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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아카이브항쟁의 기관차〈2019.11 항쟁의기관차〉 1 대홍단전투 〈혁명군은 건재하다〉

〈2019.11 항쟁의기관차〉 1 대홍단전투 〈혁명군은 건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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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7.7 중일전쟁의 발발이후 일제는 식민지민족해방투쟁에 대한 탄압선풍을 벌였다. 강권으로 조선을 지배해 우리민족을 착취, 억압하며 명분없는 침략전쟁으로 <대동아공영권>을 실현하려는 일본군국주의자들은 공안기관들을 내세운 대대적인 파쇼탄압을 자행한다. 당시 조선국경과 만주지역일대의 조국광복회회원들이 대거 검거투옥되는 <혜산사건>이 벌어진다. 이 사건으로 739명이 검거되고 188명이 기소됐으며 권영벽·이제순·박달 등 6명은 사형판결을 받았고 박금철 등 4명은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북의 자료에 의하면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1938.11.25~12.6 몽강현 남패자에서 조선인민혁명군군정간부회의가 소집돼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국경일대의 광활 한 지역에서 군사정치활동을 더 활발히 벌일 것을 결정한다. 3개부대로 편성돼 진행된 이 활동이 북에서 말하는 항일시기의 <고난의행군>이다. 한편으로 당시 중국인항일연군부대들이 <열하원정>에서 큰 손실을 입어 지원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1939.4.3~4 장백현 북대정자에서 조선인민혁명군간부회의가 소집돼 <적극적반공격으로넘어가적들을연속타격하면서 또다시조국으로진출하며 국내진공작전을성과적으로결속한다음 백두산동북부에서대부대에의한새로운작전을전개할데대한투쟁방침>이 제시됐다. 북의 자료에 의하면 5월상순 간백산밀영에서 작전계획안이 완성됐으며 부대는 5.18 압록강을 건너 <조국땅에진출>했다. 5.20 베개봉에 도착하고 5.21 삼지연에서 휴식한 뒤 일제가 토벌대의 이동을 위해 신설한 <갑무경비도로>를 대낮에 행군하는 과감한 방식으로 신속히 무포에 도착했다. 무포에서 대홍단지구에 대한 전투과업을 점검한 뒤 5.23 대홍단전투가 벌어진다. 당시 김일성사령관은 7연대를 신개척방향으로 파견하고 경위중대와 8연대를 이끌고 신사동으로 진출했다. 이곳에서 김일성사령관은 직접 <조국의광복을앞당기기위하여반일투쟁에적극떨쳐나서자>라는 연설을 했다. 북은 <인민들은 지난겨울다얼어죽었다고하던혁명군이 어디에있다가무슨수를써서 이렇게도많이무산지구에나타났는가고하면서 감격과기쁨을금치못해하였>다고 하면서 <국내인민들에게 인민혁명군이건재하는한 조국해방의새날은반드시오고야만다는확고한신심을안겨주었으며 혁명군이다망했다고떠들던적들의선전이완전히허위라는것을 만천하에폭로>했다고 평가하고있다. 북은 <고난의행군>을 결속한 후 일제의 포위망을 돌파하며 벌어진 대홍단전투를 보천보전투 다음으로 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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