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봉은 글자 한자로 세계를 좌우할 수 있어”

비전향장기수 안학섭선생을 만나 

지난 5월24일 낙성대 ‘만남의집’에서 비전향장기수 안학섭선생을 만나 선생의 삶과 최근의 근황, 정세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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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찾아뵙고 다시 인사 드립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사하신지 되었는데, 최근까지의 근황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건강은 나이(1930년생) 있으니 좋지 않습니다. 주로 심장이 나쁘고 혈압도 조금 높고 위장도 좋지 않습니다. 형무소(교도소)에서 처우개선 등을 요구하며 단식을 하니 강제급식을 당하게 되었고 1달이 멀다 하고 단식을 했습니다. 상해도 당하고 피를 토하고 간수(교도관) 싸우다가 늑골이 유착되었습니다. 관절염이 심하고 심장이 나빠서 격해지거나 말을 오래하거나 많이 하면 부정맥이 심하게 나타납니다. 지금도 이뇨제를 먹는데 어떨 때는 몸이 탱탱 붓습니다. 내가 젊어서부터 운동을 좋아하는데 지금은 운동도 못합니다. 운동하면 맥이 끊어질 숨이 가빠지기도 합니다. 매달 병원에 가서 혈압약, 심장약, 위장약 등을 정기적으로 받아옵니다. 전립선 비대가 되어서 먹지 않으면 소변을 보기 힘들고 자주 일어납니다


정기검진은 무료로 받습니다. 생활보호대상자는 어느 정도까지는 무료치료가 가능한데 어떤 개인병원에서는 돈을 받기도 합니다. 부산에 무료로 치료해주는 곳이 있는데, 인의협소속으로 영리목적이 아닌 사람중심의 치료를 목적으로 설립된 병원이 있습니다. 그 병원에는 사회운동,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이 주로 가고 거의 무료로 치료해줍니다. 장기수 원로들은 직계가족까지 전부 무료로 치료해주는데 약방에서도 우리들한테는 약값을 받지 않습니다.

 
2009 12월부터 2010 3월까지 3개월동안 입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잠도 자지 못하고 밥도 먹지 못하니 정신적인 장애까지 와서 의사들이 잠자는 약을 투여해야 그때나마 조금 잠을 잤습니다. 내가 퇴원하겠다고 했지만 의사가 퇴원하지 못하게 해서 오래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생활보호대상자로 되어 있는데 생활보호대상자는 부양자도, 재산도 없어야 하는 등 조건이 까다롭습니다. 현금이든 어떤 재산이든 간에 2000만원이상 있으면 생활보호대상에서 제외됩니다.

내가 부산에 있을 울산과 부산에서 후원회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대단히 불쾌했고 냉정하게 거절했습니다. 후원회를 거절한 이유는 운동단체에서 후원회를 만들면 운동단체를 후원하는 사람들이 후원도 맡게 됩니다. 그러면 이중부담을 주는 것인데, 이는 없는 사람들은 부담이 것입니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고마운데, 돈까지 받는다는 것은 이해가 안됩니다

내가 주지는 못할망정 단체들한테 가는 것을 쥐어짜서 받을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양심상 굶어죽어도 이것은 못합니다. 그런데 올해 부산에서 후원회를 만든다고 했을 때는 승낙을 했습니다. 부담을 필요가 뭐있느냐, 반대를 해오다가 마지못해 승낙을 하면서무조건 도와주지 말고 어려울 때나 1년에 한번씩 바람을 쐬는 정도는 모르겠지만 금전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도와주면 안된다. 사람이 습관이라는 것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말 속담에맞던 매도 안맞으면 서운하다 것이 있습니다 누가 정상적으로 주다가 안주면 섭섭한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몸에 배면 안됩니다. 그것은 사유욕과 물욕을 키워주는 것입니다.

2. 서울정치학원을 거쳐 1952 남파된 다음해 체포돼 비전향장기수로 43 10개월을 감옥에서 살다 1995 출소하셨습니다. 어떤 연유로 구속되었고, 수십년 세월동안 감옥안에서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일제시기였던 15세때 피해서 숨어 지냈습니다. 이념이 있어서 또는 어떤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라 일본말을 못하면 관공서출입도 안되고 여행도 못하는 현실 때문이었습니다. 형님 두분이 있었는데 학교는 다니지 못하고 군대에 끌려갔고 나만 학교를 다녔습니다. 큰형님은 그때 북해도에 있었고 작은형님은 훈련소에 있어 내가 편지심부름을 다했습니다. 이후에 작은형님이 훈련소에서 도망가서 이모님집에 숨어지냈습니다. 일본놈들이 우리가족은 도망자가족이었습니다. 일본놈들한테 취조를 받으면서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수배생활을 하다가 해방을 맞았지만 일제시기 조선의 모스크바로 일컬어지는 강화에 유학생들에게서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해방이 되니 니것내것 없이 굶어도 그렇게 좋았습니다. 해방 9월에 미국놈들이 들어오면서이것이 아닌데 이것이 아닌데하는 어른들의 주고받는 소리를 들으면서 더욱더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맥아더가 포고문1호를 발표했을 그러면 해방은 어떻게 되는건가?’ 이렇게 의문을 품게 되었고 찬탁을 외치다가 하루저녁사이에 반탁으로 돌아서고, 다시 반탁에서 친탁으로 돌아서고 하는 것을 보면서 상당히 갈등했습니다. 소미공동위하는 것을 보면서 완전히 그때서부터는 아니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1950 6.25전쟁이 났고 학교에서는 계획적으로 의용군지원을 막았습니다.


1950 9.28후퇴시기에 자발적으로 북에 갔습니다. 남에 있을 없었고, 북에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식인들이나 유명한 예술인들이 북에 많이 올라갔습니다. 홍명희선생도 북에 갔고 사회주의가 뭔지 모르지만 이것이 옳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울정치학원에서 공부를 했고 그전에는 민청훈련소에서 정치교육을 받았습니다. 실제 중앙에는 학교가 있었지만 도나 군에는 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강습소나 훈련소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서울정치학원에서 공부하다가 1952 820일에 소환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학교에 가서 공부하라고 했지만 전쟁으로 누군가 죽지 않으면 다치는데 편히 가서 공부할 수는 없었습니다.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학교 가는 외에 남쪽으로 가는 길이 있었고 기회에 남쪽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8월중순에 결정이 됐고 한달반 가량 준비해서 108 전선을 넘었습니다.


남으로 내려올 때는 1개조 6명이 내려왔는데 조장을 맡았습니다. 당시의 임무는 강원도(지금은 경북) 울진에 있는 강원도당에 가는 것이었고 강원도당에서 지시사항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강원도를 비롯해 남에 있는 본부들, 지하조직들이 1952년말부터 1953년초까지 완전히 깨져버렸습니다. 북에서 내려오는 과정에서 몇번 기습을 당해 강원도당까지 가지 못한 다죽고 혼자 살아남았습니다. 1953 4월초에 나는 강원도 정선에서 수색에 걸려 서로 교전하다가 손가락 관절에 총상을 입고 붙잡혔습니다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이후 대구 특무대 취조를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김창룡이 특무대장할 때인데 대구 육군군법회의에서 1953 11월에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고 무기징역을 구형받았습니다. 이후 선고공판에서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54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국방경비법은 실체가 애매모호합니다. 김선명선생과 한창호선생, 그리고 나는 민간인인데 모두 국방경비법으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6.25전쟁에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끌려갔고 당원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재판을 받았습니다. 돈있는 사람들은 20 받은 사람도 있었고 반대로 사형당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1957년부터 전향공작이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은 1956년부터입니다. 1956 여름부터 전향공작을 시작해서 1957 4월까지 정치범들을 분류해서 전향한 사람은 출소시키고 비전향자는 감방에 넣었습니다. 당시 비좁은 1개에 7명씩 들어가는데 20명씩 수감시켰습니다. 모로 눕고 어깨를 걸쳐야 모두 앉을 있었습니다. 마룻바닥을 보면 1mm이상 먼지가 쌓입니다. 탄압이 얼마나 심했냐하면 예를 들어 먼지투성이의 털담요를 털려고 해도 창문을 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책임지겠다고 해서 창문을 열고 담요를 터는데 간수들이 불이 알고 비상이라며 쫓아왔습니다. 그리곤 무조건 때렸습니다. 수감번호 순서대로 앉도록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옆방에 인민군대 출신이 있었는데 우리방 앞에서 간수가 사람을 구두발로 면상을 때렸습니다. 그것을 보고 모욕을 줘도 한계가 있다며 우리방부터 선동해서 367명이 단식에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그때가 1957년인데 5월초에 시작해서 5월말경에 끝났습니다. 체면이나 공명심이 아닌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만 단식을 하기로 했고 우리방에 있는 7명을 비롯해 367명이 결의했습니다. 그러자 간수들이 때리고 수갑을 채우고 꽁꽁 묶어서 결박지어 독방에 6명씩 넣고 강제급식을 시키는 탄압했습니다. 결국 367명중 마지막에는 남은 사람 8명이 물도 안먹고 끝까지 단식을 이어갔습니다

단식에 들어간 8일째 되는 졸도하는 사람이 생기고 물도 먹지 않고 죽을 각오로 싸워나가자 단식 14일만에 교도소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위에서 시켜서 것이 아니고 법이 잘못된 아니라 시책이 잘못된 것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때부터 생활이 조금 개선되었는데 7월인가 8월인가 중앙에서 조사내려온 후에는 영양부족으로 죽는 사람도 없었고 밥량도 늘어나고 운동, 면회, 서신도 해결되었습니다. 그전에는 영양부족으로 많이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긴 것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계속 싸워야 했기 때문에 한달에 한번 단식을 해야 했습니다.   


1960 4.19 일어나고 나서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정치범에 대해서는 특별대우를 했습니다. 그러더니 박정희군사쿠데타가 일어나고 나서 다시 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광주, 전주, 부산 지역에 흩어져 있던 수감자들을 8월에 전부 대전으로 이감시켰습니다. 대전형무소에서는 맞아죽은 사람도 있었고 너무 억울하니까 자결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부식이라는 것도 실제 나온 것을 주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위에서 감사를 나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반찬이 없어 소금을 먹겠다고 요구한 동지가 이후 우리말로총수정이라는 것으로 고문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원래는 30 이상 고문을 못하게 되어 있는데, 고문을 당하면 10분도 안되어서 얼굴이 하얗게 변하면서 숨을 쉬게 됩니다. 독방은 침구도 자그마하고 추운 정도가 이루 말할 없습니다. 1964년인가 65년에 굉장히 추운 때였는데, 당시 얼어죽기도 했습니다.


대구육군형무소에서 1964 개천절을 기해 대구 삼덕동에 있는 민간형무소로 옮겼다가 1968 48 광주로 이감 갔습니다. 1966 4 당시 김신조사건의 영향으로 대전형무소에서 대구, 광주, 전주, 목포 형무소로 양심수를 분산시켰습니다. 목포는 해안가라서 배타고 와서 구출할 있기 때문에 얼마 있다가 또다른 형무소로 분산시켰습니다. 당시 장기수선생들의 정확한 인원은 모르겠으나 대략 전체 300여명이 수감돼 있었습니다. 광주에 있을 때는 테러가 심했습니다. 때려서는 항복을 하니까 물고문을 했습니다. 얼마나 맞았냐하면 동지는 너무 맞아서 속옷과 관복이 피부에 배겨 옷을 벗지 못했을 정도입니다. 딱지가 떨어지니까 그때서야 옷을 벗었습니다. 그렇게 죽도록 맞았습니다. 그래도 말을 안들으니 물고문을 시작했습니다.


1973 7 전향공작반이 구성되었습니다. 전향전담반의 구성은 경찰, 선생, 장교, 심리학, 교도관간부 경험이 있는 사람을 골고루 추려서 구성하였습니다. 실제 이들은 이론은 없었습니다. 논리적으로 굴복시키려 했지만 이론적으로 지니까 나중엔 폭력을 가했습니다. 1973 10월부터 0.75평에 10명을 가뒀습니다. 내가 벽에 기대면 한사람이 무릎에 안고 또다른 사람이 가슴에 기대고 옆에 사람은 무릎이 닿은 상태에서 잡니다. 어떠한 고문을 당했냐면 겨울에 문을 열어놓고 바닥에 물을 뿌리면 업니다. 얼음위에도 팬티만 입혀놓고 수감시키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1주일만에 의식을 잃었는데 나중에 간수가 아침에 점검하다 발견하였습니다. 의식을 회복시키기 위해 구타와 물고문 등을 시행하기도 했습니다.


전향공작은 형무소마다 양상이 달랐습니다. 그중 가장 고문이 심한 곳이 광주였습니다. 놈들이 옷을 벗겨서 묶어놓고 몽둥이로 발톱을 치는데 발톱이 곪아서 빠졌습니다. 옷을 벗겨서 무릎을 꿇게 하고 겨울에 얼음물을 붓는데 별거 아닌 같아도 정수리에다 일정한 양의 물을 계속 내리부으면 바위로 내리찧는 정도로 고통이 있습니다. 물고문을 시작해서 하루 9명이 전향하는데 그때가 제일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전향한 사람들이 나가면 그것을 빌미로 해서 고문은 악독하게 진행합니다. 나한테는 주전자로 4개까지 먹였습니다


1 전향공작이 1973년부터 1974 4월까지 있었습니다. 전향공작을 피해 자결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양심을 버리고 부담을 가지며 짐승처럼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것이었습니다. 2 전향공작은 1976 6월에 있었습니다. 약점을 잡아서 고문을 가하고 전향하면 묵인해주겠다고 했습니다


당시 1976 6 광주에서 전주로 7명이 이감을 갔습니다. 전향을 안하니 죽일 수도 없고 이상 대화도 안되서 결국 전주로 보낸 겁니다. 전주에는 원래 8명이 있었습니다. 거기 있던 사람들은 테러를 당하지 않았었는데, 우리가 가니까 동지들을 테러하기 시작했습니다. 동지가 운동을 나오지 않았는데 나중에 보니 맞아서 온몸이 새까맣게 되어 있었습니다. 동지들에게 구타하는 것을 보면서 단식을 시작했고 11월에는 격리되었습니다. 나는 독방에서 머리를 맞아 의식을 잃었습니다. 그렇게 놈들이 모질게 대했습니다.


나는 1976 3~4월에 광주로 갔다가 6월에 전주로 갔던 것입니다. 전주에서 그런 것을 당하고 거기서 동지들을 전향시키는 것을 보면서 광주에서 사람들이 단식을 했습니다. 그러자 11월인데 나를 따로 격리시켰습니다. 독방에 가둬두고 몽둥이로 머리를 때렸습니다


2 전향공작은 가족을 동원시키거나 인정관계 등을 이용한 공작을 진행했습니다. 사회참관을 나가지 않을 때도 구실로 구타를 가했습니다. 고문당하는 것은 견디겠는데 가족들을 붙들고 차라리 죽으라고 가장 힘들었습니다. 이후 사회참관 거부자가 늘어나고 사회참관복을 새로 만들어 것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통방을 통해 서로 소통하였습니다.


1980 광주항쟁이후 광주에 있는 사람들을 전주로 보내기 위해서 우리를 대구로 보냈습니다. 그때가 1980 6월가량 되는데 거기서는 테러를 가하지 않고 가족동원, 사회참관 유화적인 방법으로 공작했습니다. 1982년에는 고문해도 안되니까 집에 가서 조사하고 녹음한 것을 집의 향수를 느끼라고 틀어주기도 했습니다.


대구에 있다가 1988 즈음에 대전으로 이감 갔습니다. 그때 전국에 있는 40여명의 장기수들이 대전에 모였습니다. 1992년에 고령자 반신불수된 사람들 내보내고 우리도 70세까지 죽지 않으면 나가서 죽을 가능성이 있구나 생각했고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1989 청주교도소에서 비전향장기수들이, 그리고 1991년엔 고령자와 반신불수자들이 출소하기 시작했습니다. 1994년부터 텔레비젼도 1주일에 한번 있고 낮에는 문도 열어놓게 만들었습니다. 감방에서 편지를 쓰기 위한 필기도구를 방에 넣어준 것도 우리의 피를 토대로 해서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러다가 1995 8.15특별사면으로 출소했는데 당시 비전향장기수는 20~30여명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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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995년에 국방경비법 관련된 소송도 진행하고 계셨는데 이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십시오.

1995 815일을 기해서 출소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국가보안법으로 재판을 받고 감옥에서 징역을 살다가 나왔지만 나는 국방경비법으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국방경비법은 1940년대에 만들어진 임시법으로 자체가 불분명한 것입니다. 국제포로규정을 보면 대상이 교전당사자는 물론 기관원, 지방의 조직적 항거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는 공작원으로 북에서 나온 사람이기 때문에 지방의 조직적 항거자가 되는 것으로 국제포로규정에 따라 포로교환이 되었어야 하지만 남에서 불법적으로 재판을 해서 징역을 살게 했던 것입니다


국방경비법으로 징역을 살면서 뼈만 앙상하게 남고 피를 토하고 후유증으로 몸이 많이 상해 재판을 요구했습니다. 속담에죽어도 무슨 귀신이 잡아가는지 알고나 죽으라 말이 있지만 도대체 내가 무슨 이유 때문에 징역을 살아야 하는지 수가 없었습니다. 그거라도 알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에 재판을 해야겠다는 입장을 집에 전달했습니다. 1주일후에 변호사가 왔다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시 변호사가 왔다가 면회를 못하고 돌아갔는데 이유가 내가 변호사면담을 거부했고 신청한 일이 없었더라는 것입니다. 변호사 자신이 자기명예를 위해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도소에서 변호사를 완전히 따돌린 것입니다. 변호사는 면회접근권을 박탈당했다며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나는 인간적인 자존심까지 묵살된 것이라고 생각해 단식을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렇게 해서야 재판을 하게 것입니다

엠네스티에서도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고 300여개 민주단체들이 진정서를 내기도 했습니다. 1995 89 1차재판을 하게 되어 있었습니만 819일로 연기했습니다. 내가 출소하기전인 814 검사가 전향을 공작했지만 냉정하게 거부했습니다. 놈들이 코너에 몰리고 국제적 압력이 거세지고 법적으로도 소송을 대응할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패소할 이라고 것입니다. 결국 내보내는 것이 낫겠다싶었기 때문에 다음날인 815 내보낸 것입니다

하지만 그냥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형집행정지로 나왔습니다. 형집행정지는 조건없이 석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보증인이 있어야 했습니다. 가족이나 사회단체 또는 종교단체에서 인수하는 사람이 없으면 안되었습니다. 우리가 출소하자 819 재판은 재판의 소송을 제기한 당사자가 출소해서 재판이 성립되지 않기때문이라며 재판을 하지 않았습니다.

4. 선생님께서는 1995 기자간담회에서내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이다. 무자비한 폭력앞에 벌거숭이로 내던져진 인간의 마지막 투쟁은 폭력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내는 것이었다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이 갖춰야 모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기본입니다.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의 도리를 지키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입니다. 어느 동지는 전향공작하러 사람이 폭력과 억압에 어떻게 살아남았냐고 물었을 내가 짐승이 아니고 사람이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양심을 전제하는 조건에서 존엄성 자체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으로 살다가 인간으로서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5. 선생님께서는 출소 보안관찰대상으로 분류돼 감옥생활 하고 계신데요. ‘ 같지 않은 보안관찰법에 의한 피해는 어떠했습니까?

좁은 감옥에서 넓은 감옥으로 나온 것 이상 느껴지는 없다 했습니다. 악은 악이지 법일 없습니다. 그것은 법이 아닙니다. 법이라는 것은 도덕적 규범을 전제로 규정이어야 합니다.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도덕이 아닙니다. 물론 노예사회의 법에서는 사람을 죽여도 무방했지만 그것은 법이 아닙니다.


출소해서도 계속 감시를 받았습니다. 규정에 3개월에 한번씩 신고하게 되어있습니다. 인터뷰도 못하게 되어있고 집회도 못나가게 되어있습니다. 이게 법입니까? 이것은 법이 아니고 사람의 도리도 아닙니다. 그래서 지키지 않았습니다. 내가 만약 지킨다면 법을 존중하는 것이고 존중은 위신을 세워주는 것입니다


경찰이 찾아와서 다시 감옥에 집어넣겠다고 협박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독산동에 조카한테 차비좀 달라고 했지만 차비가 없다며 주지 않았습니다. 당시 버스비가 300원할 때인데 조카한테 내가 야속하다고 했더니 형사가 찾아와서 삼촌한테 돈을 주지 말라고 주면 좋지 않다고 협박했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조카와 연락은 하고 있습니다만 내가 조카손녀들에게 이념하고 피하고 어떤 것이 진하냐고 묻곤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피가 진하다라고 말합니다. 나는 그것만은 잊지 말라고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출소하고 난 후 내가 볼일이 있어 밖으로 나가면 형사2명이 따라다니고 김선명선생과 만날 때에는 형사4명이 따라다닙니다. 한번은 인천검찰청이 내가좁은 형무소에서 형무소로의 이감 이상 나에게 다를 것이 없다 말한 것을 가지고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내가피고인이야 참고인이야따져 물으니 검찰측에서는 피고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구인장도 없이 무엇 때문에 잡아가는 것인가. 미란다원칙도 어긋난 아닌가. 형무소와 똑같잖아 뭐가 다른가라고 따져묻자 대답을 못했습니다다시지금 보안감찰에 걸려 있잖아, 언제든지 형무소에 집어넣을 있잖아. 내가 이렇게 정신적 육체적 압박을 받고 있는데 어떻게 징역이 아니라고 그래그러니 역시 대답을 못했습니다.


1995 출소후 강제로 고향에 끌려갔습니다. 집안이 감시를 당하고 나를 감시하는 겁니다. 형이나 형수도 징역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나를 감시하면서도 감시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인질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인질을 잡고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강화도 집에서 뛰쳐나왔고 1996 1월부터 사직동에 사는 임광빈목사댁에서 보호를 받으며 4년동안 지내다가 2000년에 낙성대근처인 우리탕제원에서 지냈습니다. 탕제원은 양기철, 조창손, 이렇게 셋이서 운영했습니다. 탕제원을 하면서 2000 71 결혼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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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선생님의 고향인 강화지역에서 1951년과 56강화향토방위특공대 대대적인 민간인학살이 있었고, 이를 2007 출간된 한과 슬픔은 세월의 두께만큼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당시 상황에 대한 설명과 함께 진상규명, 유족회 활동, 위령제 등에 대해서 간략히 알려주시겠습니까?


고향이 강화군 화점면 부군리라는 곳인데 고인돌로 유명하고 유네스코에 등재된 곳입니다. 형님이 전쟁때 강화에서 학살당했습니다. 내가 유족회도 만들고 학살현황을 조사하기 위해서 2003 11월에 탕제원을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 


강화에서 가니 서영선선생이 혼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만하더라도 사람들이 정체를 이야기하면 만나기를 거부했습니다. 유족회도 만들고 서영선선생을 회장으로 뽑았습니다. 그리고 활동에서는 양심적인 종교의 힘을 빌리기도 했습니다. 강화의 전지역을 다니지는 못했지만 화점면, 길상면, 송해면, 교동 등은 조사했습니다. 그외 지역은 교회의 양심적인 목사님이 조사했습니다


교동에서는 한개 마을이 아니라 한개 리가 몰살당했습니다. 강화에서 학살당한 사람이 1000여명이 죽었다고 합니다만 나는 조사를 끝까지 못했습니다. 가족전체가 죽거나 아니면 어린아이만 살아남아 고아로 어디서 사는지도 수가 없었고 조사를 일체 거부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설제라는 곳은 적게 추산해서 150여명이 죽었습니다. 주변에 사는 사람한테 물어보니 1957년까지 새벽에 곡하는 소리가 매일 들렸다고 합니다. 아마 살아남은 자식이나 처가 곡한 같습니다. 신천포라는 포구에서는 300여명이 학살당했다고 합니다만 문헌에서는 신천포에서 죽은 것이 아니고 다른 곳에 가서 죽기도 하고 그랬다고 합니다. 학살자들은 M1소총을 시험하겠다며 사람을 한줄로 세워놓고 한방을 쏴서 몇사람이나 관통하는 시험을 했다고 하니 학살이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특히 민주세력이 강했던 곳은 수구세력이 악질적으로 굴었습니다


강화에서는 올해 피학살자공원이 만들어졌습니다. 위치는 길상면 면사무소 근처에 있고 526 피학살자공원에서 위령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현재 유족회는 300여명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피해규모도 정확히 조사되지 못했고 실제 죽은 사람이 등재되지 않는 서류상 의심스러운 점이 많아 앞으로 해결해야 과제들이 많습니다.

7. 2000 9 대부분의 비전향장기수선생님들이 송환되셨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남코리아에 남으셨는데, 당시와 지금의 심경은 어떠하신지요?

이인모선생이 북으로 가는 것을 보고 남북정상들이 만났을 내용을 관심 있게 지켜봤습니다. 그리고 북에서 우리를 소환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것인지 김선명선생과 논의를 했습니다


우리들은 북에서 남북정상이 만나서 송환문제를 다루는 것에 대해 쇼크를 받거나 하는 자극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북에서는 비전향자를 포함한 공화국에 오기를 희망하는 모든 장기수를 전원 보내달라고 남측에 말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필요하기 때문에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배려라고 여기고 김선명선생과 나는 가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최장기수 2 모두 안간다고 하면 남북수뇌의 체면도 있고 일시적이지만 장기수들이 남쪽이 좋기 때문에 안간다는 놈들의 악선전에 말려들 있기 때문에 김선명선생은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정세판단을 일부는 얼마 안있으면 남북간 왕래할수 있다고 보았고 어떤 사람은 1주일나 3달간 북에 있다가 내려오겠다며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정세가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없었고 가면 온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른 측면에서는 남측에서 장기수선생들을 죽이지도 못하고 추방할 곳도 없으니 귀찮은 존재를 처리하는 식으로 추방형식으로 보내는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통일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쳤는데 이곳을 놔두고 북에 가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동지들이 가는 것을 보면서 일면 기쁘기도 하고 일면 정치적으로, 동지적으로 섭섭했습니다. 같이 있다가 헤어지니까 망망한 사막에 혼자 떨어지는 같은 느낌도 있었고 착잡했습니다. 과연 내가 여기서 떨어져서 목적한 것을 이룰 있을까 하는 걱정도 했습니다. 이순신장군의필사즉사직생이라는 말도 있지만 형무소에서 나는 그런 각오였고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으로 살다가 사람으로 죽어야겠다는 것이 앞섰습니다


<송환> 보면 나오는데 동지들이 북으로 가는 것을 보는 나를 보았겠지만 가끔 북에 올라간 장기수선생들의 사진을 접하는데 친구들은 여기서 있을 때보다 젊어졌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기쁘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상당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민족이요 같은 형제입니다. 그런데 저렇게까지 남에서 모략을 할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피는 이념보다 진할 아니라 먼저입니다. 의식에 의해 물질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의식은 물질의 속성입니다. 의식자체는 물질이 아닙니다. 어떻게 이념이 다르다고 이해관계에서 저렇게 모략을 하고 전쟁을 책동하는 것이 과연 사람으로서 있는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8. 오늘은 이명박정권이천안함사건 이유로 5.24조치를 발표한 2년째 되는 날입니다. 현재의 남북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수구세력도 통일을 이야기합니다만 어떤 통일이냐가 중요합니다. 전체 인민이 희생되지 않고 다같이 잘살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이해하고 서로 대화를 해야 합니다. 짐승은 힘으로 우열을 가리지만 사람은 대화로 희비를 가립니다. 이명박정권은 대화를 막고 뭐하겠다는 것입니까. 완전히 짐승화 됐습니다. 냉소화됐습니다. 지금 이명박도당들은 한줌도 안됩니다. 그들에 의해서 그들 때문에 민주세력이 짓눌리고 있습니다. 민주세력도 자신과 긍지를 가지고 떳떳하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명박의 5.24조치는 계획적으로 남북관계를 차단하고 군사적으로 점령통일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흡수통일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됩니다.


통일은 힘듭니다. 연방제통일이 된다고 하더라도 군사, 경제, 외국과의 관계 등이 고려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살자고 통일하는 것인데 사람을 죽이면 뭐하라 통일합니까. 모든 것은 살자고 하는 것으로 죽이려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5.24조치 자체가 평화를 짓밟아 버리고 있습니다. 대화도 그만두자, 교류도 그만두자, 우선 서로 바라보지도 말자 이것이 5.24조치입니다. 그래서 5.24조치는 이명박의 동물성을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없는 일을 했습니다. 인간이 있는 일이 아니라 동물만이 있는 일입니다. 5.24조치후 나타난 사실이 그대로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이명박은 5.24조치를 폐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깨부셔야 합니다. 과정에서 선구자들이 많이 희생되겠지만 많은 것을 살리기 위해서는 언제나 역사발전에서 선구자들은 희생되었습니다.

9. 조국통일을 위한 활동과 함께 학습을 매일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통일을 위한 진보진영의 역할은 어떠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524 신문을 보니까 논객이 통합진보당 이상규당선자에게 남북관계에 대해 흑백논리로 질문을 이끌어 갔는데 의식자체가, 발상자체가 잘못됐습니다. 흑백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노란 것도 있고 파란 것도 있습니다. 물체도 앞면도 있고 뒷면도 있고 옆면도 있습니다. 흑백논리로 몰고 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상규당선자는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고 동문서답격으로 답했습니다


수구보수세력이종북주의 자꾸 끌고 가려고 합니다. 하지만종북주의 수구세력이 먼저 했습니다. 북에서 탁아소 만들었다고 사람공장이라고 그렇게 비난했는데 1956년에 남에서 탁아소 만들었다고 자랑을 했습니다. 이름도 같습니다. 북에서 쓰는 이름을 수구세력도 썼습니다. 수구세력들은 되고 우리가 하는 것은 종북주의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사실을 가지고 종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지 못하는 것에 답답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종북이 뭐고 주의가 뭐고 종북주의가 뭐냐고 묻고 싶습니다. 너희들이 만든 말이니까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는 것입니다. 확신과 자부심을 가지고 눈치보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그들에게 이북에서 하는 것과 정반대로 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라고 물어봅시다. 이북에서 밥먹으니까 이남에서는 죽먹자고 하면 어떻게 되는지 반문하면 그쪽에서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흑백논리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흑백논리로 몰고오면 우회적으로 표현하지 말고 정면으로 받아쳐야 합니다.

10. 최근 검찰은 통합진보당 중앙당사와 서버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을 벌였습니다. 초유의 일로써 진보정당에 색깔론을 덧씌운 정치탄압으로 다가올 12 대선에서의 야권연대를 통한 정권교체를 미리 막기위한 조치로 보여집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봉건군주시대에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라는 자체가 부끄러운 말입니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기업, 정치인, 사회단체 등의 비리가 있을 때는 깊게 조사하겠지만 정당의 당원명부를 검찰이 압수한다는 것은 상식에도 어긋나는 것이고 어떤 나라에도 없는 역사에 길이 남을 짓을 것입니다. 검찰은 수구세력의 수족입니다. 통합진보당내부문제에 대해서는 유감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진보세력들이 하나로 뭉쳐지고 크고 단단해져야 텐데 걱정입니다만 일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1. 통일운동, 진보운동을 하는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거나 격려의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우리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조상을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아첨, 아부는 자멸을 가지고 옵니다. 의타는 습관이 됩니다. 같은 일이 반복될 습관으로 변합니다. 의존심, 의타심은 역시 하나의 습관이 됩니다. 일제 친일매국노들이 그대로 해방후 친미매판매국노로 변하지 않았습니까. 기본은 친일파 척결을 못한 것에 있고 민족성이 약화된 것에 있습니다. 힘있는 자에게 아부하고 돈있는 자에게 빌붙는 이러한 것을 없애야 합니다. 개별적으로 사람들을 만나보면 전혀 민족에 대한 의식이나 통일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대학교에서 강연도 했지만 요즘의 아이들은 민족의식이 전혀 없고 통일에 대해서 무관심합니다


자기 피를 찾아야 하고, 자기 피와 몸을 중요시해야 하고 자기민족을 중요시해야 합니다. 남에게 얻어먹거나 남에게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힘이 센놈이라 할지라도 자신감과 확신성을 가지고 덤비느냐에 따라 극복할 있습니다. 힘이 세다고 해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젊은이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크다고 세지도 않고, 세다고 모두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적다고 약하다는 것도 아닙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긍지와 확신성을 가지고 자신 있게 시종일관 정의를 위해서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12. 민족의 단합과 조국통일을 위한 인터넷언론 ‘21세기민족일보 5 창간했습니다. 민족일보에 당부하시고 싶은 말씀이나 격려의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축하합니다. 그리고 반갑게 맞이합니다. 남코리아의 많은 지식인들이 자기 몸을 사리고 바른 말을 못합니다. 바른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우회적으로 표현하거나 피해갑니다. 그것은 양심을 가진 지식인이 아닙니다


총알이나 핵은 한계가 있지만 필봉은 글자 한자로 세계를 좌우할 있습니다. 형무소에서 나올 기자가 30여명이 있었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하나를 잘못 돌려서 나라가 망할 수도 있고, 하나를 돌리면 죽을 사람도 살릴 있다. 그런데 여기 있는 글쟁이들은 힘에 빌붙어서 정의로운 학생들 죽이는데 협조하지 않았느냐. 체면이 구기기 때문에 인터뷰 안하겠다 했습니다. 그러자 일간지신문의 주필이신문도 장사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어쩔 없다라는 것인데 나는 이렇게 말하고 나왔습니다. “장사도 선의적인 장사를 해야지 돈에만 치중하면 사람을 잃는다. 사람을 구하는 장사가 되어야지 사람을 잃는 장사는 결국 망한다“. 앞으로도 조국통일에 좋은 , 좋은 내용을 많이 발표해주십시오.

바쁘신 가운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21세기민족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