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암투병에 공황장애까지 겪고 있는 김혜영양심수가 박근혜<정부>의 공안탄압과 인권유린에 맞서 5월26일부터 서울구치소에서 무기한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다.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이어나가는 김혜영양심수가 하루빨리 석방되길 바라며 학생운동시절부터 지금까지 자주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해온 코리아연대 김혜영회원의 삶과 길에 대해 연재한다.
5.18광주청문회의 기억  

2014년 12월22일 통합진보당이 해산된지 3일만에 박근혜<정권>은 코리아연대를 탄압한다. 코리아연대회원들은 공안탄압에 맞서 민주주의수호와 공안탄압저지를 위해 기독교회관에서 농성을 시작했고 김혜영양심수도 농성에 함께 했다. 농성기간 기독교회관이 단전되는데 농성단은 전기가 끊긴 기독교회관에서 촛불을 켜고 <별밤(농성장, 별이 빛나는 밤에)>행사를 진행하며 농성을 이어간다. 

김혜영양심수는 <별밤>에서 운동을 시작한 계기와 학생운동시절을 이야기했다. 중학교2학년때인 1988년 5.18광주청문회가 나오는 뉴스를 보면서 학교수업시간에는 듣지 못했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때 사회에 뭔가 문제가 있었나 보다. 그런데 그 문제가 과연 바로 잡힐까?>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 기억은 1993년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시절 학내에서 광주5.18순례단모집선전물을 보면서 되살아났고 진실을 알고 싶다는 생각에 당시 광주를 가게 된 것이 막연하나마 운동을 시작한 계기로 된 거 같다고 전했다. 또 고등학교연합동문회에서 만난 선배가 조국통일위원장이어서 그 선배를 통해 많은 걸 알게 되었고 통일소모임활동도 하게 되었다고 떠올렸다.

한총련과 90년대 학생운동 

1987년 6월항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온 학생운동은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을 거쳐 1993년 한총련(한국대학생총학생회연합)으로 계승된다. 당시 학생운동조직은 매우 강력했으며 전사회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대표적으로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반대·쌀개방반대투쟁, 1995년 전두환·노태우광주학살자처벌투쟁 등을 전개했다.

1990년대 학생운동은 통일운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간통일운동진영에서도 1990년부터 8.15광복절마다 범민족대회를 개최했는데 1993년 이른바 <문민>정부가 들어서며 통일운동이 우경화되는 상황에서 한총련은 범민족대회를 고수하는 원칙을 지켰다.

1996년 김영삼정권은 정권말기에 가까워지며 정치경제적 위기에 몰렸다. 한총련은 그해 봄 12조에 이르는 김영삼의 대선비자금을 공개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투쟁했다. 결국 김영삼정권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문민>의 허울마저 집어던지고 매년 개최되던 범민족대회를 여느해와 달리 원천봉쇄하고 강경진압했다.

김영삼의 학생운동탄압과 <자주대오>사건 

1997년 정권의 위기는 더욱 심화됐고 공안탄압도 악랄해졌다. 이른바 <한총련>사건이 벌어졌으며 김혜영양심수가 다녔던 단국대천안교정에도 공안탄압이 일어났다. 1990년대 대학들에서 심심치 않게 벌어졌던 이른바 <자주대오>사건이 단국대천안교정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에서 2001년 7월 발행한 <민주가족26호>에 따르면 <자주대오> 또는 <활동가조직> 사건은 1991년 6월부터 2001년 5월까지 26개대학에서 총286명의 구속자를 낳았으며 <검·경의 주장과는 달리 이들 사건 구속자의 대다수는 수사기관이 강압수사를 통해 받아낸 허위자백을 기초로 조작한 사건>이었다.

이른바 <자주대오>란 대다수가 <총학생회선거를 준비하기 위한 일시적인 모임>이거나 <학생회의 방향성을 모색하는 토론모임>이었다. 또 <수사기관이 뚜렷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단순히 2~3년전의 학생회간부 등으로 활동한 전력을 문제삼아 조직사건으로 확대했다.>고 이글은 지적한다.

구속과 아버지의 죽음

1997년 추석직후 김혜영양심수가 다니던 단국대천안교정에서도 학생11명이 체포·구속된다. 김혜영양심수는 당시 보안수사대에서 조사를 받은 경험을 이야기하며 <집행유예기간인 친구가 있어서 그 친구만 구속되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진술을 해나갔다. 그러나 그곳은 진술을 하기만 하면 안한 것도 한 것이라고 얘기하는 시스템이 된다. 그런 경험이 있다보니 왜 묵비단식이 중요한지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그해 김혜영양심수의 아버지가 큰 병환으로 입원하게 된다. 추석을 가족과 같이 보내지 못할 것이 예견되던 대학상황 때문에 김혜영양심수는 추석직전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에 찾아간다. 이것이 김혜영양심수가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함께 한 시간이었다.

김혜영양심수가 구속된 이후 아버지의 건강은 급속히 악화됐다. 그러던중 항소심판결 2주를 앞두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김혜영양심수는 감옥에서 방문이 열리는 순간 아버지의 죽음을 직감했다고 한다. 1주일간의 장례를 위해 감옥을 잠시 나왔다. 그리고 1주일후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됐다.

<이 삶이 아버지가 가르쳐준 삶과 다르지 않다>

김혜영양심수는 아버지를 그렇게 보내고 어머니께 죄송한 마음에 <계속 운동을 하는 게 맞나>라는 고민도 했다. <이렇게 살다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김혜영양심수는 자신의 길지 않은 학생운동이지만 이 삶이 아버지가 가르쳐준 삶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옳은 것은 옳다고 말하고 정의롭게 사는 것. 그런 생각을 한 이후 <다시는 흔들리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고 김혜영양심수는 말했다.

1998년 출소한 후 김혜영양심수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8.15범민족대회를 준비하는데 함께 하자는 선배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김혜영양심수는 공안탄압으로 농성을 하면서 언제 또다시 구속될지 모르는 순간에도 자신이 운동을 하는 이유에 대해 <내가 이길을 가면서 행복했던 거 같다.>고 당당히 말했다. 그는 <별밤>에 함께 한 후배들에게 <나는 이렇게 활동하는 게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에 나혼자만 이렇게 사는 것이 아까워 내가 아끼는 너희와 함께 했으면 좋겠어라고 얘기했는데 그것이 내가 활동하는 이유인 거 같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김혜영양심수와 함께 하는 이유가 있고 그가 육체적 고통과 심리적 압박을 견디며 어떻게 될지 모를 내일에서도 희망을 그리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