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결국면에서 언론이 태어나는 것, 첨예한 국면을 극복하자는 의미”


“조용수는 대중의 목마름을 봤고 그 목마름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았다”

[창간기념인터뷰] 이천재(조국통일범민족연합남측본부, 한국진보연대, 평통사 고문)  




21세기민족일보의 창간을 앞두고 원로통일운동가 이천재선생을 만나 그의 삶과 통일운동, 언론이 나아갈 방향 등에 대해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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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몇년전 후두암수술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현재 건강은 어떠신지요? 연로하신 나이에도 불구하고 각종 투쟁의 현장에 나오고 계신데 현재 선생님이 활동하고 있는 단체들과 직책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내가 올해 82세인데 4년간에 걸쳐서 마취4번, 수술3회를 했어. 지금은 3개월에 한번 검진을 받는데 의사가 건강이 좋다고 해. 이 후두암이란 것이 90~95%가 5년 생존한다는 거야. 


 


내가 고문을 맡고 있는 곳이 대표적으로 범민련, 한국진보연대, 평통사고 그전에는 6.15실천연대 등인데 평통사에 있는 주요동지들이 옛날에 서울연합에서 나와 같이 몇년씩 고생했던 동지들이야. 평통사 사람들이 그때그때 운동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놓치지 않는 사람들이야. 천안함문제의 진실에 대해 제일 먼저 기자회견을 해서 찾아가서 고맙다고 같이 저녁을 먹기도 했어.



한국진보연대고문이라는 건 참 우스운건데, 1990년대후반에 오종렬, 한충목 이런 사람들과 힘겨운 갈등이 있었어. 그 사람들이 소위 3년을 준비해서 10년후에 민중권력을 쟁취할 수 있다는 얘기를 했고, 노동계급이 전국연합을 따라오지 않으니 해체하자거나 전국연합이 민주노동당의 지지를 조직의 결의로써 확인하고자 하는 등 이견이 있었어. 



1992년부터 1997년까지 5년동안 범민련의 역사는 내가 차마 말을 못하겠어. 최소한 자기강령이나 자기규약을 지킬 줄 알아야 해. 범민련준비위는 17개 정당사회단체가 모였는데 문익환목사, 이창복선생이 잡혀가니까 준비위가 와해됐지. 간단히 말하면 안기부에서 공작반동들이 준비위구성원들을 매수도 하고 자기들이 오랫동안 공들여 고급공무원들을 박아놓기도 하면서 난장판을 쳤어. 안기부에서는 대놓고 나한테 돈봉투를 가지고 왔어. 전주이씨 효령대군자손이라고 하면서 접근하기도 했어.



범민련내부에서 주도권싸움을 하니 배겨날 수 없었던 거요. 민족대단결에 관한 관점의 차이가 있었어. 그 관점에서 내가 설명한 만큼 의미있는 자기설명이 불가능하니까 그들이 나보고 무정부주의자라고 하더군. 사실 1950년대 무정부주의정당에 입당해 5.16쿠데타나고 해산될 때까지 최후의 무정부주의정당 선전부장을 했어. 사실 그때에는 친일파가 한사람도 없는 정당은 무정부주의정당밖에 없었으니까 시간을 가지고 노력을 하면 무슨 가능성이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었어. 그런데 그후에 무정부주의자가 반미를 안하면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무정부주의와 나는 결별했었는데 범민련 사람들이 나보고 무정부주의자라고 비판하고 공격하는 거야. 



통일운동에 2개의 적이 있었어. 하나는 민족회의라는 사이비대중조직을 만들려는 음모가 있었고, 또 하나는 연세대항쟁을 영웅적 항쟁이라며 대단결이나 통일운동을 관념적 좌편향으로 몰고 가려는 의도가 있었어. 안기부에서 연세대항쟁의 관념적 좌편향을 더욱 좌편향으로 내몰아서 통일운동을 고립시키고자하는 전략적 의도가 있었던 거야. 학생운동에서의 지도자라는 것은 노동계급의 수령과 같은 의미는 아니야. 그런데 지도부는 대중의 보호를 받아 안전하고, 1500명의 대중이 개 끌려가듯 끌려나갔어. 그때 학생간부들이 한줄로 서서 “1500명의 학생들의 안전만 보장한다면 우리는 잡혀들어가겠다”고 선언을 했다면 최소한 학생운동이 학부모들로부터의 신뢰만이라도 상실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지. 



내가 “대중은 아무렇게나 해버리고 지도부에 대해서 배신을 느끼고 불신하고 학부모들이 학생운동이 틀려먹었다고 생각하니, 언론의 동조 등 이 거대한 붕괴와 와해를 어떤 정치적 역량으로 수습할 수 있겠느냐, 이건 중대한 사태다”라고 하니까 나보고 개량주의니 수정주의니 하는 거야. 



이종린선생이 범민련의장 직무대행 못하겠다고 사직서를 써놓고 전주로 내려갔어. 그래서 내가 회의를 주재하려고 하니 회의를 할 수가 없었어. 내가 전주에 내려가 이종린선생도 만났고 사나흘 후 이종린선생이 다시 하겠다고 연락이 왔어. 만나서 서로 열심히 잘하기로 했지. 1997년 5월에 회의가 있었는데 독감으로 회의를 못나갔어. 내가 안나간 사이에 이천재가 수정주의자 개량주의자라면서 6대4인가 얼마로 제명결정을 내린 거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세상을 바꾸자고 하는 그 의지로 뭉쳐진 사람들이라면 사람세상의 집단적 개념에서 최고의 집단인데 이렇게 유치할 수 있느냐 이거야. 내가 난리를 칠까 하다가 누가 좋아할 거냐는 생각에 말았어. 조직밖의 싸움으로 몰아가면서 난리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 조직에서 중요한 것은 조직의 민주주의야. 사상, 교육 수준의 차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였는데 기계에서 나온 제품이 아닌 사람이 모인 조직으로서 자기기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조직의 민주주의에 있어. 이것을 떠나서는 백해무익이야.



내동생이 범민련의장인데 동생이 의장을 하고 내가 고문을 하면 자칫 가족주의로 몰릴 수도 있고 가족주의도 또하나의 성격을 달리하면 정파노름인데 그런 위험부담도 있어. 내가 내동생을 너무 잘 알아. 그래서 내가 범민련에 안 나갔어. 그렇지만 의장이 감옥에 있는 동안은 내가 열심히 나가서 하겠다고 했지. 탄압을 받을 때 더욱 단결을 하는 게 우리 혁명적 요구지, 탄압을 하니 풍비박산 난다는 것은 우리의 본래 철학적 요구가 아니야. 



2. 87년 6월항쟁 당시 명동할아버지로 불리셨는데 특별한 계기나 사연이 있습니까?



내가 이천에서 살다가 1983년인가 1984년인가 사람 많은 곳을 가야 그래도 세상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 것을 알고 죽을 수가 있을 거 같아서 부랴부랴 땅을 팔고 서울로 올라왔어. 1987년까지 3년동안 노가다판에서 질통도 지고 타올공장에서 화물을 받아 쌓고 종교단체에서 설교노릇도 하고 살다가 1987년에 이한열이 쓰러지고 나서 내가 왜 이렇게 비겁한가 생각하며 베기지 못할 고통이 있었어. 그러다보니 명동성당 농성에 참여한 거야. 



농성에 참여했을 때 학생들이 민간대표라고 해서 연설을 제안했지만 일체 거절하면서 연설을 한번도 하지 않았어. 그런데 6월14일 오후4시쯤 명동성당에서 결혼식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꽉 들어찼어. 나보고 연설을 하라고 하는데 4~5일 농성을 같이 해왔지만 나를 쳐다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내 양심을 말하는 것도 책임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처음으로 입을 열었어. 



성모마리아상앞에서 축도를 하면서 한 20분 연설을 했어. 6.10항쟁때 학생들의 연설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지도자들의 연설을 다 들어봤지만 6.10항쟁의 사회정치적 의미 또는 역사적인 의미는 어떤 것이라고 분명하게 조리있는 정의를 내리는 사람은 없었고 다 독재에 대한 분노만 있었어. 그래서 20분연설에서 나만이라도 이 항쟁의 성격과 의미가 무엇인가를 말해야겠다는 의무감이 있었어. 또 연세대에 만명이 모인 이한열추도식때 의미있는 연설을 했지. 지금도 사람들이 놀라운 연설이었다고 이야기를 해. 



명동성당의 의미는 결국은 6.10항쟁의 전체 맥락을 볼 때 항쟁을 주도한 층의 계급적 성격의 문제야. 종교인, 학생 등 결국 6.10항쟁의 시원과 발전과 결말이 참 어쩔 수 없었던 것이야. 아쉬운 것은 6.29가 나오고 김대중이가 선거를 관리할 수 있는 선거내각을 따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어. 이것은 확실히 노회한 정치가다운 판단이라고 보는 거야. 그때 재야에서 문익환, 백기완, 계훈제 등 이런 사람들이 “선거를 관리할 수 있는 중립내각을 만들지 않으면 6.29를 안 받아들이겠소”하면서 직선쟁취가 아니라 독재타도의 기치를 들고 싸웠어야 하는데 김대중의 주장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스쳐버린 것이 참 아쉬워.



명동성당 농성할 때 아무도 이름들을 안 가르쳐줬어. 그러니 나도 이름을 안 가르쳐줬지. 서로 이름들을 모르고 농성을 한거야. 그러니 학생들은 이름을 모르고 머리는 하얗고 하니 ‘명동할아버지! 명동할아버지!’라고 불렀어. 그래서 명동할아버지라고 불렸는데 난 명동할아버지란 말을 아주 싫어해. 명동이 어떻게 보면 퇴폐의 거리, 소비의 거리인거 같기도 하고.



3. 선생님은 1993년에 『희망』 2000년에 『고백』 등 자전적 수기를 출판하셨는데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향후에 책출판 계획이 있으신지요?



『희망』은 젊은 사람들의 역사의식을 바로 잡아주기 위한 전기적 수기로, 내 전기를 쓴 건데 평범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생활과 사상이 변화된 과정, 권력의 범죄성 등에 대해 1990년대초까지 쓴 것이고, 『고백』은 현대 통일운동을 진보운동에서 전략전술적인 문제에 대해 다룬 것으로 우리 운동에 대한 과학적·이론적 이해, 비판적 시각, 문제제기 등 이런 것을 썼어. 



『희망』은 5000부 찍었는데 다 팔렸고, 『고백』은 한 2000부 찍어서 이것도 역시 다 나갔어. 『희망』이 다 팔렸을 때 대동출판사에서 살아있는 사람의 전기중에서 가장 많이 팔렸다더군. 집필은 계속 구상을 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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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선생님은 1949년 국가보안법위반에 의한 소년원 수감을 시작으로 7차례에 걸쳐 총8년여의 옥고를 치르셨고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 공동대표로 활동하셨습니다. 이명박정권 시기에 국가보안법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탄압받고 있는데 국가보안법폐지 전망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감옥에서 산 역사가 소년원 수감부터 8차례 입건됐는데 처음에는 소년원에 들어가서 감옥에서 몇개월 살았고 육군형무소에서 2번, 민자통사건으로 1번, 범민련사건으로 2번 살았지. 감옥을 산건 7번이고 한번은 무죄판결 받았어. 



내가 1931년 안성에서 태어나 안성농고 3학년을 중퇴했는데 수감된 것은 큰 의미가 없었고, 고등학교는 그만두고 전쟁전후로 법률공부를 좀 했어. 그때는 변호사 되는 게 꿈이었는데 전쟁을 경험하면서 사람의 권리가 개만도 못하다는 생각을 했어. 소년원을 나와서 서울 외삼촌댁에서 처음으로 경제학개론이니 문학개론이니 책을 읽다보니 법률공부가 만만해 보이더라고. 



육군형무소는 대구에 있었는데 1952년 3월에 들어가서 1953년 2월에 나왔고 1955년에 들어가서 1958년에 나왔어. 1952년에 들어간 건 전쟁때 부역했다고 들어간건데 전쟁은 이천 설송면에서 겪었어. 6.25전쟁때 내가 무슨 부역을 했어. 말이야 참 우스운거지 내가 인민군들에게 노래 가르쳐주고, 된장·고추장 거둬서 면에 갔다주는 것을 농촌마을에서 한거야. 



그당시 무슨 일이 있었냐면 조선노동당 설송면에 면당위원장이 밤에 찾아와서 나보고 면당에 당행사가 있으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과 강령을 해설하는 강연을 해달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공화국헌법도 읽어보지 못했고 노동당강령도 모르는데 어떻게 강의를 합니까”하며 잡아뗐지. 그러자 면당위원장이 법률공부한 사람이 면에 당신밖에 없으니 꼭 해달라는 거야. 그래서 하겠다고 하고선 강령과 헌법을 보니 그것이 다분히 대중정당적 성격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보통정당강령과 큰 차이가 없고 헌법에도 토지는 농민에게 줘야한다고 하고,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다 존중한다고 하니 법률공부하던 나에게 별게 아닌거야. 다음날 면당에 가니 70여명 노동당 후보당원들이 한사람씩 심사를 받고 있는 거야. 70명 후보당원들에게 오전에 한강좌, 오후에 한강좌를 했어. 



특히 대한민국헌법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헌법에서 남북사이의 군사적 충돌은 원칙적으로 헌법적 충돌이 아니라 민족과 반민족의 충돌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그 결론에 부합해서 강연을 했어. 듣고 있던 당간부 한사람이 참 좋은 강연을 해주셨다면서 어려울 때 교장실로 데려가 국수를 삶아주고 백합인가 파랑새인가 담배한보루를 주면서 고맙다고 하더군. 



그게 찍혀서 아주 의식적인 ‘빨갱이’, ‘공산당 중에 공산당’이라며 징역을 살았지. 1952년에 징역 살 때는 북으로 간 이인모선생과, 장기수중에 안학섭선생과도 같이 있었어. 1955년에 들어간 것은 소위 4사5입개헌때 젊은이들하고 데모하자고 토론하다가 붙잡혀가서 3년을 받았어. 그때는 3년 다 살고 나왔지. 



내가 이런 과정에 있었던 것도 성장과정속에서 이런 것이 있었던 거야. 할아버지가 그렇게 왜놈들을 싫어했어. 한번은 할아버지와 나, 할머니와 아버지가 겸상을 하면서 아침을 먹는데 누가 징용을 간다는 얘기가 나오니까 할아버지께서 “내일모레 망할 놈들이 극성지패다”고 하셨어. 그러자 할머니께서 “왜놈이 왜 망해 10여년부터 왜놈 망한다는 소리를 들었어” 하시자 할아버지께서 숟가락을 크게 놓으시며 ‘에잇’ 하셨지. 눈치 빠른 내가 못 알아들었겠어?


 


지금 생각하면 보면 참 명언인데 어떤 사람이 “평양서는 망나니가 전부 공산당이라고 하네”라고하자 아버지께서 “망나니노릇을 했어도 왜놈들을 들볶고 못살게구는 망나니가 공산당이겠지. 내동포 내형제를 못살게구는 망나니가 어떻게 공산당노릇을 했겠나. 모르는 소리 하지 말게”하면서 핀잔을 줬어. 어린 마음에 나는 ‘공산주의라는 가치 위에 민족이라는 가치가 있는 거로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 



민자통사건으로 수감된 것은 1988년에 민자통을 결성하고 1989년에 1년반을 살고 나왔지. 범민련사건은 3번탄압이 있었는데, 1차탄압으로 문익환목사, 이창복집행위원장이 잡혀 들어갔고, 2차탄압으로 이범용선생이 중심이 돼서 한30여명이 들어갔어. 나는 2, 3차 탄압때 들어갔는데 2차탄압으로 1995년 12월에 들어가서 1996년 11월에 나왔고, 3차탄압으로 1997년 5월에 들어가서 1998년 5월에 나왔어. 범민련이 주장했던 주한미군철수, 국가보안법철폐 등이 다 이적으로 간주됐지. 



문제는 악법이라는 게 말이지, 악법도 한번 법이 만들어지면 생명력이 무서운 거야. 일례를 들면 미국에서 1920년에 만들어진 금지법은 전국민을 위법자로 만들었어. 그렇게 효용성도 실효성도 없는 법도 1931년에 사라졌으니 수명이 10년 갔어. 법이 보수성을 가진 거지. 다수의 요구에 의하지 않으면 법이 깨지지 않아. 그런데 여기서 얻게 되는 자명한 교훈은 전국민이 금지법위반자라 금지법이 깨졌다는 것이야. 국가보안법으로 제일 약한 사상양심의 자유로 해서 천명, 만명이 감옥에 들어가야 국가보안법이 없어져. 국가보안법이 무서워서 벌벌 떨며 규범에 복종하면서 국보법의 가시울타리안에서 통일을 한다? 국가보안법 울타리안에서 백날 춤을 춰봤자 권력을 쥔 놈들이 권력이 아주 취약할 때는 엄격히 하고 국보법위반자들이 사회적으로 파괴할만한 위력이 아닐 경우는 인정해주고 한단 말이야.



이번에 노수희동지가 조문을 간 것도, 지난해 12월 황혜로동지가 조문을 간 것도 천백번 정당하다고 봐. 6.15, 10.4 선언의 정신에서 봤을 때 당연히 조문가야지. 김일성주석이 서거했을 때 김영삼정권이 조문을 못 가게하고 청와대 비상소집을 하고 얼마나 부끄럽고 반인률적인 역사인가. 이명박정권은 그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북 형제들에게 위로를 한다는 엉성한 조의표현이나 하고 말이야.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서거했을 때 부담스러운 사람들이 아니라면 남쪽에서 가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더 갔어야 했어. 양심이 있고, 용기있는 동지들을 고맙게 생각해. 황혜로동지는 안 들어왔지만 노수희동지가 오고 난 후 정권에서 동지들을 탈출이니 고무찬양이니 한다면 할 수 있는 것 뭐든 하겠어. 황혜로동지나 노수희동지나 북쪽사람들이라면 애국적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접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 그 격에 맞는 정교한 대접을 했을 것이야. 그게 통일 아니요.



5. 선생님은 민자통과 전민련 활동을 거쳐 전국연합공동의장, 전민특위남측조사단장,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공동대표, 범민련남측본부고문 등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남측의 자주민주통일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오셨습니다. 1990년대 남측운동에서 인상적이거나 교훈적인 내용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여러과정을 거치면서 참으로 훌륭한 애국자들을 봐왔어. 이범용이 위대한 애국자라 할 것이고, 평민당 부위원장 문재룡이 참 헌신적이었어. 폐암으로 죽었는데 오죽 문재룡이가 죽고나서 한스러웠으면 이천재라는 사람이 민족시라는 것을 썼어. 그런 애국자가 있었고 김남주시인이 있지. 김남주가 감옥에 살 때는 내가 농촌에 있었거나 밖에 있었고, 김남주가 밖에 나오면 내가 감옥에 들어갔어. 그 사람이 남겨놓은 시를 보면서 절제의 민족주의를 느꼈어. ‘김남주같은 사람이 살아있었으면 통일운동이 폭발적으로 활성화되고, 이범용이 살아있었으면 대지도자가 돼 있었을텐데’하는 아쉬움이 있어.


 


가톨릭에서 김수한추기경, 정진석추기경으로 이어지는 주류와 문정현신부로 이어지는 비주류차이가 있지만 가톨릭의 공동이익을 위해서 서로가 자중하는 역사를 배워야 해. 1990년대 NL이니 PD니 하면서 갑론을박하는 것은 부끄러운 역사야. 얼마전 제주도에서 이정희대표를 만났을 때도 “좌우를 따지지 말고 만나라. 폭넓게 만나라”고 했어. “다만 종북이라고 하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검증될게 있다. 종북종북 하는 것은 신냉전이론인데 냉전이론의 변종으로 이쪽은 검증을 해야 한다”고 했어. “단지 우파라고해서 경계하지 마라. 폭넓게 만나면서 폭넓은 단결을 해야 한다”고 했지.



열걸음 앞을 내다보면서 한걸음 나아가는 낮은 단계의 민주주의라는 것도 민주주의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혁명적 용기로 되는 것이지 적당히 되는 것이 아니야.



남의 발에 내 구두를 맞추지 말자. 주어진 현실에 보태지 말고 빼지도 말고 현실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지도자를 다른 나라에서 빌리고 꿔오고 사오는 것이 아니고, 변혁운동이 팔아먹고 사오는 것도 아니고, 변혁운동이라고 하는 가장 높이 요구되는 정치적 역량에 의해서만이 이 운동이 발전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깊은 사색과 고뇌가 있어야지. 허망한 사회적 명성이나 국회의원이나 신분상승이 아닌 순결한 양심에서 감동이 주고받을 때 가능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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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최근 남미합동군사훈련에 반대하여 광화문에서 진행된 전쟁반대 농성에서 뵐 수 있었는데, 최근 북미간의 대화와 대북전쟁훈련으로 인한 코리아반도전쟁위기 고조를 어떻게 보시는지, 민중운동진영이 어떻게 투쟁해 나가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먼저 연평도사건을 이야기하면 사실 사전에 북이 경고를 했고, 족집게로 집어내듯이 공격목적에 맞게 공격했어. 포탄도 소형포탄이야. 한미가 거기서 훈련을 한 것도 문제가 있어. 노무현대통령이 북과 평화번영의 지역으로 하자는 게 원칙으로 합의됐고, 평화공영의 지역으로 운영하자고 합의했다는 것은 그 지역이 분쟁지역이라는 것에 합의한 거야. 남북이 서로 인정한 건데 이명박정권은 서해지역이 분쟁지역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해.



그런데 북에서는 2가지를 잘못했어. 아무리 정확하게 예고를 하고 표준을 정확히 한다고 하지만 남쪽사회에서 대중들을 100% 통제를 못해. “자본주의사회에서 인민을 100% 통제할 수 있겠느냐” 이말이지. 결국은 너무 지나치게 봤고 조국이 통일되면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가 통일된 연방공화국의 국토야. 지금 분쟁지역이어야 봤자 통일된 나라요, 민족의 영토라는 것이지.



연평도포격은 한미군사훈련을 한 것에 대해 당연한 포격이야. 이번 3차고위급회담을 통해서 합의한 것은 미국놈들이 발표한 것도 봤지만 합의의 시작부터 끝은 평화야. 합의정신에 충실해야지. 북은 북을 주적으로 하는 한미군사훈련을 하니까 합의를 무시해버릴 수 있는 조건은 미국만 아니라 우리도 가지고있다고 하는 거야. 인공위성발사가 위법은 아니지만 인공위성을 발사하는 것이 위반이라고 해도 평화를 합의한 것을 군사훈련을 하면서 뒤집는 미국이 있지만 뒤집을 수 있는 권리는 북도 있다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지.



인공위성은 십중팔구 대한민국이나 서방사람들이 놀랄만한 기술수준임은 확실해. 인공위성에서 태양열을 이용한 발전이 핵융합이용을 위한 발전 이런 식으로 말이지. 북사람들이 세계언론인들을 오라고 했잖아. 언론인들뿐 아니라 정보원으로 위장한 사람들도 가겠지만 그들 모두에게 보여줄 확신이 있는 과학적 수준이라고 하는 것은 우주분야에서 어떤 비대칭적으로 미국보다 북이 우위에 있는 것도 있을 거라는 거야. 미국이 군사적으로 항공모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비대칭적 우위가 있지만, 정보통신우주전쟁에서 비대칭적 북의 우위도 있을 수 있다는 거야. 



전세계가 핵실험을 2000번 했어. 미국도 한 1000번이상 했다는 얘기인데 북의 핵실험과 그다음 단계는 미국이 100번 실험한 것보다 뛰어넘는 단계라는 것이지. 만약에 북인민들이 핵실험을 하고 인공위성을 날리는데 미국놈 눈치봐가면서 발사를 한다는 것, 실험한다는 것이 북의 인민들에게 인식되면 북은 망해.



7. 얼마전 박창균 코리아연대상임대표 추도식에 오셨는데, 박창균대표에 대하여 좋은 말씀 바랍니다. 



박창균선생과 민자통을 같이 했는데 89년도에 같이 옥살이도 했고 재판도 같이 받았어. 그분의 형님이 공산주의활동을 했다고 들었는데 구체적으로는 듣지 못했어. 1988년 민자통을 했을 때는 혈기가 왕성했어. 2000년대 들어와서 박창균목사의 사상적인 부분에서 많은 변화가 느껴졌어. 나이가 들수록 사람이 퍽 신중해지고 사색형이 됐어. 



강희남선생의 「예수는 원시공산주의자다」라는 글이 있는데 사회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원시공산주의는 그런 것이 아니고 예수는 시온주의에 대한 반항가이고 혁명가였다고 생각해. 다만 그때나 지금이나 혁명가라는 것은 약자를 보호하는 양심 없이는 혁명가는 안돼. 예수가 사실 약자를 보호한 것은 사실이야. 그런데 위정자들은 자기식으로 해석해서 자본가를 보호하고 말이야. 그리스도측면을 논리적으로 해석하면 공산주의자도 가능해. 원시공산주의자라는 얘기는 논리가 비약이긴 해도 그글을 읽으면서 강희남선생의 사상의식을 읽을 수가 있었어. 강희남선생이 한서를 많이 읽어서 주자학의 의절, 충효 사상이 꽉 찼어. 양심에 반한 행위를 안하고 그야말로 의리가 있어.



8. 혹시 민족일보와 조용수사장에 대한 인연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1960년대초 박정희쿠데타이전의 시기를 회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민주주의운동이나 통일운동이나 언론이 참 중요한데 언론에 눈을 떴다는 것은 중요해. 조용수선생이 당시 31살이었는데 언론구상에 대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뿌리치고 시작했어. 그 용기와 혜안과 결단이 대단해. 조용수선생이 대중의 목마름을 봤고 그 목마름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안 것이지. 민족일보를 창간해서 달포가 지났을까 사람들한테 들어보니 서울시내 가판대에서 조선, 동아일보 수준을 따라간거야. 일반적으로 신문의 발행부수 절반을 서울 가판대에서, 지역에서 소화하는데 민족일보는 역사가 짧으니 지국지사를 제대로 가지지 못해 지방은 애로점이 있었지만 서울에서의 구독수준은 대단한거야. 대중이 열광적으로 구독했어. 말하자면 5.16의 구제도, 구질서의 위기의식을 넘어야 된다는 생각으로 가령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등의 구호로 인민대중의 요구를 정확히 뚫어본 예지가 있었어.



9. 민족의 단합과 조국통일을 위한 인터넷언론 ‘21세기민족일보’가 곧 창간됩니다. 민족일보에 당부하시고 싶은 말씀이나 격려의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레닌이라는 사람은 어디를 가나 신문을 만들었어. 사회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사건도 혁명에 이롭게 과학적인 이론으로 해석했어. 양심적인 언론이 역사적 사명이야. 언론이라면 문제를 제기할 줄도 알아야 해. 요즘 언론들은 비판도 제기할 줄도 몰라. 또 4~5명의 논진들을 구성해 기사 하나 쓰더라도 논진들의 토론으로 해야 해. 언론이 언제 태어나는지가 중요한데 대결국면에서 태어나는 것은 이 첨예한 국면을 극복해보자라는 것이 아닌가. 그런 정신으로 시종일관으로 해야 해.


민족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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