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메딘YOMEDDINE
A.B. SHAWKY 감독
이집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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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궁금하다. 어떤 이유로 지금에 살고 있는 것인지 잘 모르고 산다. 이집트의 아주 작은 나병환자들의 마을에서 쓰레기를 주워다 팔아 겨우 유지되는 삶과 같이 팍팍한 인생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됐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주인공 바셰는 여정을 시작했다. 아내의 죽음, 자신의 부상, 녹록치 않은 수입, 딱히 좋지만은 않은 마을사람들과의 관계는 바셰가 살던 곳을 떠나기에 충분한 이유였다. 무엇보다도 가족이 없는 줄 알았던 아내의 부고에 먼 걸음을 한 아내의 어머니와의 만남은 바셰가 어쩌면 외면하고 있던 자신의 뿌리 문제를 바로 보게 만들었다. 그렇게 길을 떠나는 바셰의 발걸음은 가볍고 경쾌했다. 바깥세상과의 조우는 신나는 일이었다. 게다가 바셰는 혼자가 아니었다. 바셰의 곁에는 오바마라는 꼬마아이가 함께했다.   

 
사회는 차갑고 냉정하다. 사람들 속에 어울리지 못하면 그렇다. 나병환자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 인간으로 보지 않는 시선을 마주한 바셰는 필사적으로 자신도 인간임을 소리 높여 외치지만 얼굴을 가리는 모자를 쓰지않고서는 여정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래도 바셰의 여정은 희망적이다. 아내에게 선물하려던 소중한 라디오와 음악이 있고, 서로 믿고 돕는 동반자적 관계의 꼬마가 있었다. 영화는 바셰가 수모와 고난을 겪더라도 무너지지않고 끝까지 나아가게 하는 힘을 바셰의 주변인물에게서 찾았다. 사회적 관계를 맺고 진심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의사소통하는 사람들에게서 해답을 찾고 종착지까지 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그리고 마침내 여정의 끝에서 바셰는 필요한 사과와 따뜻한 위로를 받았다.  
 
그렇다고 무엇이 나아졌는가. 좋은 옷을 입고 살던 곳으로 돌아간다고 그곳에서 쓰레기를 주워 팔아야 겨우 유지되는 바셰의 삶은 바뀌지 않는다. 고향에 간다던 바셰는 애써 도착한 고향이 자신에게 맞는 곳이 아니었다고 느끼고 <콜로니>, 즉 식민지라 불리는 살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새 여정을 시작한다. 영화는 바셰가 차별로 인한 내면적인 속박의 굴레를 벗어던짐으로써 해피엔딩을 맞는다. 바셰에게는 콜로니이긴 해도 그곳이 오랫동안 삶을 유지해온 곳이 고향이자 터전이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해방을 맞이하자 그곳으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콜로니야말로 진정으로 문제해결이 필요한 공간이 아닌가. 바셰에게 혁명이 필요한 공간은 아버지의 고향도, 차별이 없기에 바셰가 장애가 없는 자신을 꿈꿀정도로 편안한 공간이었지만 거쳐갈 뿐이었던 같은 처지의 소수자들, 사회적 약자들의 거처도 아니었다.  
 
누구에게 위로를 바라지않기엔 함께 사는 세상이다.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사후의 <최후의 심판(요메딘)>은 힘들게 사는 민중의 마음을 풀어주고 위로해준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억울한 사람에게 공정한 댓가를 치르게 할 것이라 말하지만 그저 종교적 관념이고 막연한 기대일 뿐이다. 자기의 잘못이 아닌 장애로 차별받아 일생을 불행히 산 사람에게 건네지는 사과, 위로가 일정한 카타르시스는 주지만 그렇다고 그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구조적으로 나아지게 하지못한다. 바셰는 여전히 나병환자이고, 쓰레기를 줍는 사람이다. 바셰가 행복하려면 사회적인 차별이 없어져야 하고, 제도적인 변혁이 이뤄져야 한다. 최후의 심판은 당연히 차별을 반대하는 방향에서 이뤄져야 한다. 심판의 결과가 사람들의 삶의 질을 항구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깐느국제영화제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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