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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1. 박근혜와 최태민

1. 박근혜와 최태민

[기획] 박근혜·정윤회<정권> 백서
산케이신문 2014.8.3 <세월호참사당일 사라진 7시간>보도, 세계일보 2014.11.28 <정윤회 비선실세의혹>보도이후 <박근혜·정윤회게이트>의 전말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정가의 풍문으로만 떠돌던 박근혜·최태민·최순실의 관계가 수면위로 떠오른 것이다. 21세기민족일보와 코리아연대(자주통일과민주주의를위한코리아연대) 공동기획 박근혜·정윤회<정권> 백서를 공개한다. 박근혜<정권>의 본질과 수많은 <참사>의 원인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각종매체보도를 종합했다. _편집자주

<연재순서>
1. 박근혜와 최태민
2. 박근혜와 최순실

3. 박근혜외 정윤회 

희대의 사기꾼, 사이비교주
각종매체에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최태민은 추악한 난봉꾼, 사이비교주, 희대의 사기꾼으로 평생을 보낸 사실을 밝히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최태민은 1912년 5월5일생(1979년 당시 67세)으로 이름을 7개(최상훈, 최퇴운, 공해남, 최태민 등)나 사용했다. 

황해도봉산군사리원에서 태어나 1942~1945년8월까지 황해도경 순사로 일제에 부역했다.(프레스바이플, 2012.03.29)

1949년 육군헌병대문관으로도 근무한뒤 1954년 머리를 깎고 사이비중이 됐으며 중학교를 설립해 교장이 됐다. 

그뒤 서울서대문구대현동에서 <영생교>를 만들어 교주로 활동하다 박근혜당시청와대퍼스트레이디를 만난후에는 목사안수를 받았다.(조선일보, 2012.8.22)

70년대 들어 최태민은 서울과 대전 일대에서 난치병을 치료한다고 사이비종교행각을 벌였다.

불교·기독교·천도교를 종합했는 교리를 내세우고는 방민이란 가명을 쓰면서 <원자경>, <칙사>, <태자마마> 등의 호칭을 자처했다.(한겨레, 2012.7.17)

이에 대해 1970년대말 중정(중앙정보부)이 최태민목사의 구국선교단 부패비리사실을 발표한 적이 있는데 2012.8.22 조선일보는 <박근혜의 후원으로 구국봉사단(구국선교단의 후신)을 설립, 박근혜명의를 팔아 이권개입 및 불투명한 거액의 금품을 징수했다.>고 보도했다.(시사IN, 2012.12.10)

중정수사자료로 알려진 문건에는 최태민이 공사수주, 장군승진, 국회의원공천금품수수와 차명계좌돈세탁 등 총44건 3억1755만규모의 비리항목이 적시돼 있다. 

가령 봉사단공금을 빼돌려 차명계좌로 세탁하거나 승용차를 구매했고, 중정복직과 공화당의원공천, 대령의 장성진급과 관련한 금품을 수수한 것 등이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다. 

별도로 12건의 치정관계에 대한 조사도 포함되어 있다.(한겨레, 2012.7.17, 미디어투데이, 2012.8.22)

2012년 당시 박근혜대통령후보는 시종일관 최태민의 비리의혹을 부인했지만 10.26재판기록과 관계자들 증언이 이를 확인시켜주고 있다.(오마이뉴스, 2012.10.29)

1991년 박근혜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최태민이) 우리사회를 걱정하는 사람으로 느껴서 그분과 같이 일하게 됐다>고 말했다. 

결국 최태민은 전두환신군부의 12·12쿠데타직후 사기 및 횡령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돼 징역1년6개월을 선고받았다.(간석출판사, <태자마마와유신공주>, 2012,5.31)


풍문 진원지는 미국·수구인사

둘의 관계와 <사생아>풍문은 미국과 수구인사, 박근혜의 가족들의 입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한겨레, 2012.12.7)

미국의 극비문서를 폭로한 위킬리크스에 따르면 지난 대통령선거기간 주남미대사관 버시바우는 <최태민목사는 젊은시절 박근혜후보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통제했던 사람>이라고 미정부에 보고했다.(미디어오늘, 2014.10.15)

선친 박정희의 사망후 16년동안 대중앞에 나서지 않은 박근혜가 정계에 뛰어들자 박근혜의 이종사촌형부인 김종필전자민련총재는 <최태민의 자식까지 있는 애가 무슨 정치냐?>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무현정권 당시에는 <사생아>와 관련된 보고서가 존재한다는 소문까지 떠돌았다.(선데이저널, 2012.7.15)
정두언새누리당의원은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최태민과 박근혜 관계를 낱낱이 드러내면요, 온국민이 경악할 것입니다. 그리고 박근혜를 많이 좋아했던 많은 분들이 밥도 못먹을 것입니다.>라고 폭로했다.(<손석희의시선집중>,  2007.8.17)
김영삼의 차남 김현철전여의도연구소부소장도 <이회창씨의 아들병역문제보다 훨씬 큰 논란거리가 있다>며 그의 사생활의혹을 제기하였다.(뷰스앤뉴스, 2012.7.16)

<박전위원장이 낳은 자식이 올해 30살정도이며 일본에 살며…>라는 소문이나 <DNA검사…> 등을 언급한 대목은 김현철로 나오지만 사실상 80~90년대 정계의 중심에 있던 김영삼전대통령인 것으로 알려져 소문의 신빙성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진실의길, 2012.7.18)
 
극우논객 조갑제는 2015.10 월간조선칼럼에서 <박근혜대표가 1970년대후반기에 최태민이란 이상한 사람을 구국봉사단총재로 썼다가 최씨가 수많은 스캔들을 일으켜도 그를 끝까지 감쌌던 적이 있다. 박대표는 한번 믿어버린 사람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평가를 안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미디어투데이, 2014.12.2)

2007년대선당시 한나라당경선에서 이명박후보측 박근혜후보검증팀 핵심인사는 <박근혜에게 박지만은 가족이 아니라 애물단지, 골칫덩어리에 불과하다. 최태민과 최순실, 정윤회가 가족이라고 보면 된다.>며 <우리가 확보한 증언이나 자료내용은 너무나 쇼킹한 내용이라서 당시엔 MB까지 보고도 이뤄지지 않았다. 다만 기록은 남겨뒀다>고 주장했다.(주간경향, 2014.12.16)


<남코리아의 라스푸틴>

2012대선당시 버시바우는 최태민에 대해 <남코리아의 라스푸틴>이라고 표현했다. 

라스푸틴은 시베리아의 사이비사제로서 제정러시아의 마지막황제 니콜라이2세때 황후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통제한 후 황제마저 장악, 농락했던 자로 알려져있다.

여러 매체들은 육영수피살후 최태민을 만난 박근혜가 최태민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쓰고 있다.

불교·기독교·천주교를 복합해 만들었다는 교리 <영혼합일법>을 주장한 최태민은 1975년 2월말경 박근혜에게 3번에 걸쳐 편지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프레스바이플, 2012.03.29)

한때 박정희에 충성하다 사이가 나빠진 전중정부장 김형욱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1974년 육영수사망직후 최태민은 <어머니 목소리가 듣고싶을때 나를 통하면 항상 들을 수 있다. 육여사가 꿈에 나타나 <내딸이 우매해 아무것도 모르고 슬퍼만 한다>면서 <이런 뜻을 전해달라>고 했다.>고 편지를 썼다고 주장했다.(허핑턴포스트코리아, 2014.12.2)

박근혜대선후보는 2007년 후보검증청문회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해에 수많은 위로 편지와 전화를 받았다. 그내용이 상당히 마음에 와닿고 만나서 얘기듣고 싶을 때 만났다. 최씨는 그렇게 해서 만난 몇분중 한분>이라며 <어머니가 돌아가신뒤 힘들었을 때 흔들리지 않고 바로설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분>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1975.3.6 박근혜는 최태민을 청와대까지 불러 대화를 나눴다.(조선일보, 2012.8.22, 한겨레, 2012.7.17)

박근혜를 처음 만난 최태민은 <구국선교>를 역설했고 이에 동조한 박근혜의 후원으로 자기 심복들을 중심으로 <대한구국선교회>를 설립하고 스스로 총재로 취임했다. 

이조직은 1976.12.10 <구국봉사단>으로, 1979.5.1 <새마음봉사단>으로 개칭됐다.

명예총재는 박근혜가 직접 맡아 그 밀착관계를 잘 말해준다.(프레스바이플, 2012.03.29)

최태민이 언론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75.5.11 신도 5000여명을 파주임진각에 모아 박정희대통령을 위한 기도회를 열었을 때다. 

이자리에 참석한 박근혜는 이후에도 1주일에 2~3차례 그가 주최하는 행사에 참석했다.(동아일보, 2012.9.24)

80년대후반 전두환독재가 끝나자 박근혜는 대외활동을 재개하며 최태민과 함께 <새마음봉사단> 후신 <근화봉사단>을 조직했다.(한겨레, 2012.7.17)

최태민은 1990년 육영재단분규건으로 공식석상에서 물러날때까지 근15년동안 <구국여성봉사단>, <박정희·육영수기념사업회>, <근화봉사단> 등 박근혜와 관련된 일에 빠짐없이 등장했다.(한겨레, 2007.6.18)

최태민과 그의 자녀들 거주지도 박근혜의 자택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박근혜의 삼성동집에서 500m떨어진 곳에 최태민이 살았고 정윤회·최순실부부가 소유했던 역삼동건물도 이와 멀지 않은 곳이다.(한겨레, 2012.7.17)

최태민은 1994.5.1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으나 이해 7월이 되어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중앙일보에 실린 부음기사에 <최씨는 최근까지 근혜씨의 생활비를 대주며 재산관리인 행세를 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고 적혀있다.(한겨레, 2012.7.17)

둘의 관계를 얼마나 우려했는지는 선친 박정희, 동생 박근령·박지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박정희는 20대 딸이 그에게 현혹됐다고 보고 중정을 통해 수사를 지시했다.(한겨레, 2012.7.17, 머니투데이, 2014.7.14)

1990.8 박근령(애초 근영, 1994년 서영에서 2004년 다시 개명)과 박지만은 <사기꾼 최태민을 엄벌해 최씨에게 포위당해 있는 언니 박씨를 국가원수유족의 보호차원에서 구출해 달라>고 청와대민정수석실에 탄원서를 냈고 당시 노태우는 청와대하명사건을 담당하는 <사직동팀>에 최태민내사를 지시했다고 한다.(오마이뉴스, 2012.10.23)


비선실세의 원조

박근혜의 후광을 업은 최태민은 각종 이권·인사에 개입해 막대한 재산을 불법으로 끌어모았다.

최태민은 사망전까지 육영수사망이후 퍼스트레이디역할을 한 박근혜를 등에 업고 끊임없이 사기·횡령·권력형이권개입을 저지른 것이 밝혀졌다.(오마이뉴스, 2012.10.23)

그와 관련된 수사기록에 따르면 형식상 모든 업무는 박근혜가 관장했으나 실질적으로 비공식고문격으로 전권을 위임받아 행정부·정계·재계·언론계 등 각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했다.(한겨레, 2012.7.17)

그의 비리사실과 치정관계, 이권개입 사실이 구체적으로 적시된 <최태민보고서>가 1979 중정에 의하여 작성될 정도였다.(오마이뉴스, 2012.10.29)

2007년대선후보경선 당시 최태민의 의붓아들(5번째부인의 전남편아들) 조순제는 수백억원대 재산가로 알려진 최태민의 친인척들이 박근혜와 최태민이 만나기 전까지 가난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박전대표는 최목사유족의 재산형성과정을 모를 리가 없다>고 주장했다.(오마이뉴스, 2012.10.23)

21세기민족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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