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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3 항쟁의기관차〉 프랑스중앙은행의 곡절

루이15세의 재무담당관(Controller General of Finances)에 스코틀랜드출신의 로가 임명됐다. 로는 독점권을 가진 중앙은행을 도입해 국가채무를 해결할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1716 방크제네랄프리베(Banque Générale Privée)를 설 립하고 지폐를 발행했다. 지폐는 미시시피회사의 주식을 담보로 했고 미시시피주가의 거품이 꺼지자 지폐는 휴지가 됐다. 프랑스 루이16세시기 미국독립전쟁개입등으로 재정난에 처하자 재무장관 네케르는 국채발행보다 세금을 늘리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를 위해 3부회를 소집했으나 이는 혁명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프랑스혁명시기 발행된 토지채권<아시냐(Assignat)>가 불태환지폐형태로 남발돼 경제적혼란을 야기했다. 프랑스혁명의 공안위원회정부는 경제통제를 강화해 인플레를 억제했으나 혁명정부가 무너진 이후 아시냐는 폭락했다. 결국 아시냐의 신용회복불가능으로 유통이 금지됐다. 프랑스정권을 쥐게 된 나폴레옹도 전쟁을 위해서는 자금마련이 절실했고 결국 당장 자금을 조달할 방법으로 지폐발행을 추진했다.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기관으로 했으며 잉글랜드은행을 본떠 민간자본을 출자금으로 1800 프랑스은행(Banque de France)을 설립했다. 나폴레옹 자신도 이은행의 출자자중 한사람이었다. 출자금이 다 마련되지못했지만 은행은 개설됐고 지폐를 발행했다. 이은행의 지폐발행독점권은 1803부터 이뤄졌으나 15년의 기한을 두고 파리시내에서만 통용됐다. 나폴레옹퇴위이후 부르봉왕조에서도 중앙은행의 독점권은 계속 연장돼 1848에는 전국적으로 영향력을 가지게 됐다. 프랑스은행은 1865 금본위제로 하는 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스위스의 라틴통화동맹프랑을 도입하는데 주도적역할을 했다. 1차대전때는 전시지출을 지원하기 위해 단기국채를 판매했고 전쟁발발이후 금본위제를 포기하고 1919까지 약420억프랑의 부채를 유발했다. 2차세계대전을 앞둔 시점에서 다시 통화가치가 하락했다. 프랑스의 중앙은행은 1945 은행국유화법에 의해 국영은행화됐다. 미테랑사회당정부는 집권초기 5개대기업과 36개은행·금융회사를 국유화했으나 시락총리가 29개국영기업을 사영화하는것에는 개입하지않았다. 이때 1946 드골에 의해 국유화됐던 은행 소시에테제네할은 일반공모·종업원지주제·안정주주세도입등을 통해 사영화됐다. 1993 우파정부의 집권과 유럽경제통합의 마스트리히트조약에서 GDP대비 재정적자비중의 기준을 3%로 제시한데 맞추고자 사영화를 적극 고려했으며 이후 전반적으로 사영화됐다. 프랑스중앙은행은 1999 유럽중앙은행에 대부분의 기능을 이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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