으로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운동의 정치적, 전술적인 성격은 무엇이냐 하면 현민 모두가 참여하는 비폭력 저항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오키나와 사람들의 70%이상이 미군기지를 반대하고 있다. 운동의 정치적인 방향에 관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하나는 오키나와의 자기결정권이고 또 하나는 코리아반도 평화와 아시아 각국과의 공존을 위해 오키나와의 기지를 반대한다는 것이다. 

사회를 맡은 민중민주당 김경구부산광역시당위원장은 <오키나와미군기지환수투쟁에 대해 잘 들었다.>며 <다음은 평택미군기지환수연구소 현필경소장의 발제를 듣겠다.>고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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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군이 자기결정권을 갖고 있지 않아서 투쟁이 이어졌다

미군은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는 것을 약속했다. 그 이상의 약속은 없었다. 하지만 미군은 9월8일 들어와서 일본총독부로부터 행정부까지 이양받아서 미군정시작을 했다. 그래서 당시 우리나라 군들은 일제치하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자기결정권을 갖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일제시대와 다르지 않는 상황이 되면서 많은 투쟁들이 벌어졌다. 

1946년도 10월 대구를 중심으로 시작된 10월항쟁과 4.3항쟁이 있었다. 1948년 4월3일 전부터 시작이 됐다. 단독선거를 자행하기 전날 마을 사람들이 한라산으로 올라가서 선거반대투쟁을 했다. 그리고 남쪽에 단독정부가 서고 나서 북쪽에서 1949년 9월9일 정부가 들어섰다. 소련군이 철수를 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시작됐다. 장진호전투라고 함경도 북쪽에서 미해병대가 최악의 패배를 당했다고 한다. 전쟁중에 맥아더유엔사령관에게 이승만대통령이 작전권을 넘겨버린다. 코리아전쟁은 이제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을 체결하면서 중단이 됐다. 

정전협정4조에는 3개월이내로 양쪽 전쟁 당사자국은 외국군철수문제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논의를 시작할 것을 기술하고 있다. 실제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코리아반도 재통일문제와 베트남의 평화유지에 관한 관련 당사국들의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첫번째안건인 코리아반도의 재통일 문제에 대해서 미국 대표단이 논의조차하지 않았고, 베트남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일단 합의를 하고나서 회담장을 박차고 나와서 이 합의에 책임이 없다고 선언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정전협정이후에는 전쟁을 다시 하지 않고 재통일로 가기위한 재무장을 중단하거나 하는 여러가지 조치들이 있었는데 오히려 미군은 1957년도에 한반도 남쪽에 핵무기를 들여놓겠다고 선언하고 1958년에는 핵무기를 비롯한 무기들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1975년에는 유엔총회에서 코리아반도 남쪽에 있는 유엔사령부를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미군이 한미연합사를 새로 창설했다. 코리아반도에서 미군과 우리 민중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하는 생각이 되다가 1980년 5월18광주항쟁이 있고나자 미군이 우리나라에 결코 도움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광주의 진상문제를 파헤치기 위한 노력을 많이 기울였다. 광주의 진상을 알려서 투쟁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청년들이 노동현장에 들어가는 일이 80년도에 많이 있었다. 

윤금이가 잔인하게 살해되는 사건이 있었고, 2000년에는 효순이와 미선이라는 여중생을 탱크로 잔인하게 압살했다. 

매향리는 경기도 평택옆에 있는 농섬이다. 이 섬이 원래는 지금 크기보다 2/3는 더 컸는데 폭격장에 의해서 작아졌다. 이미 있던 다른 섬은 폭격으로 사라졌다. 전만규위원장은 매향리투쟁을 이끈 분이다. 

경기도 평택의 대추리미군기지반대투쟁이다. 2000년도초반에 매향리투쟁은 승리를 했고 아까 말한 것처럼 평택투쟁, 두여중생사건에 대한 투쟁으로 반미투쟁이 크게 벌어졌었다. 왜 이런 투쟁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6.15공동선언으로 남북의 두지도자가 만나는 모습들을 통해 <여기는 우 땅이구나>, <두지도자가 만나서 우리 민족의 문제를 책임지는구나> 하는 자각들을 심어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는 110군데이상 미군기지가 있다. 전체면적은 6400만평이다. 미군과 소파협정을 체결하고 있는 나라는 85개정도 된다고 한다. 그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큰 미군기지라고 하면 독일의 남슈타인이라고 하는 곳, 그리고 오키나와의 가데나기지가 있다. 가데나기지를 보고 제가 깜짝 놀랐다. 그리고 또 하나 가장 큰 미군기지가 평택에 있는 K6이다. 여의도 면적의 5배이다. 여기에 육군들이 주둔하고있다. 정찰기들이 많이 있다. K15는 공공기지이다. 상대적으로는 작지면 상당히 넓은 기지다. 

우리나라에 있는 <주한미군사령관>은 <한미연합사령관> 직책과 <유엔군사령관>의 직책까지 세가지를 갖고있다. 평상시에는 주한미군사령관이지만 위기관리정도를 데프콘이라고 하는데 점점 밑으로 떨어져 데프콘3으로 되면 한국군까지 지휘를 하게 된다. 

재미있는 건 데프콘 1, 2, 3 이것을 누가 조정을 하는가. 주한미군사령관이 한다. 결국 언제든지 한국군을 지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안보문제를 군사적으로 해결할 것인지 외교적으로 해결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 

2000년대 초반 미군기지 확장이 됐을 때 경기지역 50개정도 되는 미군기지중 34개를 집중적으로 키우려는 계획이 있었다. 12평방미터정도 추가됐다. 

2015년 탄저균실험반대투쟁을 했다. 우리가 기자회견을 하고 투쟁할 때 미군들이 방패를 들고 있었다. 

2016년에는 사드배치를 평택에 할 수도 있다고 해서 평택에서도 사드반대투쟁을 했다. 세균실험 등을 반대하는 미군기지환경감시단활동도 했고 1인시위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경기도조례를 제정했다. 매주 미군기지 감시를 해서 감시활동일지를 올리고있다. 감시활동 중에 레이더를 발견하기도 했다. 미해병대용 레이더인데 작년 6월에 민가 바로 옆에 있던 것이다.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미군기지를 볼 때는 이 레이더를 발견할 수가 없었는데 민가주변을 자세히 보니 발견했다. 미해병대가 쓰는 것인데 왜 평택에 왔나하는 궁금증을 갖게 되고 미 해병대가 여기에 왔다는 걸 알게 됐다. 민가 가까이 있다보니 전자파이야기가 많았다. 실제로 근처에 가면 센서등이 잘 작동이 안되고 전화가 잘 안 터지기도 한다. 그래서 아주 격렬한 저항을 했고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 

강정미해군기지에 대한 투쟁을 했다. 1960년대 초반에 미국무성의 비밀보고서에 의하면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설치하고 관광지로 개발하겠다는 계획서가 있다. 제주사람들이 관광지가 되는 것을 환영할 것 같은가. 환영하지 않는다. 그냥 유채꽃 있고 귤농사를 지으며 살고 싶은 것이 본토민들의 바람이다. 

성주 달마산에 사드 장비들이 들어와서 사드가 배치됐다. 어제도 사드 장비가 들어와서 저지하는 투쟁이 있었다. 

중국의 도련선에는 2050년까지 미군을 몰아내겠다고 하는 중국의 목표가 있다. 미국의 애치슨라인은 홋카이도를 지나 대만에서 말라카해협쪽으로 간다. 여기를 누군가 막아버리면 어떻겠나. 여기를 막아버리면 석유수송, 무역수송에 큰 문제가 생긴다. 애치슨라인을 미군이 마음대로 설치해서 하와이부터 오키나와 거쳐 미군기지를 설치해나갔다. 

오키모토활동가와 현필경소장의 발제가 끝난 뒤 우리사회연구소 권오창이사장이 소감발언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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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창이사장은 <주한미군 때려잡고 조국통일 앞당기자!>,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조국통일 앞당기자!>는 힘찬 구호로 발언을 시작했다. 

그는 <지금 인류사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고 반문한 뒤 <레닌은 짜르치하에서 러시아민주노동당을 창당하고 짜르에 의해서 탄압받고 외국으로 망명을 다녔다. 스위스 베른 도서관에 은거하면서 제국주의론을 썼다.>며 <레닌의 <제국주의론>에는 부제가 붙었다. <자본주의 최후단계로서의 제국주의>. 그러나 레닌도 인간인 이상 제국주의의 최후단계는 예측을 못했다. 레닌은 그 <제국주의론>을 들고 러시아에 스며들었다.>고 말했다. 

이어서 <레닌은 1917년 러시아혁명을 주도했다. <노동자들이여! 당신들이 지금 짜르의 제1차세계대전으로 전쟁터에 가고있다. 그에 생각해보라. 짜르의 권유에 의해 전쟁에서 승리했다치자. 당신들에게 돌아갈게 뭔가.> 이스크라를 통해 계속 선전했다.>고 러시아혁명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면서 <미제는 간악한 계획에 의해서 핵을 일본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터트려 40만이 넘는 일본인들을 죽이고 군사패권까지 쥐었다. 세계에서 정치패권을 장악했다.>며 <패권을 장악한 미제는 냉전체제를 구축했다. 1990년 소련정권이 망하자 미제는 신냉전체제를 구축했다.>고 지적했다. 

계속해서 <우리 조선민족에 대한 신냉전정책이다. 핵, 핵 하면서 우리 민족을 밀어붙였다. 그런데 김정일위원장이 그냥 있을 사람이 아니다. 선군정책으로 핵을 완성했다.>며 <이제 미제와 조선민족과의 대결의 시대 어떻게 할 것인가.>고 물었다. 

또 <지금 미제의 패권주의가 무너지고 있다.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가. 중국에 의해서 경제 패권이 약해지고 있고, 러시아에 의해서 군사 패권이 더 약해지고 있다.>며 <미국보다 국토가 1/100밖에 안되는 인구가 1/10밖에 안되는 조선에 의해 핵패권이 무너지고 있다.>고 자답했다. 

한편 <세계는 이렇게 바뀌고 있다. 미국은 일년에 총기사고로 4만명이 죽어가고 실업자와 노숙자가 세계에서 제일 많다. 미국이 갈 길은 딱 하나있다. 전쟁을 못해서 미국경제의 31%를 차지하는 군산복합체가 무너지고, 경제가 무너지면 미국은 망하게 되어있다. 역사의 발전법칙이다.>며 <발전법칙을 뚫고 우리 투쟁합시다!>고 일갈했다. 

끝으로 <오늘날 동북아정세가 어떠한가. 안중근선생의 유언대로 가야하지 않겠는가.>라며 <<미일안보조약>이요 <한미일정보보호협정>을 때려부시고 미제를 태평양바다에 때려넣고, 인류가 전쟁없는 평화세상에서 살 수 있는 그날까지 다같이 투쟁하자.>고 호소했다. 

이어서 오키모토활동가와 현필경소장의 대담이 진행됐다. 사회자는 <현필경소장은 오키나와에 다녀왔고 오키모토선생과 같이 연대투쟁도 했다. 서로 이야기 나눈 부분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청중들을 위해서 오키나와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해주시기 바란다.>고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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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필경소장은 <오키나와본토를 다녀오니 느끼는 게 많았다.>며 <오키모토활동가는 고향이 오사카인데 어떻게 해서 이사를 가게 됐고 이자리에 서게 됐는지 묻고 싶다.>고 물었다. 

오키모토는 먼저 <작년 11월 현필경소장을 처음 만났는데 오키나와에 대해 남코리아분들이 관심을 갖고 오시는 모습을 보고 너무 반가웠다.>고 감사인사를 전했다. 

오키모토는 <제가 태어난 곳은 오사카이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오사카에 있었고 대학은 도쿄에서 다녔다. 오키나와에는 1970년에부터 살았으니 48년 됐다.>며 <오키나와가 미군정 아래에 있었다. 인권도 없고, 민주주의도 없고 아주 고통스러운 사건에서 오키나와 사람들의 투쟁이 민주주의와 자치권을 요구하고 투쟁하는 상황이었다.>고 답했다. 

또한 <총파업도 했다. 폭동도 있었다. 미국에 대한 반대운동도 있었는데 그런 오키나와에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오키나와에 가서 지금까지 살면서 투쟁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필경소장은 <오키나와에 태어나진 않았지만 오키나와에 마음을 두고 오키나와에 투쟁하는 분들이 많았다. 섬에는 젊은 사람도 많이 찾아왔던 것 같다.>고 회상하며 <오키나와를 갔을 때 1970년 쿠자폭동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그 이후에 비폭력저항운동으로 노선을 변경하셨다고 들었다. 어떻게 된 건지 말씀해 주시길 바란다.>고 요청했다. 

오키모토는 <미국의 직접적인 지배가 끝났기 때문이다. 쿠자폭동때는 미국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때문에 사람들의 분노가 폭발했던 것이고 저도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1972년 오키나와에 대한 미국의 직접적인 지배가 끝났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일본정부의 법적인 지배가 시작됐다. 일본헌법에도 그렇고 일본의 지배에 법적인 체계가 오키나와에 적용됐다.>며 <그 가운데 직접적인 모습이 아니라 간접적인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투쟁의 어려움이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 

현필경소장은 <이번주에 남과 북의 대통령과 위원장의 회담이 열리고, 미국 트럼프와 북최고지도자의 회담이 열린다. 이런 부분들을 오키나와 분들은 어떻게 보는가.>고 물었다. 

오키모토는 <오키나와 사람들도 아주 주목하고있다.>며 <오키나와미군기지가 코리아전쟁 휴전협정을 맺은 후 더 강하게 만들어졌다. 지금의 모습에 원인이 된 것은 코리아전쟁 휴전협정이다.>고 지적한 뒤 <만일 코리아전쟁이 휴전협정이 아니라 강화조약으로 전쟁이 끝났다면 오키나와기지가 필요없었을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갖고 코리아반도의 수뇌회담을 주목하고 있다.>고 답했다. 

현필경소장은 <오키나와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이 남코리아에 연대하러 오는 일이 훨씬 많은 것 같다.>며 <남코리아에 주목하고 이렇게 연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물었다. 

오키모토는 <오키나와와 남코리아가 아주 관련되어 있는 것은 남코리아에 군사적 대립이 있기 때문에 오키나와 기지가 가동되고 오키나와 기지가 있기 때문에 코리아반도가 군사적 대립의 기지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형태로 코리아와 오키나와가 군사적으로 많이 관련돼 있는 것을 오키나와 사람들도 잘 알고있다.>며 <코리아반도의 평화와 군사적인 대립의 해소가 우리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오키나와 미군기지를 없애는 투쟁에 힘이 된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현필경소장은 <헤노코기지를 가봤더니 아침 7시부터 투쟁들이 시작되더라. 제가 특이하고 흥미롭게 본 것은 화장실이 없으니 화장실까지 태워다주는 봉사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농성장이 두 군데인데 기지에 대한 해설을 해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봉사활동들에 대해 더 말씀해주시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오키모토는 <헤노코투쟁은 20년 넘게 현장에서 진행되고 있다. 공사를 시작한 것은 작년 2월이었는데 그때까지는 20년동안 기지건설계획을 막았다. 20년 넘게 투쟁하는 가운데 해상투쟁과 육상투쟁 두 가지가 있었다.>며 <지금은 해상투쟁과 함께 게이트앞투쟁에 주력하고있다. 왜냐하면 육로로 자재가 반입되기 때문에 게이트앞에서 살면 공사장에 진입할 수 없고 공사도 진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 답했다. 

그는 <오키나와 시마구루미라는 자주적인 조직이 있다. 투쟁하는 사람들은 대형버스를 타거나 자동차, 승용차를 타고 헤노코에 온다.>며 <큰 주차장이 있다. 큰 주차장에 차를 두고 그 주차장하고 농성장하고 왔다갔다 하는 차량도 몇몇대 있다. 화장실이나 주차장이나 해변가에 있는 농성장에 왔다갔다하는 차량도 있다.>고 설명하고 <게이트앞에는 천막농성장이 있다 그 천막에 사람들이 잘 수 있다. 20년 넘게 하는 투쟁에서 게이트앞투쟁은 4년동안 있었고, 거기를 거점으로 투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어서 <오키나와투쟁은 비폭력이지만 포기하지 않는 투쟁이다. 승리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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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의응답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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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는 <미군철거나 미군기지환수문제에 있어서 국제연대가 중요할 것 같은데 청년으로서 어떤 활동들을 할 수 있을지 묻고싶다.>고 요청하면서도 <남북관계에서도 일본 활동이 확대되고 있는데 미군기지가 환수됐을 때 오키나와 민중이 어떻게 사용할 수 있게 하는지, 계획이 있는지 궁금하다.>고 물었다. 

오키모토는 앞선 질문에 대해 <오키나와가 가장 어려움을 갖고 있는 것은 청년들의 투쟁참가이다. 오키나와현장에 오면 아마 남코리아분들이 놀라울 것이다. 왜냐하면 젊은이가 없어서다. 젊은이가 없어서 60, 70, 80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투쟁하고 있다.>며 <젊은이들이 어떻게 하면 투쟁에 참가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 그래서 그점에 대해서는 오히려 남코리아사람들에게 묻고싶다.>고 답했다. 

이어서 <미군기지환수를 할 수 있다면 정치경제적으로 발전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일본정부가 오키나와사람들의 그런 희망, 미군기지가 오키나와에서 사라지면 오키나와가 동아시아의 중심이 되고 더욱 발전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알고 있으면서도 오키나와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놓아두지 않는다.>며 <오키나와는 미국이 안보조약으로 잡고 있는 곳이다. 오키나와 미군기지반대운동은 일본정부를 타도하고 미국의 부하처럼 행동하는 일본정부를 바꿔야 하는 운동이다. 여러분들이 박근혜정부를 바꾼 것과 같은 투쟁을 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질문이 이어졌다. 다음 질문자는 <미군기지문제는 모두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오키나와에서 연령이 높은 분들이 그 자리를 떠나지않고 지키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싶다.>고 물었다. 

오키모토는 <오키나와의 끝나지 않는 투쟁의 배경에는 오키나와전쟁이 있다. 73년전에 오키나와전쟁을 통해 천황제 일본정부가 오키나와사람들을 이용하고, 적으로 간주하며 많은 희생자를 냈다. 60만명중 15만명이 죽었다.>며 <오키나와에 주둔한 일본군이 60만현민에게 군사의 일제화라고 하며 오키나와사람들의 목숨과 집, 모든 것을 빼앗았다. 그런 오키나와전쟁의 교훈에서 오키나와사람들에게는 <전쟁에 대한 반대는 곧 목숨이고 생명>이라는 말이 있다. 생명이야 말로 보배다. 전쟁을 경험한 정말 많은 사람들이 깊이 그런 생각을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진 질문은 <오키나와민중들은 반미감정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일본 전체민중들의 반미감정은 어느정도고 본토에서의 투쟁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궁금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남코리아같은 경우는 북미평화협정을 체결해서 주남미군철거를 요구할 것인데 오키나와에서는 무엇으로 미군을 몰아낼 수 있는지, 궁극적으로 쟁취할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물었다. 

오키모토는 앞선 질문에 대해 <이전에는 미군이 간접적으로 기지를 만들었는데 1972년 오키나와가 반환된 후에는 새로운 미군기지 건설이 없었다. 지금에 와서 새로운 미군기지를 만들려고 하는데 전쟁과 통하는 군사기지에 반대하는 오키나와현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며 <오키나와 반기지투쟁은 심각한 오키나와전쟁의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고 답했다. 

또한 <미군의 힘이 강하다. 일본정부의 힘도 강하다. 오키나와사람들이 약하다. 오키나와사람들은 강한 무력을 갖고 투쟁할 수 없다. 무력이 없다. 우리들의 힘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며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싸워나가는 것이다. 그것이 오키나와 투쟁의 특징이고 오키나와 반기지투쟁의 힘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다음 질문에 대해 <일본의 반기지투쟁은 안보조약, 일본정부의 미군협정전쟁, 안보전쟁에 반대한 투쟁과 함께 진행되고 있다. 특히 국회를 둘러싼 사람들의 투쟁이 오키나와 투쟁에 연대하면서 크게 펼쳐지고 있다.>며 <목표는 아베정권을 교체하는 것이다. 아베정부의 미국화와 위험한 전쟁을 하려는 일본의 흐름을 바꾸는 것이 목표이다. 일본 정부를 바꿔서 안보조약, 소파협정을 바꾸면 미군을 오키나와에서 몰아낼 수 있다.>고 답했다. 

끝으로 <일본은 지금 주인이 미군이다. 미군이 일본을 지배하고 있다. 오키나와도 지배하고 있다. 우리 목표는 국민주권이다. 국민이 주인이 된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고 밝히며 <미군이 주인 아니다. 전쟁이후 73년 동안 일본은 미국에 피해를 당했다. 미군의 부하가 되어서 나라 전부가 미군의 아래에 있다.>고 호소했다. 

그는 <안보조약, 소파협정, 일미합동사령부, 법적인 미군지배체계가 만들어져있다. 그것을 하나하나 해명하고 규탄하고 국민의 주권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 저희들의 목표이다.>고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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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민족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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