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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4월28일 일요일 13:4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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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1945.4.9, 본회퍼목사사형집행일

1945.4.9, 본회퍼목사사형집행일


1945.4.9, 오늘은 디트리히 본회퍼목사가 사형을 당한 날이다. 독일 목사·신학자이며 반나치운동가인 본회퍼는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계획에 가담한 죄로 1943.3에 체포됐다가 결국 이날 교수형에 처해졌다. 본회퍼가 갇힌 플로센뷔르크라는 수용소는 체코에 인접한 독일동남부의 자그마한 도시다. 그는 처형되기 전에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지금도 그의 묘비엔 <디트리히 본회퍼-그의 형제들 가운데 서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새겨져있다 한다. 

본회퍼는 나치의 박해가 시작됐을 때 미국으로 망명할 수 있었으나 고통받는 독일국민을 떠날 수 없다며 독일에 남았다. 당시 대부분의 독일교회들은 하나님이 독일을 경제·사회적으로 구원하기 위해 히틀러를 보냈다며 심지어 히틀러를 그리스도라고까지 주장했다. 이에 본회퍼는 라디오를 통해 히틀러가 독일국민들로 하여금 히틀러를 우상으로 숭배하게 만든다고 폭로·비판했다. 그때 나치에 반대하는 신학자들은 <고백교회>를 결성하며 양심대로 행동하려 했는데, 이 일로 본회퍼는 2년간 수용소생활을 하다가 끝내 처형됐다. 

본회퍼는 1906.2.4,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의사인 아버지의 6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회퍼는 프로이센왕실의 궁정목사였던 할아버지처럼 신학자가 되려고 했으나 아버지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허나 본회퍼는 신념을 굽히지않고 결국 신학자의 길을 갔다. 본회퍼는 1923년 튀빙겐대와 베를린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는데, 베를린대졸업논문 <성도의 교제>는 당대 신정통주의의 거장 카를 바르트까지 감탄하게 만들었다 한다. 그는 25세에 목사안수를 받았고 그보다 먼저 베를린대신학부강사로 임명됐다. 한 때 미국으로 건너가 유니온신학교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본회퍼는 실제 목회를 했고 신학을 배우며 가르쳤다. 본회퍼는 신앙인이면서도 사상가이자 실천가였다. 신앙과 삶, 투쟁을 일치시킨 본회퍼는 그 2000년전 유대땅에서 박해받은 예수처럼 100여년전 독일에서 활동했다, 30대에 생을 마감한 공통점도 있다. 1차세계대전이 발발한지 100주년이 되는 올해, 여전히 코리아반도에 전쟁기운이 감돌고 있다. 또 남코리아에 박정희파쇼독재자의 딸이 부정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돼, 유신파시즘을 부활시키고 있다. 이런 때에 누구보다 본회퍼의 신념과 실천이 절실히 와닿는다고 하지않을 수 없다. 결국 역사는 히틀러가 아니라 본회퍼를 높이 평가한다. 영생의 삶은 히틀러가 아니라 본회퍼에게 있다. 

조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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