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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2 항쟁의기관차〉중국의 통일전쟁과 반제반딥스전선의 승리

<100년분투중대성과와역사적경험에대한중국공산당중앙의결의>

2021.11.11 중국공산당19기중앙위원회6차전원회의에서 <당100년분투중대성과와역사적경험에대한중국공산당중앙의결의>를 통과시켰다. <결의>에서 중국공산당의 역사는 시종일관 중국인민의 행복을 도모하고 중화민족의 부흥을 도모하는것을 초심과 사명으로 삼고 시종일관 공산주의이상과 사회주의신념으로 전국여러민족·인민을 단합인솔해 민족의 독립과 인민의 해방을 쟁취하고 나라의 부강과 인민의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꾸준히 분투해온 역사라고 평가했다. 지난 100년간의 역사적경험을 총화하는것은 신시대에 중국특색사회주의를 견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요구, 정치의식·대국의식·핵심의식·일치의식을 높이고 노정에 대한 자신감, 이론에 대한 자신감, 제도에 대한 자신감, 문화에 대한 자신감을 확고히 다지며 당중앙과 전당에서의 시진핑동지의 핵심적지위를 결연히 수호하고 당중앙의 권위와 집권적통일영도를 결연히 수호하며 전당이 보조를 맞춰 전진하도록 확보하기 위한 요구며 당의 자기혁명을 추진해 전당의 투쟁능력과 위험·도전대응능력을 높임으로써 당의 생기와 활력을 영원히 유지하고 전국여러민족·인민을 단합인솔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계속 분투하기 위한 요구라고 밝혔다. 민족문제에 대해 중국공산당은 <민족구역자치제도를확립하는사업을영도해인민의주인적지위를제도적으로보장해줬다>며 여러민족이 평등호조하는 사회주의적민족관계를 형성·발전시켰다고 언급했다.

중국통일과 관련해 <조국통일대업을역사적중임으로삼고조국통일을위해꾸준히노력해왔다>고 강조했다. 등소평주석의 <1국양제>에 따른 평화적방식의 조국통일실현노선을 짚으며 홍콩·마카오에 대한 주권행사회복을 통해 중화민족의 100년치욕을 씻었다고 평가했다. 대만문제에 대해 <평화적통일1국양제>의 기본방침을 확립해 양안쌍방이 하나의 중국이라는 원칙을 구현한 <92공동인식>에 합의하도록 추진, 양안의 협상담판을 추진해 포괄·직접·쌍방향적인 <3통>실현, <반국가분열법>제정, <대만독립>세력 단호히 억제, <2개중국>·<1개중국·1개대만>·<대만독립>조작책동좌절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대만문제를 해결하고 조국의 완전한 통일을 실현하는것은 당의 변함없는 역사적과업이자 전체중화아들딸들의 한결같은 염원이며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기 위한 필연적요구라고 강조했다. 중국공산당은 양안관계의 시대적변화를 파악하고 통일이론, 대대만방침·정책을 풍부화·발전시켜 양안관계가 정확한 방향을 따라 발전하도록 추진했다고 자평했다. 시진핑주석의 대만정책에 대해서는 일련의 중요한 이념, 중대한 정책과 주장을 제기해 신시대에 중국공산당이 대만문제를 해결하는 총체적방략을 형성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1949이후 최근까지의 대만문제해결을 위한 노력을 짚으며 2016이후 대만당국이 <대만독립>분열책동에 박차를 가하면서 평화적인 발전추세를 유지하던 양안관계가 심각한 충격을 입었다고 비판했다. <92공동인식>·<대만독립>분열행위·외부세력간섭을 단호히 반대하며 양안관계의 주도권·주동권을 확고히 장악하며 <조국의완전한통일을실현하는시기와대세는시종우리쪽에있다>고 단언했다.

 

중국통일·분열의 연대기

중국의 역사는 국력에 따라 통합과 분열이 끊이지않았고 중국본토에 대한 한족과 주변민족의 지배가 번갈아 이뤄졌다. 고고학적으로 연대를 확인할수 있는 최초의 국가는 상(商)이다. 전설에 의하면 14대째에 탕왕이 등장해 하(夏)왕조의 걸왕을 물리치고 B.C.1600경 상왕조를 개국했다고 한다. 이후 19대 반경때에 은으로 옮겨 주왕까지 273년간 왕조가 유지됐다. 상·주(周)시대이후 춘추전국시대가 열리면서 중국은 여러나라로 분열됐다. 춘추시대는 독립적성향을 띠고있던 제후국들이 독립해 계속 공방전을 벌인 시기로 약200여개에 달했던 제후국이 점차 몇개의 국가로 통합됐고 일종의 도시국가형태인 읍제국가에서 영역국가로 이동하는 과정이었다. 춘추시대를 주도했던 5개강국을 5패라고 했는데 일반적으로 제환공·진문공·초장왕·오합려·월구천을 꼽는다. 춘추시대를 거치며 혈연적봉건제·세습귀족·씨족제질서가 붕괴됐고 군현제가 등장했으며 철제농기구발달에 따라 농업생산량이 증가했고 개인농경지가 발생했다. 전국시대에 들어와 대다수 약소국이 겸병돼 소수의 강대국만 남았는데 진·초·제·한·위·조·연으로 전국7웅이라 불렸다. 진이 나머지나라들을 최종적으로 통일시킨 해는 B.C.221이다. 진은 유능한 인재를 국적에 관계없이 발탁해 내정을 공고히 했고 기마를 중심으로 강력한 무력을 갖추고있었으며 각국에 정보원을 파견하는 책략술도 능란했다. 그결과 B.C.230 한을 멸망시킨지 10년만에 전국을 통일할수 있었다.

B.C.117 한(漢)의 7대왕 무제는 한을 계속 위협하던 흉노를 정벌하고 이에 성공한 후 남방·동방으로 원정을 나섰다. B.C.112 남방원정결과 광동·광서와 베트남북부에 걸쳐 독자왕국을 형성하고있던 남월을 평정했다. 또 사천남부로 진격해 운남·서남이(중국서남쪽지역)를 평정했다. B.C.109 코리아반도북부지역으로 진출해 한사군을 설치했다. A.D.8 왕망이 왕위를 찬탈해 신(新)나라가 잠시 등장했으나 농민반란에 의해 결정적타격을 받아 23 멸망하고 후한시대가 열렸다. 후한시대 호족에 의해 토지겸병위기에 처하고 외척·환관에 의해 과중한 부역부담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자연재해에 더해 국력약화로 인한 강족·흉노·선비등 주변민족의 침략으로 삶이 완전히 파탄났다. 농민반란이 심화됐고 결국 황건의 난으로 폭발했다. 황건의 난으로 후한이 멸망한 후 위(魏)·촉(蜀)·오(吳)가 대립하는 삼국시대가 열렸다. 216 위가 건국된 후 다음해 유비가 성도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한(촉한)으로 정했다. 풍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귀주·운남방면에서 세력을 확장했으나 유비·제갈량사후 급속히 국력이 약해지며 263 위에 의해 멸망했다. 222 손권이 황무라는 독자연호를 세우며 오를 세웠다. 4대문벌에 의해 황제권이 약화되다 280 서진(西晉)에 의해 멸망했다. 서진은 위왕조에 의해 사마염이 선위를 받아 265 세운 나라다. 진무제가 된 사마염에 의해 고대봉건제가 부활되자 지방분권적경향이 가속화되더니 이후 8왕이 난을 일으켰다. 황실제왕사이에 골육상잔인 난이 일어나자 제왕들이 경쟁적으로 북방유목민의 무장병력을 사병으로 끌어들였는데 이는 이후 서진이 멸망하고 화북을 5호가 장악하며 5호

16국시대가 열리는 화근이 됐다. 서진멸망후 화북에는 한족을 포함한 6개민족이 130년간 18개국·22개정권을 건립했다. 5호16국시대에는 주변민족·한족간의 융합체제가 성립됐고 독특한 문화가 발생했다. 강남지역에는 서진을 계승한 동진의 멸망후 송(宋)·제(齊)·양(梁)·진(陳)이 잇달아 들어섰다. 420 송건국후 589 진멸망까지 170여년간 건강을 수도로 하고 화북왕조와 대립했다.

589 약400여년간의 분열을 극복하고 수(隋)에 의해 중국은 재통일됐다. 400여년동안 강남지역은 화북을 능가하는 정치·문화적중심지가 됐고 수왕조는 화북·강남 두지역을 합쳐 중국의 통일을 이뤘다. 수는 율령을 반포하고 과거제를 실시하며 내정을 공고히 다졌다. 화북·강남연결을 위해 대운하를 정비했다. 대외적으로 수가 가장 경계했던 나라·민족은 고구려와 돌궐이었다. 특히 돌궐은 유연을 멸망시키고 몽골고원에서 서투르키스탄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했다. 돌궐은 내분으로 인해 동서로 분열됐다. 수는 자신이 복속시킨 돌궐의 계민가한과 수사이에 있던 고구려를 침략하려했으나 결국 참패한다. 전쟁과정에서 무리하게 민중을 동원한 문제로 인해 국내반란이 심화돼 수말에는 각지에서 봉기한 집단이 200여개에 달했다. 그러던중 617 산서에서 자립한 이연의 군대가 수도 장안을 점령하며 618 선양의 방식으로 당이 개국된다.

755 안사의 난을 시작으로 9년간 화북지역이 전란을 겪으며 당은 분열되고 지방관인 절도사들은 분권적으로 나왔다. 율령체계를 비롯한 사회체계는 붕괴되면서 새지배방식으로의 전환을 필요로 했다. 당멸망후 송건국까지 60년간 화북중하유역중원에서 후량·후당·후진·후한·후주의 5왕조가 흥망했다. 전국적으로는 양자강중하유역을 중심으로 지방정권이 난립했는데 대표적인것이 10개였다. 이시기가 5대10국이다. 이중 후당은 투르크계통의 사타족출신이 건국했으며 후당을 멸망시킨 석경당도 사타족출신이다. 석경당은 거란의 군사원조를 받는 대신 현재 베이징(북경)부근의 16개주인 연운16주를 할양하고 매년 공납을 약속했다. 연운16주의 할양은 이후 400년간 화북에서 주변민족이 한족을 지배하는 계기가 됐다.

송은 건국후 979 북한을 멸망시키며 통일을 완수했다. 그후 5대10국으로 인해 무관이 난립했던것을 이유로 문관중심의 정치체제를 수립했다. 황제권을 안정시키고 사대부사회를 형성했으나 대외적으로 북방주변민족인 거란이 건국한 요(遼), 티베트계열의 탕구르족이 건립한 서하(西夏), 여진족의 금(金)에게 열세를 면치못해 북송·남송으로 분열된 후 결국 몽골의 원(元)에 의해 멸망했다. 몽골을 통일한 칭기스칸때부터 시작한 중국에 대한 공격은 그자손인 오고타이칸에 이르러 1234 금조를 멸망시키며 황하유역을 지배하에 두게 됐다. 오고타이칸은 러시아에서 동유럽까지 장악했다. 쿠빌라이칸에 의해 남송이 멸망하며 원의 국가기반이 중국으로 옮겨갔다. 원제국내에서 중국의 비중은 강화됐다. 화북지역에 대한 정권을 쥐고 거주민들을 직접지배했다. 몽골지상주의를 내세워 한족에 대한 차별정책을 심화시켰고 유대인·무슬림등의 색목인을 기용해 국정·재무를 관리했다. 쿠빌라이칸이후 원나라는 정치적으로 짧은 기간 황제가 계속 교체되고 지폐남발·물가급등과 같은 경제적이유로 빠르게 쇠퇴했다. 그결과 원말 농민반란이 빈번하게 발생했고 1351 백련교도의 홍건군거병이후 반란이 조직적, 대규모적으로 발전하며 원조를 멸망시켰다.

홍건군의 수장중 한명이었던 주원장은 남경을 확보하고 학자·지식인을 기용해 백련교도에서 유교로 돌아선 후 양자강유역에서 1364 오왕의 지위에 올랐다. 이후 몽고토벌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1368 남경(난징)에서 명(明)을 건국했다. 홍무제(주원장)는 원의 마지막황제를 몰아내고 북방정벌을 통해 만주를 확보했으며 북원까지 멸망시키며 1391 운남을 병합해 통일을 이룩했다. 3대황제 영락제는 5회에 걸쳐 몽골정벌에 나섰고 환관 정화의 남해원정을 통해 주변국과 군신관계를 맺어 조공을 받았다. 또 만주지역을 정비하고 안남(베트남)을 복속시켰다. 영락제이후 환관의 국정농단과 부정부패로 인한 조세수탈, 기근으로 인해 명말 농민봉기가 거듭 일어났다. 병사출신 반란군대장 이자성이 한때 신왕조를 창건했으나 주변민족왕조인 청(淸)에 의해 붕괴됐다.

청은 중국통치초반 농민군·한인의 저항에 부딪혔다. 청은 대표적인 농민반란군 이자성·장헌충군을 추격해 궤멸하고 중국본토안의 조직적저항세력을 제압하며 비조직적인 신사중심의 한인저항에 대해서는 회유책을 써서 무마했다. 청조는 한인신사의 신분보장·파격적등용과 함께 향촌·신사의 지배적질서를 위협하는 토구를 격퇴하면서 신사와 적극적으로 결합했다.

청 강희제는 삼번의 난을 제압하고 대만에서 청의 지배에 저항하고있던 정성공세력을 정벌하며 대만을 복속시켰다. 삼번의 난은 청의 중국정복에 큰 공을 세운 명의 고위관리출신 오삼계등의 삼번세력을 9년에 걸쳐 대대적으로 진압한것이다.

대만은 16세기중엽 부족연맹국가형태인 대두왕조가 있었으나 대만섬의 극히 일부지역만 지배하고있었으며 이마저도 1732 사라진다. 1624 네덜란드상인과 명군대간의 합의로 대만섬의 서남부에 상업지구가 건립됐다. 1625 네덜란드인들이 현재의 타이난(대남)시 안핑(안평)구에 통치기구를 두고 대만토지개간을 위해 주민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한족이 대만섬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의 대만섬통치는 1662 정성공에 의해 축출될때까지 38년간 이어졌다.

정성공은 <반청복명>을 내걸고 청에 저항한 지도자중 하나다. 청군과 싸움끝에 대만으로 쫓겨가 대만에 최초의 한족정권을 수립했다. 1662.6 정성공의 아들 정경이 반청유지에 따라 대륙에서의 복명운동에 가담해 삼번의 난에 적극 동조했다. 청은 여러차례 대만수복에 나섰으나 대만수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쉽게 수복하지못했다. 한편 대만은 정성공사망후부터 정성공친족들의 후계자쟁탈전으로 분열이 심각했다. 청은 정씨왕조의 수하들을 기용해 대만점령작전을 세웠고 결국 성공하며 대만을 중국영토에 복속시켰다.

강희제이후 옹정제·건륭제까지 영토확장이 활발히 이뤄졌다. 강희제때 러시아가 동진을 통해 흑룡강(헤이룽장)유역을 침범해 만주를 노리자 강희제는 러시아의 군사적거점중 하나를 공략해 승리한 후 1689 네르친스크조약을 맺으며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했다. 아르군강·고르비샤강을 러시아와의 경계선으로 삼고 외흥안령~오호츠크해이남을 청조의 영역으로 확정했다. 몽고변경지역을 복속했으며 동투르키스탄지방도 병합했다. 강희제때 복속된 티베트는 옹정·건륭연간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평정이 됐다. 청은 이지역의 청조관리의 힘을 강화해 내정·외교·군사·재정·관리임용등 주요권한을 장악했다. 한편 원래 중국서남변경에 거주하고있던 묘족을 비롯한 소수민족은 언어·풍속이 다른 점을 들어 해당민족의 추장에게 중국관명을 줘 다스리게 했는데 청은 이제도를 폐지하고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해 직접 다스렸다. 그러면서 이지역들이 중국의 직접적지배하에 들어섰다. 그결과 청의 최대판도는 오늘날 중국전체를 넘어 러시아령연해주, 몽고인민공화국에 이르렀다.

청조가 쇠퇴하자 빈번하게 반란이 일어났다. 그중 1796~1805 백련교도의 난은 무려 5개성에 걸쳐 10년가까이 진행됐으며 이를 진압하기 위해 청조는 3~4년간의 재정수입을 대부분 군비로 소모하며 국고를 탕진했다. 한편 아편전쟁·애로호사건으로 불리는 2차례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남경조약·천진조약을 체결하며 반식민지적상황에 놓이면서 청의 몰락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청은 1874 대만사건, 1884~85 청·불전쟁으로 류큐·베트남의 종주권을 잃었다. 류큐는 일영토 오키나와현으로 개편되고 베트남은 프랑스식민지가 됐다. 1894~95 청·일전쟁에서의 충격적인 패배로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했다. 그결과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고 대만을 일본에 할양했으며 러시아·프랑스·독일 3국에 조차지를 내줬다.

그후 청의 피지배계급들은 태평천국운동·의화단운동등을 통해 개혁·반외세운동을 전개했으나 지배계급의 탄압으로 패배했으며 지배계급내에서는 근대국가수립을 목적으로 양무운동·변법운동·입헌운동등이 추진됐으나 모두 실패했다.

1894 손문이 중심이 돼 청조타도를 목적으로 하와이에서 비밀결사 홍중회가 조직됐다. 손문은 다음해 홍콩에도 홍중회를 조직해 반청봉기를 계획했으나 실패해 망명해야했다. 손문은 1900 의화단운동을 전후해 거듭 제한된 지역에서의 봉기를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러던중 진보적학생·지식인중심으로 청조타도투쟁이 확산되고 일본유학생계내에서는 혁명운동기운이 싹텄다. 국내반청혁명단체 화흥회·광복회가 성립됐다. 1905 손문은 일본에서 혁명활동을 통일시키려했다. 7.30 각혁명단체대표70여명이 중국동맹회를 조직하고 <오랑캐를몰아내고중화를회복해민국을세우고지권을평균하게한다>는 강령을 채택했다. 기관지로 <민보>를 창간했는데 그발간사에서 손문은 민족·민생·민권의 3민주의를 지도이론으로 내세웠다. 중국동맹회는 여러차례 반청봉기를 조직했으나 실패했다. 중국동맹회로 혁명단체들이 통합되기는 했으나 실제 통일적으로 운영되지않았다. 여기에 봉기가 실패하면서 조직내 반손문파가 반발하는등 동맹회의 분열은 더욱 가속화됐다. 그럼에도 혁명정세는 계속 무르익었으며 민중의 반청의식도 계속 높아졌다. 1911.10 무창봉기가 성공하고 여러성들이 독립하면서 청조는 마감직전에 놓였다. 무창의 혁명군을 중심으로 수립된 호북군정부는 12.3<중화민국임시정부조직대강>을 의결·공포했고 손문이 12.29 임시대총통으로 선출됐다. 청조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청조진압군을 휘하에 둔 원세개를 기용하려했으나 원세개는 이를 거부하며 공화제옹호로 돌아섰다. 청조는 원세개에 전권을 주며 퇴위조건을 협상하게 했으며 손문은 사직서를 제출하며 원세개를 후임총통으로 지목했다. 다음해 3.10 원세개는 중화민국 2대임시대총통에 취임하며 청조는 멸망했다.

1917.10 러시아소비에트혁명이 승리하며 중국내에서도 사회주의·맑스주의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변혁적요구가 높아졌다. 한편 1919 시작된 5.4운동은 구국운동이자 계몽운동이었다. 이런 조건들로 중국내 진보세력, 노동자·농민·학생의 단결과 변혁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5.4운동당시 활동했던 모택동등이 중심이 돼 1921 중국공산당이 결성됐다. 한편 1919 손문이 이끌던 비밀조직이었던 중화혁명당이 공개정당인 중국국민당으로 개칭됐다. 두당은 1924 국공합작을 단행했다. 국민당은 항일과 반공을 내세우며 기회주의적으로 움직이면서 공산당탄압과 혁명근거지공격을 강화했다. 공산당은 초반 좌·우경적오류를 총화하면서 국민당에 대항해 혁명근거지를 강화하고 농민을 조직하며 세력을 확대했다.

중국공산당은 1931 홍1방면군이 3차례에 걸친 <포위토벌>전쟁에서 승리한 후 강서남부·복건서부혁명근거지를 합쳐 21개현성·인구250만명을 포괄하는 중앙혁명근거지를 만들었다. 그해 가을 노농민주정권을 수립했고 성급정권기관을 건립했다.

당시 좌경모험주의의 후과로 중국공산당은 실패를 거듭했다. 마침내 1934.10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중앙홍군8만여명은 <북상항일(北上抗日)>의 기치를 들고 중앙소비에트구역을 떠나 전략적이동, <장정(長征)>을 단행했다. 1935.1.15 중국공산당중앙정치국확대회의 준의회의(遵義会議)를 통해 군사·조직면에서 모택동·주은래·왕가상으로 구성된 지도부를 조직하고 군사활동을 책임졌다. 이회의는 모택동이 영도권을 확립한 회의로 평가된다. <장정>을 통해 중국혁명의 중심은 남방에서 북방으로 옮겨졌고 중국혁명운동이 역사적전환기를 맞이했다. 1935 일제가 <화북사변>을 일으키며 침략을 확대하자 중국공산당은 적후항일근거지를 개척하며 맹렬히 맞서 싸웠다. 1940말에 이르러 인민군대는 50만명으로 늘어났고 화북·화중·화남에 16개근거지를 세웠다.

항일전쟁과정에서 민중의 전폭적지지를 얻은 공산당과 달리 민심을 잃은 국민당은 미국등 외세에 의지하며 권력을 장악하려했다. 1945.8부터 정치협상을 시작한 공산당·국민당은 10.10 <정부와중국공산당대표회람요록>(10.10협정)을 체결했다. 공산당측은 평화·민주·단결·통일을 토대로 독립·자유·부강을 실현한 신중국을 건설하자는 협상결과에 따라 정치협상회의를 비롯한 평화적방법을 모색했으나 국민당측은 회의를 결렬시키며 공산당을 배척하고 내전방침을 고집했다. 1946.6 국민당군대22만명이 중원해방구를 공격하며 전면적내전이 발발했다.

1946.7.20 모택동은 <장개석은비록미국의원조를받고있지만민심이따라주지않아사기가높지않고재정면에서어려움도겪고있다.우리에게는비록외국의원조는없지만민심이쏠리고있어사기가높고재정면에서도방법이있다.그렇기때문에우리는장개석과싸워이길수있다.>고 독려했다. 인민해방군은 1946.7~10 국민당정규군22개사단과 비정규군등 총30만명을, 1946.11~1947.2까지 41만명을 궤멸시켰다. 국민당정부의 실패한 경제·민생정책에 분노한 농민·민중들은 인민해방군을 지지했다. 1948.4 중국공산당중앙위는 <민주주의연합정부창립>을 호소했고 여러민주당파, 여러계층의 대표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1948.6 인민해방군총병력은 280만명으로 성장했고 무기장비가 크게 개선됐으며 전국의 해방구는 전국면적의 24.5%에 달했고 전국인구의 37%를 차지했다. 중국공산당은 3대전투라 불리는 지난전투·랴오선전투·핑진전투에서 승리하며 154만국민당군대를 섬멸하고 국민당반동통치의 지탱점인 군사력을 파괴했다. 국민당반동통치가 완전히 붕괴된 조건에서 1949.4.1 주은래를 중심으로 한 중국공산당대표와 국민당정부대표가 베이핑(베이징·북경)에서 평화담판을 진행했다. 중국공산당은 1949.10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했다. 인민해방군은 10월 광주, 11월 국민당정부의 임시수도인 중경을 함락했다. 12.10 장개석은 성도에서 대만으로 탈출했고 12.27 인민해방군이 성도에 입성하며 대륙에서 중국본토전체를 수복했다.

 

민족문제해결을 위한 법과 정책

1938.10 모택동은 중국공산당6기6중전회(6기중앙위원회6차전체회의)에서 몽골족·회족·장족·묘족·이족·판족은 한족과 평등한 권리가 있고 공통된 항일원칙아래 자기관리와 자기사무의 권한이 있으며 한족과 연합해 통일된 국가를 건설해야한다는 민족정책을 발표했다.

1941.5 중국공산당샨시·간쑤·닝샤중앙정치국이 제출하고 중국공산당정치국이 비준한 <샨시·간쑤·닝샤의시정강령>17조는 <민족평등원칙에따라몽골족과회족의한족과의정치,경제,문화에서의평등권리를실행하고몽골족과회족의자치구를건립하며,두민족의종교신앙화풍속습관을존중한다>고 규정했다. 샨시·간쑤·닝샤지역은 1941이후 5개회족자치향·1개몽골족자치구를 건립했다. 이는 중국공산당의 혁명근거지에 민족구역자치제도실행의 중요한 시도였다. 중국공산당중앙은 1946.2 평화적건국의 강령요구에 따라 민족평등자치를 요구하며 독립자결구호는 제안해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1946.4.23 샨시·간쑤·닝샤의 3회참의회1차대회에서 <샨시·간쑤·닝샤의헌법원칙>이 통과됐다. 원칙에서는 해당지역의 민중은 민족을 구별하지않고 모두 평등하며 민중은 정치상 각항의 자유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정부의 안내와 물질적도움을 받아야한다고 규정했다. 더해 해당지역소수민족은 민족자치정권을 조직하고 성의 헌법에 저촉되지않는 원칙하에 자치법규의 체결을 얻는다고 규정했다.

일본패망이후 중국공산당은 국민당정부의 내몽골봉건귀족통치복원책동을 분쇄하기 위해 내몽골자치운동지도를 강화했다. 1945.10 공산당중앙서기처는 <중공중앙의내몽골사업방침이주는진차지중앙국의지시>를 통해 내몽골의 기본방침으로 구역자치실행을 명시했으며 1947.4~5 내몽골인민대표회의에서 정식으로 내몽골의 자치정부를 성립했다.

중화인민공화국건국후 민족구역자치의 시행에 대해서는 1949 발표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공동강령>, 1954 <중화인민공화국헌법>을 통해 규정했다. 주변민족에 대한 정책에서 중국은 초반 소련의 연방제에 대해 검토했는데 소련의 소수민족은 전인구의 47%를 차지하고있으나 중국은 전인구의 6%를 차지하고있고 소련과 달리 중국은 민족간 분리를 거치지않은 조건에서 통일된 국가내 민족구역자치를 시행하는것이 민족평등원칙실현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1949.9.7 <인민정협에관한몇가지문제>보고에서 주은래는 제국주의자들이 티베트·대만·신장지역을 분리하려하고있다는 점을 짚으며 <우리는각민족들이그들의선동에넘어가지않기를바란다.이런이유로우리국가의정식명칭은중화연방이아닌중화인민공화국으로정했다.>며 <연방국가는아니지만민족구역자치와민족자치의권력행사를주장하고있다>고 강조했다.

1949.9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1차전체회의에서 <공동강령>을 통과하며 민족정책이 법적형식으로 인정됐고 민족법입안의 기초가 됐다. <공동강령>을 통해 모든민족의 평등·단결, 민주자치시행·민족자치기관설립·지방공안부대창설권리·고유언어의발전·풍속과종교의자유및개혁권리인정·중앙정부의각소수민족에정치문화교육지원등이 규정됐다. 이내용은 1954 헌법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1950~60 중국은 소수민족거주지에 대해 전면적으로 민족구역자치를 시행했다. 1955.10 신장위구르자치구, 1958.3 광시장족자치구, 10월 닝샤회족자치구, 1965.9 티베트자치구가 창립됐다.

1956~57 모택동은 중대담화를 통해 한족·소수민족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국가통일·인민단결·각민족단결이 우리승리의 기본적보장이라고 단언했다. 이어 <중국내소수민족은총인구수의6%도안되지만전국토의50%~60%를차지하고있다.그러므로한족과소수민족의좋은관계유지는중대사항이며대한족주의를극복하는것이민족문제의관건>이라고 밝혔다.

문화대혁명기간동안 민족구역자치제도에 큰 위기가 닥치고 소수민족간부·민중들이 박해를 받으며 민족정책에 큰 타격을 입었다. 1978말 중국공산당은 11기3중전회에서 경제건설중심의 지도방침을 제기하는 동시에 민족정책도 새롭게 발전시켰다. 1981.4 11기6중전회에서 <건국이래당의역사적문제에대한결의>를 통과해 <민족구역자치를시행하며민족구역자치에법률제정을강화해각소수민족지역이자신들의상황에맞게당과국가정권의자주권시행에대해보장해야한다>고 결정했다. 1984.5 <민족구역자치법>을 통해 중국의 사회주의민족관계를 더 법률화·제도화했다. 법안시행의 결과 소수민족지방의 자치권리, 사회주의민족관계공고화, 민족자치지역의 개혁·발전·안정, 국가통일등의 측면에서 중요역할을 했다. 2001.2 9차전국인민대표회의상무위20차회의에서 민족지역정치·경제·문화건설에 대한 정세·요구를 반영해 <민족구역자치법>을 발표했다.

2021.8 시진핑중국국가주석은 7년만에 중앙민족공작회의를 개최했다. 시진핑은 회의에서 민족분야의 위험요소를 단호히 방지하고 민족적요인과 관련된 사상문제를 적극적이고 적절하게 처리하며 국제반테러협력을 강화해야한다고 언급했다. 민족사업강화를 위해 중국공산당의사상관철·민족지역의사회주의현대화국가건설가속화·민족평등·중화민족단결기치·민족사무의관리체계및관리능력현대화수준으로향상등을 추진해야한다고 밝혔다. 시진핑은 <중화민족공동체의식을굳건히지키며중국특색으로민족문제를해결하는길을확고부동하게추진해중화민족이정신적터전을공유할수있도록해야>·<당과여러민족인민이사회주의현대화강국실현이라는목표를달성하기위해단합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시진핑은 회의가 있기 한달전에 집권후 처음으로 티베트자치구를 방문했으며 권력4위의 왕양주석도 이곳을 찾으며 미국중심의 외세개입을 배격하고 민족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확인했다.

 

중국내부문제와 제국주의세력의 분열·이간책동

중국·대만양안관계가 전쟁으로 치닫고있다. 2022.1.23~24 중군용기가 2일연속 대만ADIZ(방공식별구역)에 진입했다. 23일에는 Y-9통신대항기2대, J-10전투기10대, J-16전투기24대, Y-8대잠기2대, H-6폭격기1대등 총39대, 24일에는 J-16전투기8대, H-6폭격기2대, J-16D전자전기2대, Y-8대잠기1대등 총13대의 중국군용기가 대만남서부ADIZ에 진입했다. 중국군전문가 린잉유대만중산대학교수는 미·일합동군사연습에 대응한 전개로 분석했다. 1.17부터 6일간 일오키나와남쪽해역에서 미해군 항공모함 칼빈슨함·링컨함, 강습상륙함 아메리카함·에식스함, 알레이버크급구축함 스프루언스함, 미사일순양함 모바일베이함과 일해상자위대소속 항모급호위함 휴가등이 동원된 대규모미·일합동전쟁연습이 전개됐다.

시대별양안관계를 보면 현재 전쟁위기상황까지 치닫게 된 원인이 통일을 거부하는 대만친미정부와 미국의 분열·이간책동에 있다는것이 확인된다. 양안관계는 1949~79 군사충돌기, 중·미수교등의 관계안정기(~1998), 천수이볜시대적대기(~2008), 양안회담등관계개선기(~2016), 차이잉원시기관계악화기(~현재)로 나눌수 있다.

장개석국민당정부가 1949 대만에 <정부>를 수립한 후 중국·대만은 38년간 교류가 없었다. 당시 대만은 불접촉·불담판·불타협의 3불정책을 고수했다. 양안관계는 1978 중국 개혁개방노선에 따른 양안관계에서의 교류·협력이 모색되며 변화했다. 중국은 평화통일노선으로 변경하고 3통(통상·통항·통우)·4류(경제·문화·체육·과학기술교류), 1981.9 평화통일9개방안, 1982.12 1국양제에 의한 통일방식을 제의했다. 대만은 1985 <대륙교역3원칙>을 마련해 중국과의 간접무역을 인정했고 1987 인적교류를 하며 통일로 나아갔다. 1990.11 대만에서 민간기구 해협교류기금회를 조직하고 중국도 해협양안관계협회를 조직했다. 민간기구지만 사실상 정부기구로서 역할을 한 이기구들은 1992 <하나의중국원칙>을 핵심으로 하는 <92공식>을 발표했다. 중국·대만관계가 다시 냉각되기 시작한것은 1999 리덩후이대만총통이 <양국론>을 발표한데 이어 2000 천수이볜대만총통이 <대만해협을사이에두고한쪽이각기한나라씩존재한다>는 <1변1국론>을 주장하면서다. 민진당은 국민당이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추구한것과 달리 <대만독립>을 핵심정책으로 내세우고있다. 천수이볜은 최초의 민진당출신총통이다.

2005.3 중국은 <반분열국가법>을 제정해 대만에 대한 비평화적수단의 사용가능성을 공식화했다. 2008 국민당출신 마잉주대만총통이 <3통>을 실시하고 2010 ECFA(양안자유무역위한경제협력기본협정), 2014.3 양안서비스무역협정을 비준하며 양안관계가 경제적으로 더욱 밀착됐다. 마잉주는 2015 싱가포르에서 시진핑주석과 회담을 하며 관계개선을 위해 노력했으나 2016 선거에서 민진당 차이잉원이 승리하며 반중국노선의 대만정권이 등장했다.

차이잉원이 미국과 유착해 반중국노선을 걷고있다는것은 군사·정치·경제 모든 분야에서 확인된다. 2021.11 미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조바이든<정부>가 대만에 있는 미군숫자를 조용히 늘리고있다고 보도했다. 9월 대만주둔미군숫자는 전년동원대비 2배가량 증가해 총39명의 미군이 대만에 들어와 군사활동을 벌이고있다. 미국은 1979 중국과의 수교후 대만에 있던 3만여명의 병력을 철수했으나 대만관계법을 제정해 대만에 무기·군사지원을 감행하고있다. 미국중심의 <민주주의정상회의>에 참가하는등 대만·미국유착관계가 심화되고있다. 미국은 2021.10 유엔회원국에 <대만의유엔체제참여>지지를 촉구하며 <하나의중국>정책에 계속 도전했다. 차이잉원정부는 중국과의 경제관계를 미국중심으로 돌리기 위해 미·대만FTA체결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2020.12 락토파민돼지고기의 수입을 허용하는 행정명령을 발표하기도 했다.

미국의 양안관계에 대한 이간·분열책동은 군사·경제적이유가 크다. 대만해협은 지리적으로 동북아·동남아해양을 연결하는 해상운송·군사안보의 전략적거점이고 중국의 동중국해·남중국해를 연결하고 서태평양과도 통하는 동북아해양의 중심요지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대만이 자국영토기도 하지만 미국의 중국봉쇄를 뚫고 태평양으로 진출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이는 반대로 미국에게 대만은 중국을 봉쇄하고 역내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필요하다는것을 의미한다. 주은래가 장개석의 밀사 송의산(쑹이산)을 만난 자리에서 <미국은대만을하와이처럼만들생각>이라고 말한 이유다. 경제적으로도 가령 대만의 반도체기업TSMC는 파운드리(위탁생산전문업체)분야에서 1위를 차지하고있다. 바이든<정부>는 삼성전자·인텔과 함께 TSMC를 불러 반도체등 첨단전략물자를 미국내에서 생산하라고 강요했다. 미국은 <중국의대만침공을저지할엎어진둥지전략>보고서를 통해 <TSMC의자체파괴>·<대만지도층들이자발적으로TSMC를제거하는것이포인트>라고 망언했다. 중국은 <대만독립은죽음의길>이라고 경고하는 한편 중국통일실현의 시기에 대세는 중국에 있다고 단언하고있다.

2021.12 중국국무원은 <1국양제하홍콩의민주발전>백서를 발표했다. 중국당국은 백서를 통해 반중·홍콩난동세력이 특구통치권갈취와 <색깔혁명>을 목적으로 1국양제원칙에 도전하고 특구헌법제도질서에 맞설뿐아니라 홍콩법치를 파괴하고 국가안보를 위협하며 홍콩의 번영과 안정을 해하는 각종행위를 일삼았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반중·홍콩난동세력과 그배후인 외부적대세력이 홍콩특별행정구의 민주주의발전을 저해하는 화근이라고 규탄했다. 또 중국공산당과 중앙정부는 적절한 시대적판단으로 헌법·기본법에 따른 특별행정구에 대한 전면통치권행사, 헌법·기본법시행관련제도메커니즘개선을 위한 중대한 정책결정을 내리며 홍콩특별행정구의 국가안보수호를 위한 건전한 법률제도와 집행메커니즘을 수립하고 홍콩특별행정구의 선거제도를 개선해 <애국자홍콩통치>원칙을 고수해왔다고 강조했다.

중국·홍콩갈등과 홍콩사태는 다분히 미국중심의 외세개입에 의해 촉발된것이다. 2021.12 파이브아이즈(Five Eyes)·G7외무장관, 유럽연합외교·안보정책고위대표는 홍콩특구7회입법회선거관련 규탄성명을 내며 내정간섭을 했다. 중외교부는 <홍콩특구7회입법회선거는새선거제도를이행하는성공적인실천이자홍콩의실제상황에부합하는홍콩특색민주제도발전의중요한도약>이라며 <홍콩이중국에반환된지24년이지난현실을직시하고국제법과국제관계기본준칙을준수하며어떤형태로든홍콩사무에개입하는것과중국내정에간섭하는것을즉각중단>을 촉구했다. 2019 발발한 홍콩의 송환법반대시위의 배후에도 외세가 있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있다. 홍콩시위관련단체중 일부는 미CIA(중앙정보부)저강도조직인 NED(전미민주주의기금)로부터 상당한 자금을 지원받았다. NED의 4개주요지부중 SC(연대센터)·NDI(국립민주연구원)가 홍콩에서 활동하고있으며 특히 NDI는 1997부터 홍콩에서 활동하며 NED기금지원을 확고히 유지하고있었다. 그중 HKHRM(홍콩인권모니터)은 1995~2013 NED로부터 190만달러이상의 자금을 지원받았다. 그외 홍콩기자협회·시민당·노동당·홍콩민주당과도 연계됐다. 홍콩언론에서 시위주동자로 지목한 <시민인권전선>연합체는 NED가 자금지원한 조직들의 상당수가 회원으로 등록돼있다. 홍콩시위에 미국중심의 외세가 개입해있다는것은 시위에 성조기가 등장했고 2014 <우산혁명>주인공 조슈아웡과 야당지도부 네이션로가 2019.8.6 미국영사와 만난 사실로도 확인됐다.

1997 반환되기전 1940년대까지 홍콩은 남중국의 관문으로서 영국·외세의 중국에 대한 경제적약탈기지였으며 19세기중엽이후 오랜 기간 아시아금융센터역할을 수행했다. 1950년대이후 산업화에 들어가며 노동집약적사업을 거쳐 물류·금융이 빠르게 발전했다.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으로 홍콩인접지역들이 경제특구로 지정됐고 홍콩기업가들도 이시기 노동집약적산업의 경쟁력이 약화됨에 따라 새활로를 찾고있던터라 중국·홍콩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며 전점후창(前店後廠 홍콩기획·판매 중국제조)의 분업이 이뤄졌다. 정치적으로는 1982부터 홍콩반환협상이 시작됐고 이시기 중국은 홍콩경제체계를 최소 50년간 인정하는데 합의했다. 1996 중국·홍콩무역액은 1984대비 10배이상 증가했고 1990년대 들어 금융에서의 중국·홍콩협력이 시작됐다. 2004 발효된 중·홍콩CEPA로 273개품목의 관세가 철폐됐고 홍콩기업의 금융·법률·의료·경영컨설팅17개서비스분야에 대해 폭넓게 개방할것을 합의했다. 상품무역은 2006.1.1 모든 품목의 관세가 철폐됐고 서비스무역의 경우 중국은 홍콩기업에 WTO 160개분야중 153개분야를 개방했다.

2019 홍콩사태로 인해 홍콩의 금융허브로서의 위상이 훼손될것이라는 우려와는 달리 현재 중국선강퉁(深港通 선전·홍콩증시간교차거래)은 출범5년만에 연간90% 넘게 상승하고있으며 누적42조위안에 육박하는 거래액을 달성했다. 중국당국은 <홍콩특별행정구는혼란을잠재우고부흥의새로운단계로나아가고있다>·<1국양제의홍콩실천도반드시큰성공을거둘것>이라 자신하고있다.

제국주의배후하에 진행된 <색깔혁명>처럼 홍콩사태가 조작된것과 같은 위험이 상존하고있는 또다른 지역은 신장이다. 최근 카자흐스탄에서 발생한 유혈사태·반정부폭동을 러시아중심의 CSTO(집단안보조약기구)가 나서서 진압했다. 중국중심의 SCO(상하이협력기구)산하대테러기구도 <지원에나설준비가돼있다>고 밝혔다. 중국·러시아는 카자흐스탄사태를 제국주의외세에 의한 <색깔혁명>과 같은 배경이라고 판단하고있다. 이는 시진핑의 <외부세력이카자흐의동요를조장하고<색깔혁명>을책동하는것을결연히반대하며중국·카자흐의우호를파괴하고양국협력을방해하려는기도에결연히반대한다>는 언명으로도 확인된다. 특히 중국의 경우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를 관통하는 1대1로(一带一路)사업의 핵심지역이며 1700km에 이르는 국경을 맞대고있으며 신장자치구로 혼란이 번질 가능성이 높기에 더욱 경계하고있다.

신장위구르자치구는 카자흐스탄과 마찬가지로 돌궐(투르크)에 그민족적뿌리가 있다. 1759 청나라 건륭제때 중국영토로 편입됐다. 1944 중국본토가 일제에 의해 침공받자 일부세력이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을 세웠으나 1949 다시 중국에 합병됐고 1955 자치구가 세워졌다. 이후 1997 대규모폭동이 발생해 인명피해가 막심했으며 2013 베이징 톈안먼(천안문)광장에서 위구르차량돌진사고가 발생했으며 2014에는 중국 운남성쿤밍(昆明)역테러사건이 터졌다.

신장위구르분리주의단체의 배후에 제국주의세력이 있다는것은 여러모로 밝혀졌다. 캐나다매체 글로벌리서치는 미국·나토·터키등이 IS궤멸을 위해 위구르족수천명을 테러조직에 잠입시켰다고 폭로했다. 레바논언론<볼테르네트워크>도 <IS와의전쟁>임무를 수행한 위구르족병사1만8000명이 2013부터 신장에 돌아가 여러형태의 테러에 참여하고있다, 중국을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려는 나토의 비밀계획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2021.9 영국에서 <위구르특별법정>2차청문회가 열렸다. 법정은 영국에서 설립된 <민간단체>며 자금은 <세계위구르회의>에서 나왔다. 신장위구르분리주의단체<세계위구르회의>는 대표적인 미정부산하민간기구<휴먼라이츠워치>와 결탁해있으며 미정부기관 <RFA(자유아시아방송)>와 NED의 지원을 받으며 활동하고있다. <세계위구르회의>는 테러조직<ETIM(동투르키스탄이슬람운동)>과 결탁해 신장에서 테러·분열활동을 기획했다.

중당국은 2021.8 <신장과홍콩사무는중국내정이므로당신들이중국내부사무에대해이래라저래라하면서헛소문을내고먹칠하는것은국제관계기본준칙을엄중히위반하고국가주권평등원칙을엄중히훼손한것>이라고 규탄했다. 그러면서 신장위구르족의 인구·기대수명이 배로 증가하고 주민소득·교육수준이 향상됐다고 언급하며 <집단학살>을 운운한 미국의 침략성을 규탄했다. 한편 바이든<정부>는 지난해 12월 <위구르족강제노동금지법>에 서명하고 베이징올림픽보이콧을 선언하며 신장위구르인권소동에 열을 올리고있다.

 

날로 강화되는 북··러전략적협동관계

2022.1.20 미국은 북에 대한 추가제재를 추진했으나 유엔안보리비공개회의전에 중국·러시아가 사실상 거부하며 미국측제안채택이 연기됐다. 미국의 대북추가제재는 북의 극초음속미사일발사시험·철도기동미사일연대검열사격훈련·전술유도탄검수사격시험등 일련의 자위적국방력강화를 위한 노력에 제재를 가하는 명백한 내정간섭이자 북·미관계를 <강대강>으로 치닫게 하는 침략책동이다. 류샤오밍중국코리아반도사무특별대표가 20일

<대북제재만으로문제를해결할수없고대립과긴장만심화시킬것이라는점이증명됐다>고 언급한 이유다. 대북추가제재안보리결의가 중·러에 의해 무산된것은 북·중·러사이의 전략적협동관계가 발현된것이라고 볼수 있다.

3국간의 협동관계는 역사적이다. 북·중관계는 역사적으로 항일무장투쟁을 함께 전개한 혈맹관계다. 북·중·러는 1940 하바롭스크회의를 계기로 조선·중국·소련의 혁명무장력사이의 단결·협조를 실현했으며 국제반파쇼통일전선의 승리를 앞당기기 위한 전쟁을 수행했다.

1945이후 북은 신생국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을 전우이자 혈맹으로 여기며 중국동북해방전쟁을 최고수준으로 지원했다. 김일성주석이 파견한 조선인민군군정간부들에 의해 조직된 조선인부대가 초기 근거지창설·근거지보위임무를 수행하며 중국국민당군에 맞서 싸웠으며 김일성주석이 직접 나서서 조선인부대의 중국동북지방해방투쟁을 지도했다. 중국인민해방군군복을 만들기 위해 황해도 면직물을 총동원했으며 10만여정의 무기·탄약등을 넘겨주기도 했다. 또 유격부대가 북의 영토를 거쳐 동부만주로 들어갈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코리아전당시 중국군의 참전은 순망치한의 책략적측면도 있지만 북의 동북해방투쟁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다.

1960년대부터 본격화된 소련의 수정주의노선과 중국의 좌·우경적오류와 중·소양국의 지배주의문제로 인한 여러우여곡절에도 북은 자주성을 견지하며 중·러관계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김일성주석·김정일국방위원장은 각각 40회·8회 방중을 하며 중국과의 관계에 힘썼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조중친선은두나라인민의역사적이며전략적인선택>이라고 언급했으며 마지막순방길에 러시아·중국을 두루 방문하며 3국간의 우호를 다졌다. 김정은위원장은 2018 3회, 2019.1 총4번 중국방문을 했으며 2019.6 시진핑이 방북했다. 북은 시진핑방북당시 <불패의사회주의>·<공산당이없으면새중국도없다>는 대집단체조·예술공연을 통해 중국공산당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표명했다. 시진핑은 방북직후 2019.11 홍콩국가안전법을 제정하며 전격적으로 홍콩사태를 수습했다.

북은 김정은위원장·시진핑주석의 여러차례상봉에 대해 <반제자주,사회주의를위한공동의투쟁에서뜻과정으로맺어진조중친선의불변성,불패성을온세계에과시>·<새로운활력기에들어선조중두나라사이의친선관계를더욱공고히하는데이바지>했다며 <조중친선관계를훌륭히계승하고새로운높이에서대를이어발전시켜나가는것은우리당과정부의확고부동한의지>라고 강조하고있다.

한편 2021.5 미상원군사위에서 열린 폴러캐머라주남미사령관지명자에 대한 인준청문회에서 조시홀리미상원의원은 중국이 대만침략을 시도한다면 북에 <기회의창>이 될수도 있다고 언급했다. 실제 미국은 대만해협사태발생시 주남미군투입을 기정사실화하고있는데 이를 저지할 무력을 북이 제공할것으로 전망하고있다.

중·러간의 전략적관계도 나날이 공고해지고있다. 중·러관계는 미제침략세력의 두나라에 대한 적대정책심화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으로 강화됐다. 소련의 수정주의적변질과 붕괴에 따라 소원했던 관계를 극복하고 1996 전략적동반자관계를 선언했고 2000년대 양국정상이 각각 방중·방러하며 군사·정치적협력관계를 강화했다. 2005.7에는 SCO정상회의에서 중앙아시아에서의 미군철군과 중앙아시아에 대한 외세개입을 배격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최근년에 중·러합동군사훈련이 강화되면서 2021.8 서부연합-2021합동군사훈련, 10.14 해상연합-2021합동군사훈련을 전개했다. 특히 중국의 청동협(칭퉁샤)훈련기지를 러시아군에 공개하며 중·러의 신뢰관계가 어느정도인지를 드러냈다.

최근 카자흐스탄에서의 유혈사태진압과정과 미국의 대북추가제재에서 중·러가 한목소리를 낸것은 제국주의세력의 외세개입·분열책동과 반제자주세력에 대한 침략책동을 저지하는데 한몸으로 움직인다는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블라지미르푸틴러시아대통령은 미국·제국주의연합세력의 베이징동계올림픽외교적보이콧에 맞서 <스포츠와올림픽운동의정치화시도를용납할수없다>·<내년2월에직접만날수있기를기대한다.앞서동의한대로동계올림픽개막식에참석하기전에회담을할것>이라며 중국을 강력히 지지했다.

 

이란·중동과의 군사·경제적협력강화

중국의 이란등 중동국가들과의 협력관계도 날로 강화되고있다. 중국이 이란을 비롯한 중동지역에 대해 공들이는 이유중 하나는 미국중심의 제재·고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다. 중국 왕이외교부장은 2021.3.24~30 중동을 순방하며 미국과의 무역전쟁, 신장위구르·홍콩·대만을 둘러싼 인권소동·제재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행보에 나섰다. 왕이는 순방에서 <핵심이익>수호를 내세웠는데 이는 영토·주권·체제를 의미한다. 사우디아라비아외무부장관과의 회담에서 <사우디아라비아가신장·홍콩·대만등중국의핵심이익과중대관심사에서중국을이해하고지지하고있다>고 강조하며 사우디와 무역·투자·5G·인공지능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했다. 아랍에미리트·터키·오만·바레인과의 순방에서도 <핵심이익>·1대1로가 강조됐다.

왕이의 중동방문에서 가장 주목된 나라는 이란이다. 중국은 이란에 25년간 에너지·경제·안보분야에서 협력한다는 내용의 협정에 서명하며 4000억달러를 금융·에너지·항만·철도·5G등의 분야에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중국은 이란에 원유·가스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기로 확약했다. 이번 협정을 통해 중국은 이란을 포괄·전략적동반자관계로 격상시키며 1대1로의 공식파트너로 참여시키기로 결정했다. 4000억달러중 2800억달러는 이란유전개발에 투자되며 1200억달러는 철도·항만통신망구축에 사용된다. 협정에 대해 전이란주재중국대사 화리밍은 1대1로계획아래 경제·문화·안보·군사분야까지 폭넓은 범위의 여러프로젝트가 구성돼있다고 언급했다. 이어 중국은 1979 미국과 수교한 이래 미국을 자극하지않기 위해 이란과의 거래에 신중을 기해왔지만 중·미관계가 악화된 후 이란과의 협정을 체결한것은 중동정책의 변화를 뜻한다고 말했다.

중국·이란간 협정발표후 이란은 인도와의 차바하르항구(이란소재)개발중단을 선언했다. 2000초부터 차바하르항구를 유라시아대륙국가들의 인도양무역항으로 연결하는 남북무역로구축계획을 갖고 중국과 인도태평양세력권경쟁을 벌이던 인도로선 타격을 받은것이다. 2022.1.14 아미르압둘라히안이란외무장관은 왕이외교부장과의 회담에서 <하나의중국>원칙·<핵심이익>보호·베이징올림픽개최에 대해 확고한 지지를 표명했으며 1대1로사업에 대해서는 <높이평가하며적극적으로참여할것>이라고 강조했다.

같은 시기 사우디·쿠웨이트·오만·바레인외무장관, GCC(걸프협력회의)사무총장이 대거 방중했다. GCC회원국관료들은 중국과 무역·안보부문협력증진을 위한 회담을 연달아 열었으며 중외교부가 밝혔듯이 FTA협상을 재개하기로 했다. 사우디를 비롯한 일부국가들은 미국의 중국에 대한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하나의중국원칙>을 확고히 지지하며 중국과 더욱 밀착했다.

한편 중국·러시아중심의 SCO에서 옵서버자격이었던 이란은 2021.9 정식회원국으로 승인됐다. SCO정상회의는 미국·영국·호주신안보동맹 오커스가 성립된 직후 열려 더욱 주목됐다.

북·중·러·이란을 비롯한 반제자주세력의 반제반딥스전선은 계속 강화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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