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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 항쟁의기관차〉 1 보천보전투 〈배달민족은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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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6.4 일제식민지통치에 파열구를 낸 총성이 조선땅에 울려퍼졌다. 1937.6.5 동아일보지면에는 <함남경찰부입전에의하면지난4일오후11시30분경 김일성일파와최현일파3백여명은 국경대안인혜산진에서동북으로22키로지점에있는보천보에나타나 보통학교,우편소,면사무소,소방서등을습격하고방화를하여 그중우편소와면사무소는전소되었다는바 그통에그들은1명을사상시키고도주하였다. 이급보를접한함남경찰부에서는 북촌고등과장이부원수십명을대동하고 금야11시에현장으로출동하리라하는바 아직쌍방의자세한사상자는판명되지않았다한다.>라고 쓰고있다. 동아일보는 이날 2회의 호외를 발간해 이 소식을 전했다. 김용옥교수는 <동북항일연군에서활동하던김일성이 보천보전투를비롯해항일무장투쟁에나선것이 틀림없는역사적사실임에도 이념투쟁으로얼룩진역사속에서 사실은왜곡되고가려졌다>고 지적했다. 김일성주석은 <세기와더불어>에서 보천보전투는 그 자체로는 항일시기전투중 그리 크지 않은 전투였다고 회고했다. 그럼에도 항일시기의 대표적인 전투를 추억하면 이 전투를 우선 떠올린다며 전투 그 이상이었음을 시사했다. 이는 당시 이 소식을 접한 여운형·김구가 보여준 모습을 통해서도 전해지고있다. 여운형은 소식을 듣고 크게 잔치를 벌인 뒤 보천보까지 찾아가 일제의 패배를 확인했으며 김구는 <배달민족은 살아있다>며 나라잃은 통분의 한을 터쳤다. 1931.9.18 만주사변으로 괴뢰만주국을 세운 일제는 조선과 만주지역을 통치하면서 1937.7.7 <노구교사건>을 일으켜 중일전쟁준비를 하고있던 시기였다. 일제의 입장에서 식민지조선은 전쟁물자를 공급하게 될 제1선의 후방이었고 <후방의안전>을 명목으로 압박과 긴장이 고조됐다. 식민지노예의 처지인 조선민족은 2중3중의 고통을 당해야 했다. 김일성부대는 당시 우리민족에게 해방의 신심을 안겨주고 일제에게는 본때를 보여주자는 의미로 벌이는 전투였던만큼 당시 정치선전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보천보시내에는 정치공작조에 의해 김일성주석이 작성한 조국광복회10대강령과 포고문, 그밖의 격문들이 뿌려졌다. 보천보전투이후 순사들이 밤에는 순찰을 못한다거나 산림간수들도 산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해 화전민들의 화전농사가 가능해졌다거나 1944 평양사단에 징집된 학병들이 탈출을 준비하면서 목적지를 보천보로 정하는 등 국경근처 작은마을 <보천보>는 조선민족에게 식민지배를 혁파하고 조국광복을 내다보는 서광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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