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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 항쟁의기관차〉 발칸반도의 역사와 그리스내전의 패인

전쟁의 화약고 발칸반도

중세 발칸반도는 불가리아·크로아티아·세르비아·보스니아등으로 이뤄져있었다. 고대 도시국가로서 전성기를 누린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왕국·로마제국등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자치권획득으로 독자적인 정치·문화를 형성해갔고 동로마제국당시 그리스의 문화는 동로마제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발칸반도는 동로마(비잔티움)제국·몽골제국등의 침략과 지배를 극복하며 고대·중세를 거치다 1300후반부터 아나톨리아반도를 제패한 오스만제국에 의해 차례차례 점령된다. 불가리아는 1396~1878까지 지배당했으며, 세르비아는 1389, 보스니아는 1463에 오스만제국에 합병됐고, 크로아티아일부지역은 1592 오스만제국에 함락됐다. 한편 1453 오스만제국에 의해 동로마제국이 멸망하며 그리스도 오스만제국에 복속된다. 이시기 그리스의 지식인들이 발칸반도·서유럽등지로 이주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들은 서유럽 르네상스의 발흥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한편 그리스인평야지대에 살던 사람들은 산지로 숨어들어 정착을 했다. 오스만제국이 밀레트제도로 종교에 따라 여러민족을 분리했는데, 이제도 덕분에 그리스정교회가 그리스인들의 민족성·문화·언어를 지키는데 기여했다. 

1815 나폴레옹보나파르트가 전쟁에서 패배한 후 프랑스혁명의 물결이 발칸반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혁명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저항세력은 1821~29 오스만제국에 맞서 독립전쟁을 전개한다. 1814 필리케헤타이리아(우호형제단)비밀결사단체가 그리스해방을 목표로 조직돼 1821부터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오스만세력에 의해 반란은 여러차례 진압됐으나 러시아제국·영국·프랑스가 개입해 전황을 뒤바꾼다. 그리스인들은 1828 중앙그리스일부를 장악한 후 협상끝에 1832 독립국으로 승인됐다.  

그리스독립전쟁은 러시아제국·오스만제국간 전쟁에 영향을 미쳤다. 오스만은 1827 그리스독립전쟁기간에 발생한 나바리노해전에 러시아제국이 참전한것에 대한 보복으로 러시아제국에 전쟁을 감행했다. 그결과 오스만제국은 그리스와 왈라키아·몰다비아를 잃었다. 왈라키아·몰다비아는 통합해 1859 루마니아를 이루게 된다. 맑스·엥겔스는 이전쟁으로 인해 오스만제국이 해체되고 발칸반도국가들이 독립하면서 러시아제국주의가 강화됐다고 평가했다. 한편 세르비아는 1830 오스만제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했다.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는 1877~78 발발한 러시아·오스만전쟁에 참여해 불가리아는 자치권을 획득하고 세르비아는 완전한 독립을 이룩했다.

1867~1918 존속한 오헝(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1878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점령하고 1908 직할령으로 합병하면서 보스니아위기를 촉발했다. 발칸반도의 패권을 두고 오헝·세르비아·불가리아·러시아등이 알력싸움을 벌이는데 이들과 서유럽제국주의국가들이 동맹관계인 이유로 발칸은 최대화약고로 전변된다.  

1912.10 1차발칸전쟁과 1913.6 2차발칸전쟁이 발발했다. 그리스·세르비아·몬테네그로·불가리아는 발칸동맹을 결성하고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오스만제국과 전쟁했다. 오스만제국은 1908 청년튀르크당혁명후 혼란한 상황이었고 1912 알바니아반란, 이탈리아·오스만전쟁에서 패배하며 세가 약화돼있었다. 1912.12 강화회담에서 튀르키예의 가장 서쪽에 있는 에디르네할양문제로 인해 회의가 진전되지않고 1913.1 오스만내에서 청년튀르크당이 반란을 일으키자 전투가 재개됐다. 1913.5 패전한 오스만은 이스탄불주변을 제외한 유럽의 모든 땅을 잃었고 발칸동맹의 나라들은 발칸지역의 영토들을 합병했으며 알바니아가 독립했다. 이후 마케도니아지방에 대한 영토배분문제로 발칸동맹내 갈등이 격화돼 1913.6 2차발칸전쟁이 발발했고 불가리아가 패전한다. 이로인해 발칸의 분열은 심화됐고 이후 서방제국주의자들이 이끄는 그리스와 러시아가 이끄는 발칸국가간에 갈등과 반목이 심해진다. 발칸전쟁을 1차세계대전의 서곡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발칸에서의 파르티잔투쟁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나치독일은 루마니아·불가리아를 점령한 후 1941.4부터 유고슬라비아·그리스를 공격해 점령하며 대소련전쟁을 준비했다. 영국·프랑스등은 전쟁직전 뮌헨협정으로 나치독일이 동부전선에 집중하게 하고, 전쟁이 본격화되자 영국·미국은 소련과 약속한 2전선(프랑스 또는 발칸지역)형성에 태만했다. 그결과 소련은 1944까지 악전고투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시기 유고슬라비아·그리스·알바니아등 발칸반도민중들은 나치독일점령군을 구축하기 위한 파르티잔전투를 활발히 수행했다. 1941 유고슬라비아군사위원회·인민해방통일전선, 1941.10 그리스민족해방전선, 1942 알바니아민족해방전선·불가리아조국전선, 1943.11 형성된 유고슬라비아민족해방위원회를 모태로 한 국민해방통일전선등이 조직됐다.

1944중반 소련은 나치독일에 의해 점령당했던 지역의 3/4을 해방했고 일부는 발칸반도쪽으로 진출해 이지역민중들의 전투를 직접적으로 지원했다. 1944.6 소련의 붉은군대는 해방군으로서 루마니아영토안으로 진입했고 서쪽으로 진군했다. 소련공산당·정부는 당시 제기된 여러문제들에 대한 답으로서 5개내용의 <선언>을 발표했다. 그중 하나는 <파시스트침략군들로부터유럽국가의국민들을해방하고그들이독립된민족국가를재건하는일을원조할것>이며 다른 하나는 <해방된나라의국민들이자기나라의국가조직과사회제도에관한문제들을완전히결정할수있는자유를보장해줄것>이다. 각나라의 파르티잔부대들이 조국해방을 위해 서쪽으로 진군했다. 

1944.8 공산당의 지도를 받은 루마니아민중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켜 루마니아파쇼정부를 전복했다. 9.5 소련은 불가리아파쇼정부에 선전포고를 했고 불가리아노동당의 지도를 받으며 투쟁해온 불가리아민중들은 9.9 수도 소피아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키며 인민전선정부를 세웠다. 10월 붉은군대는 유고슬라비아영내로 진입했다. 유고슬라비아는 공산당이 주도한 무력해방투쟁이 조직적으로 전개돼 각지역파르티잔부대가 요시프브로즈티토를 지도자로 하는 국민해방군으로 통합돼있었다. 붉은군대는 국민해방군과 협력해 10.20 베오그라드를 해방했다. 11.29 알바니아가 해방됐다. 

그리스의 전황은 복잡하게 전개됐다. 1920년대부터 그리스파쇼정부들의 그리스공산당에 대한 탄압이 매우 심각했다. 1924부터 보안위원회가 설치돼 파업투쟁에 나선 노동자들과 공산주의자에 대한 체포·추방이 빈번하게 감행됐다. 일례로 1928 그리스공산당은 지지자 4268명이 체포돼 481명이 추방되고 817명이 고문을 받았으며 22명이 살해됐다고 밝혔다. 1931~41 그리스공산당서기 니코스자카리아디스는 1940 공개서한을 통해 그리스·이탈리아전에 민중들을 불러일으켰다. 1941 그리스우익정부는 영국군의 진주를 허용했다. 이탈리아의 그리스침공이 좌절되자 1941.4 나치독일은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개시해 그리스를 점령했다. 그리스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저항운동은 독일침략후 들불처럼 타번져 1941.9 그리스공산당·농업당·통일사회당·인민민주연맹·공화당·사회당등이 모여 민족해방전선을 창설했다. 민족해방전선의 전체조직원은 전체 750만명의 그리스인구중 50만~200만명으로 추산된다. 

1942.2 그리스공산당과 민족해방전선중앙위는 산간지역을 중심으로 자체부대를 결성해 무장투쟁전개를 결정했고 5월 민족인민해방군부대를 창설했다. 1943 독일군에 맞서는 강력한 무장저항단체로 성장했다. 민족인민해방군의 병력규모는 1944.9 4만5000~5만여명, 예비병력까지 포함하면 150만여명으로 추정된다. 그리스전국에 민족해방전선조직이 체계적으로 갖춰졌고 사실상 지하정부와 다름없었다. 

민족민주그리스연맹을 중심으로 한 우익민족주의자들은 나치독일까지 끌어들여 1943.12 민족인민해방군을 공격하며 내전을 촉발했다. 이전투는 플라카협정으로 일단락됐지만, 근본문제는 해결되지않아 향후 그리스내전의 불씨로 남아있었다. 

그리스공산당의 치명적실책과 1차그리스내전

1944 민족인민해방군이 그리스의 4/5를 해방시키며 장악하고있었음에도 영국이 본격적으로 그리스내정에 개입해 파쇼정부부활을 획책하며 그리스상황은 복잡해진다. 영국을 등에 업은 요르요스파판드레우는 그리스공산당의 고립을 의도로 조직된 1944.5 그리스제정당·단체연석회의에서 민족해방전선·민족인민해방군이 내전과 테러를 조장한다고 왜곡했다. 여러갈등끝에 민족해방전선·민족인민해방군은 파판드레우의 사임을 조건으로 통합정부를 구성하는데 합의한다. 9월 미·영, 그리스망명정부, 민족인민해방군, 민족민주그리스연맹의 대표들은 모든 저항단체를 그리스망명정부와 영국군휘하에 둔다는 내용의 카제르타협정을 체결했다. 이협정은 그리스저항단체들을 무장해제하려는 영국의 흉심이 담겨있었다. 이협정결과 영국군은 합법적으로 그리스에 진주할수 있었다. 

자카리아디스는 1948.12 발표한 글을 통해 1944당시 일련의 상황들에 대해 분석하고 그리스공산당의 오류를 지적했다. 먼저 영국군이 그리스에 진주했을때 이들은 독일군과 싸울 필요가 없었다며 영국군은 그리스민족해방군을 무장해제하고 해산시키며 민중들의 해방운동을 통제하에 두려했다고 폭로했다. 뿐만아니라 그리스가 외국제국주의에 경제·정치적으로 의존하게 했으며 영국·미국제국주의자들은 그리스를 인민민주주의나라들에 대항하는 투쟁기지로 전환시키려했다고 분석했다. 이어 그리스공산당은 1944가을 영국이 그리스영토에 상륙했을때 우유부단했고 명확한 전망이 없었으며 앵글로색슨제국주의의 그리스에 대한 목적과 역할에 대한 환상을 품고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공산당지도부가 그리스주둔영국군사령관 스코비에게 모든 권력을 부여한 카제르타협정을 수용하는 오류를 범했으며 충분한 대응책을 강구하는 대신 영국과 현지대리인인 군주-파시스트반동들에게 성과들을 자발적으로 양도했다고 자기비판을 했다. 

그리스공산당이 범한 오류들은 1차그리스내전의 패배로 연결된다. 1944.12.2 파판드레우내각은 민족인민해방군·민족인민해방해군·민족시민방위대·민족민주그리스연맹을 해체하는 포고령을 인준했다. 그리스공산당은 이에 항의하며 12.3 시위, 12.4 총파업계획을 발표했다. 12.3 경찰이 비무장시위대에 발포하며 시위대 수십명이 사망하고 수백명이 부상을 입었다. 분노한 시위대가 경찰의 경계선을 뚫고 광장을 가득 메우자 영국군낙하산부대가 시위민중들을 밀어내 해산시켰다. 다음날 항의시위에 나선 민중들을 향해 극우반공단체 <키>가 사격을 하자 이에 대항해 민족인민해방군부대들은 키본부를 습격했고 아테네경찰지서 24곳중 21곳을 장악했다. 12.4 노동자들은 총파업을 단행했다. 12.5 윈스턴처칠영국총리는 스코비에게 <아테네의무장한남성들에게는누구를막론하고발포를주저하지말라>고 명령했다. 스코비는 총파업에 맞서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럼에도 민족인민해방군은 영국군을 적대적으로 간주하지않으며 우경적으로 행동했다. 초기전투는 민족인민해방군에게 유리하게 진행됐으나 12일부터 영국군이 대규모로 증원됐으며 18일 영국군은 파쇼독일부역자들로 구성된 국가경비대를 동원해 민족인민해방군을 공격했다. 몇차례의 협상이 결렬된 후 1945.1 영국군병력은 7만5000명에 이르렀으며 대부분 아테네지역에 집중됐다. 결국 1월초 민족인민해방군은 아테네에서 탈출했다. 영국군통계에 따르면 아테네에서만 민족인민해방군병력 2000~3000여명이 사망했고 7540명이 투옥됐다. 결국 1945.1.10 민족해방전선·민족인민해방군은 정전에 서명했다. 정전협정은 민족인민해방군부대들이 정전직후 아테네-테살로니키간 도로서부지역으로 철수한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2월초 아테네인근 바르키자에서 협상을 시작했다. 정부측은 민족해방전선·민족인민해방군의 정부참여를 배제하되 언론·결사의 자유는 보장하겠다는 협상수정안을 제안하고 군사회담에서 민족인민해방군의 무장해제등을 요구했는데 그리스공산당측은 이에 굴욕적으로 합의하며 바르키자협정을 맺었다.

1차그리스내전과 관련해 자카리아디스는 <군대를집중시켰다면우리는신속한승리를달성하고아테네와피레우스를해방하고영국군부대들을다시바다로몰아넣을수있었을것>이라며 전략부재에 따른 패배임을 시인했다.

트루먼독트린과 그리스

그리스에 대한 미국의 직접적개입은 그리스를 소련과 사회주의화된 발칸다른나라들을 견제하기 위한 교두보로 삼기 위한것이었다. 미국의 대소련봉쇄정책과 트루먼독트린은 미국의 제국주의적속셈을 여실히 드러낸다. 봉쇄정책의 설계자는 조지케넌이다. 소련주재미대사관대리대사였던 케넌은 <미국의대소정책의주요요인은소련의팽창성향에맞서장기적이고인내심을갖되단호하며신중한봉쇄정책이어야한다>고 주장했다. 1947.1 그리스에 파견된 미국의 경제사절단장인 폴포터는 그리스정부가 <완전히반동적이며믿을수없을정도로취약하고어리석으며부패하다>며 해리트루먼미대통령에게 해외원조가 그리스를 공산주의통제로 넘어가는것을 막는데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미관리들은 그리스원조가 미국의 그리스내정간섭과 함께 진행될것이라고 여겼다. 2월 그리스주재미대사 린콘맥비는 <그리스가공산주의수중에떨어지면근동전지역과북아프리카의일부도소련의영향력아래넘겨주는것이확실하다>라고 보고했고 이는 미정가가 당시 그리스상황을 바라보는 주된 시각이었다. 2월말 조지마샬미국무장관은 <그리스가내전으로귀착된다면소련통제하의공산국가로출현할개연성이충분하다>·<유럽·중동그리고아시아에대한소련의지배를확장시킬수도있는일련의위기가운데우리가직면한최초의위기라고말하는것은기우가아니다>고 보고했다. 트루먼행정부는 그리스·튀르키예원조확대를 결심한다. 딘애치슨국무차관은 그리스문제가 <세계2/3지역이공산주의자들에의해조종되느냐의문제>라며 그리스에 대한 침략책동을 노골화했다.

당시 미국은 중동을 동서를 연결하는 육·해·공으로의 고속도로로 여기며 이지역에서의 소련의 영향력을 봉쇄해야한다고 인식했는데 이를 위한 관문이 그리스라고 판단했다. 1947.3.12 트루먼은 그리스·튀르키예원조를 결정하며 <소수무장세력이나외부의압력으로시도되는굴종에저항하는자유국민들을지지하는것이미국의정책이돼야한다>며 반공을 핵심으로 하는 내전정책인 트루먼독트린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7월 미국무장관 제임스번스와 영외무장관 어니스트베빈은 소련이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서 철수하고 그리스에 권력을 장악하지못하도록 압력을 가하는데 합의했다. 1948.2 미국가안보위원회는 <미국은그리스가외부의무력공격이나그리스내의공산주의운동을통해소련의지배하에놓이는것을막을가장효과적인방법으로,필요하다면정치력·경제력·군사력을최대한활용해야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한편 1947.12 트루먼은 국가안전보장회의보고서를 재가하며 CIA(미중앙정보국)에 비밀공작수행권한을 부여했다. 1948.8 트루먼은 소련과 동유럽등 사회주의국가를 대상으로 반소·반공게릴라작전을 수행한다는 내용의 국가안전보장보고서20호도 재가했다. 한편 마샬계획에 따른 원조가 그리스극우세력의 강화로 이어진것은 당연하다. 마샬계획예산중 관리비로 할당된 10%의 절반은 CIA정책조정실을 통해 비밀첩보활동자금으로 빼돌려졌다. 미국에 의한 경제적원조가 그리스친미극우세력의 비대화로 연결되는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전쟁직전상황과 내전의 1·2국면

바르키자협정체결후 우익정권은 진보세력에 대한 백색테러를 심화했다. 파쇼독일부역부대였던 보안대대들은 공개적으로 시민들을 위협했고 정부는 민족해방전선·민족인민해방군조직원들에 대한 사면약속을 지키지않았다. 영국군의 비호하에 우익세력정치세력·군경·준군사단체들은 재결집해 진보세력에 대한 학살과 박해에 집중했다. 1945 한해동안 대다수의 지방·도시에서 국가경비대·자위대와 함께 활동한 경찰은 그리스공산당과 민족해방전선·민족인민해방군조직원들을 체포했고 그리스정부는 수백명의 공무원들을 민족해방전선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해고·전출·파면했다. 백색테러의 심각성은 사라피스민족인민해방군사령관의 <백색테러가오히려정치에관심을갖지않았던수만명의직장인과사무직노동자들을공산당에가입하도록강요하고있다>는 말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1945말 4만8956명의 민족해방전선지지자들이 감옥에 수감됐는데 나프플리온교도소의 경우 전체재소자 460명가운데 좌익으로 분류되는 수감자가 407명인 반면 파쇼부역자는 4명에 불과했다. 민족해방전선은 바르키자협정체결후 1946.3총선까지 백색테러로 1289명이 살해됐고 6681명이 부상당했으며 민족해방전선사무실677곳이 파괴됐다고 기록하고있다. 이같은 학살과 테러는 그리스공산당으로 하여금 또다시 무장에 나서게 했다. 

1945.5 다하우수용소에 수감중이던 자카리아디스가 아테네로 귀환했다. 그리스공산당은 6월 12차전체회의에서 백색테러에 저항하기 위한 대중자위조직건설을 호소했고 자카리아디스는 8월 한연설에서 테러를 중단하지않으면 무장투쟁을 전개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좌익세력은 1946.3총선거에 대한 보이콧운동을 진행했다. 총선거는 영·미가 우익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벌이는 음모였다. 2월 민족해방전선구성원인 사회당은 선거실시가 <충돌을지속시키고내전을조장할것>이라고 경고했음에도 비민주적이며 조작된 선거가 실시됐고 우익정권이 들어섰다. 

1946.3 2차그리스내전의 1국면이 시작됐다. 3.30 민족인민해방군이 올림푸스산동쪽기슭 리토코로마을을 공격하며 내전이 시작됐다. 자카리아디스는 4월 이사건에 대해 <왕당파-파시스트와영국군에대한경고>·<스스로방어를위한인민의의무>라고 주장했다. 4월이후 민족인민해방군출신의 복귀운동이 전개되며 게릴라병력이 증원됐다.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등은 총기·식량·의약품등을 지원했다. 5월부터 게릴라들은 서부 마케도니아의 마케도니아인민전선과 협력하기 시작했다. 그리스공산당은 7월 게릴라전의 확대와 도시자위대무장을 결정하고 마르코스바피아디스를 게릴라사령관으로 임명했다. 9월 마르코스는 북부 테살리의 게릴라주력부대를 이끌었다. 군은 테러피해자들을 흡수하면서 9월 4000여명에서 12월 1만여명까지 병력을 확대했다. 12월 그리스민주군대로 이름을 변경했는데 민주군의 목표는 민족인민해방군이 추구한 민족해방과 민주주의회복이었다. 민주군이 날이 갈수록 강화된 반면 정부군은 약세였다. 민주군의 성원들은 2차세계대전당시 게릴라전의 경험이 풍부하고 대의명분까지 있는 반면, 정부군은 전쟁경험이 부족하고 비효율적이었다. 1946.7 정부군은 북부지방에서 대게릴라전을 전개하기 시작했고 10월부터 공식적으로 토벌작전을 벌이며 20일안에 승리하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토벌작전은 완전히 실패했다. 작전개시 1개월만에 민주군은 그리스산간지역남쪽까지 대규모군대를 파견하며 세력권을 넓혔다. 

1947 정부군은 영국군의 도움으로 <대비적전>교리를 개발하고 1947 남부지방에서 북부지방으로 이동하며 소탕·포위작전을 전개했으나 오히려 민주군에 된타격을 받았고 4월 전개한 총공세도 완전 실패했다. 그리스정부는 패배할수록 학살·테러에 광분하며 집단수용소를 설치하고 무자비하게 민주인사들과 민중들을 수감했다. 1947.5 내전2국면이 시작됐다. 이시기는 민주군대가 공세를 계속하는 한편, 미국이 직접적으로 개입하며 그리스는 사실상 미국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트루먼독트린이 발표된 후 1947.5 미군사고문단은 그리스주재미군사단의 일원으로 그리스에 도착했다. 미CIA는 대게릴라전·심문기술을 그리스장교들에게 훈련시키고 8월 미군교관들을 그리스정부군훈련소에 배치했다. 그들은 물자보급과 군사훈련을 감행했고 그리스정부군에 정보·기획도 제공했다. 군용화물·차량·식량등을 실은 미군선박이 1947.8 그리스항구에 도착해 보급이 시작됐다. 그럼에도 정부군은 민주군의 투쟁을 막을수 없었다. 민주군의 압도적우세로 인해 미국은 8월 민주군의 승리를 상정해 크레타섬에 망명정부를 수립할것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1947은 민주군의 전성기다. 민주군의 병력규모는 3월 1만3000여명에서 7월 2만3000여명으로 급성장했고 그리스전역에서 정보·보급담당하는 <세포>는 5만여명, 비정기적으로 민주군에 도움을 주는 인원은 25만여명에 이른것으로 추정된다. 6월 그리스공산당중앙위는 프랑스공산당대회에 참석해 <그리스자유민주정부>수립안을 내놓았다. 8월 민주군은 라디오방송을 통해 8.16 자유독립공화국이 수립됐고 자유그리스에서 지방선거가 실시될것을 알렸다. 12.24 민주군은 그리스임시정부수립을 선언했다. 12.25 알바니아국경선부근의 코니차전투에서 1300여명의 정부군이 수세에 몰렸으나 민주군은 공격을 제때 하지못해 1.4 패배하기도 했지만 이시기 민주군은 그리스의 4/5를 장악하며 내전의 승리를 확신했다. 

내전의 3·4국면과 민주군의 패배

1947.12 내전은 3국면으로 들어섰다. 이시기 미국의 지원과 대게릴라전이 본격화됐다. 1948.1~3 그리스여러지역에서 민주군과 정부군의 충돌이 발생했다. 봄 민주군은 남쪽까지 활동했고 레스보스·사모스·이카리아·크레타섬까지 세력을 확대했다. 1947~48겨울 정부군의 거듭된 패배로 인해 미군의 적극적개입이 대두됐다. 1948.1 미국무부는 그리스를 가지지못하면 <새로운세계대전이시작될것>이라며 <그리스에군대를파견할준비를하는것은기본>이라고 언급하며 미전투부대의 그리스파견을 시사했다. 트루먼미정부는 2차세계대전시기 가장 뛰어난 공격형전투지휘관중 1명인 제임스밴플리트를 합동군사고문단장겸 미군사단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948.2.24 밴플리트가 그리스에 들어온 뒤 9월말이 되자 그리스주둔육·해·공군파견대원은 450명에 이르렀고 이들중 2/3는 미원조사절단소속이었다. 영군사사절단은 훈련, 미군사사절단은 작전자문·정부군에대한보급을 담당했다. 밴플리트를 중심으로 한 미고문단은 정부군에 부대훈련·야전경험을 도입·소개하고 미국식군대로 재편했으며 정찰기술·첩보망·프락치이용, 상대군에 대한 탐지·고찰·섬멸전술등을 전수했다. 이같은 개입은 향후 미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면서 밴플리트는 정부군참모총장·그리스최고국방위원회를 능가하는 총사령관으로 행세했고 그리스정부는 미원조사절단에 의해 좌지우지됐다. 

한편 1948 스탈린에 대한 티토의 반발·분열은 민주군내의 분열을 촉진했다. 마르코스는 티토에 의존했고 자카리아디스는 스탈린에 충실했다. 한편 3월 마르코스는 민주군라디오방송을 통해 외세간섭 없는 <민주적삶의방식>이 보장된다면 평화협상을 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이시기 그리스정부인사에 대한 암살사건이 발생하며 이에 대한 보복으로 그리스정부는 1944이전 사형선고를 받은 진보인사 238명을 총살했고 839명에 사형선고를 내렸다. 1948.5기준 한강제수용소에는 1만5000여명이 수용돼 심문·고문을 당했다. 

1948.4.15 정부군은 보스포루스해협인근 루멜리산맥남중부지방을 소탕하기 위한 <여명의작전>을 개시했다. 정부군이 2만여명의 병력을 동원해 북·서·동쪽방향으로 공격하고 해·공군까지 동원해 봉쇄작전을 감행한 결과 5월 정부군이 이긴다. 밴플리트는 민주군근거지인 북부 그라모스에 대한 공격계획을 세웠다. 이는 최대규모의 공세작전이었다. 그리스공군은 6월 그라모스산악지대에 처음으로 미국의 네이팜탄을 쏟아부었다. 8월 마르코스는 3000여명의 부상자와 함께 알바니아로 탈출했다. 민주군은 병력을 재정비한 후 그라모스북서쪽 비치산악지역으로 다시 침투했다. 이전투는 10월중순이 돼서야 끝났는데 미군을 등에 업은 정부군이 병력·화력을 동원한 총공세를 했음에도 결정적승리를 거두지못했다. 1948~49 그리스육군신병들은 밴플리트의 훈련프로그램을 통해 훈련을 받았고 그리스정부는 민주군을 고립시키기 위해 그리스민중들을 강제로 소개했다. 

1948.10 내전은 4국면에 돌입했다. 1948 민주군은 정부군의 공세에 따른 피해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밴플리트는 최후의 소탕작전을 준비했다. 작전내용은 북부국경선을 따라 게릴라들을 봉쇄하기 위해 최소군대를 활용하는 한편, 펠로폰네소스를 소탕하고 북부지방에서 중부지방으로 휩쓸며 비치·그라모스의 민주군근거지를 파괴하고 전국적으로 민주군근거지를 소탕하는것이었다. 정부군은 1949.1 예정된 펠로폰네소스수색작전(비둘기작전)을 앞두고 민주군을 색출하는 한편 민간인마을을 약탈·방화·학살했다. 한편 자카리아디스와 마르코스간의 전략적충돌이 격화되는 와중에 1948.11 자카리아디스가 민주군의 실질적지도자로 나섰다. 친티토세력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마르코스가 1949.1 그리스공산당중앙위에 의해 민주군총사령관에서 해임됐다. 1949여름 민주군은 게릴라전에서 재래전으로 전환했다. 일각에선 이에 대해 근거지구축·민중동원·부대보호라는 3대원칙을 위반한 전략적오류라고 평가한다. 1949.9 유고슬라비아-그리스국경선이 티토에 의해 폐쇄되면서 유고슬라비아내 있던 민주군부대원 4000여명과 북부민주군주요집결지가 격리되면서 민주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다. 정부군16만병력은 8.10 비치·그라모스의 민주군주요방어거점을 기습하며 최후공격작전을 개시했다. 전투기가 그라모스에 8.24~29 무려 826회나 출격해 250t의 폭탄·로켓탄·네이팜탄을 쏟아부었다. 결국 자카리아디스는 8.29~30 알바니아영토로 퇴각했고 9월 민주군잔여병력 1000명은 불가리아로 넘어갔다. 10.16 민주군은 종전을 선언했고 트루먼은 11월 미의회에서 그리스정부군의 승리를 선언했다. 고립된 전투는 그후에도 여러차례 이뤄졌으나 내전은 사실상 종결됐다. 알바니아의 민주군병력은 소련으로 이주했다. 자료에 따르면 그리스정부는 1947~58 10만명이상을 집단수용소에 다른 작은 섬들로 유형을 보내며, 민주군과 민중들을 대량학살했다.

티토의 배신과 소련의 수정주의

그리스내전패배의 근본요인은 그리스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민주군의 전략적오류와 분열에 따른 역량약화에 의한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내 패권장악을 의도로 민주군내 분열을 촉진시키고 종국에는 민주군을 배신한 유고슬라비아 티토의 문제는 명백하다.

공개된 사실에 따르면 티토는 대국주의·팽창주의사상적문제에 의해 스탈린과 대립했다. 당초 그리스영토의 4/5나 해방시켰던 그리스공산당에 무리하게 개입하고 그내부를 분열시키며 궁극적으로 그리스까지 포괄한 <발칸연방>의 실현을 위해 스탈린에게 접근한 사실도 있다. 소련은 발칸반도의 패권장악에 골몰하며 그리스를 분열시키는 유고슬라비아를 코민포름에서 제명한다. 티토의 사상적문제는 코민포름에서 제명된 후 사회주의배신자로 전락한것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한편 스탈린은 일관되게 민족자결의 입장에서 그리스를 대했고 직·간접적으로 필요한 물자들을 성심껏 지원했는데 특히 미군이 그리스에 진주한 시기인 1948 유고슬라비아가 그리스민주군에 대한 지원을 끊자 소련은 알바니아를 통해 그리스민주군에 전쟁물자를 지원했다. 

1960 발표된 <81개공산주의자및노동자정당들의성명서>는 L.C.Y(유고슬라비아공산주의자동맹)가 맑스레닌주의를 한물간것으로 칭하며 배신한 후 L.C.Y지도자들은 반레닌주의적수정주의강령을 1957선언(사회주의나라들의공산주의자및노동자정당들의선언)에 대립시켰다고 폭로했다. 이어 L.C.Y는 미국과 다른 제국주의자들의 <원조>에 의존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유고민중의 영웅적투쟁을 통해 성취한 혁명적성과들을 잃게 될 위험에 빠뜨렸으며 유고슬라비아수정주의자들은 사회주의진영과 세계공산주의운동에 대항한 파괴공작을 수행했고 그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세력과 나라들의 통합에 피해를 주는 활동에 참여하고있다고 폭로했다. 

1963.9.26 발표된 중국의 인민일보·홍기편집국의 소련공산당중앙위공개서한에 대한 논평 <유고슬라비아는사회주의나라인가?>는 <81개공산주의자및노동자정당들의성명서>를 언급하며 유고슬라비아내부상황과 외부상황에 대한 구체적분석을 통해 유고슬라비아의 배신적행위를 폭로하고있다. 그중 유고슬라비아의 자본주의복고과정은 티토일당이 미제국주의에 굴종해가는 과정과 밀접하게 연결돼있다고 지적한다. 1963.1 미국·여타제국주의세력이 티토일당에 약54억6000만달러의 <원조>를 제공했고 미원조의 대부분은 1950이후에 제공됐다고 언급하고있다. 티토는 미국과 1951 상호방위지원협정·군사원조에관한협정·경제협력협정등을 통해 유고슬라비아를 자본주의화하고 전략적천연자원을 미국에 제공했으며 나아가 미군사사절단이 유고슬라비아군대를 직접 지휘할수 있도록 했다. 

논평은 국제무대에서 티토일당이 세계혁명을 사보타주하기 위한 미제국주의의 특수분견대라고 밝히며 대표적으로 그리스내전에 가한 티토의 해독적작용에 대해 언급하고있다. 1949.7.10 티토는 그리스민주군에 맞서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사이의 국경을 폐쇄한 동시에 그리스정부군이 후방에서 민주군을 공격할수 있게 유고슬라비아영토를 통과하는것을 허용하며 미·영제국주의자들에 부역했다. 더해 논평은 코리아전에 대해 <1950.9.6공표된연설에서당시(유고슬라비아)외상이었던카르델리는침략에저항한그곳인민들의정당한전쟁을뻔뻔스럽게비난하고미제국주의를옹호했다>고 지적한다. 1950.12유엔안보리연설에서 티토일당은 <코리아전에적극적으로개입>했다는 이유로 중국을 공격했고 중국·북에 대한 유엔의 금수조치를 찬성했다. 1950년대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미국의 <원조>는 사회주의를 배신한 대가다. 

논평은 발칸반도·동유럽에서의 티토의 만행을 계속 폭로하고있다. 티토일당은 알바니아사회주의에 대한 전복활동·무장도발을 감행했는데 1944·48·56·60 주된 반역사건을 획책했다. 1948~58 유고슬라비아·알바니아국경에서 실시한 무장도발은 470회가 넘는다. 특히 1960 티토일당과 그리스반동들은 지중해에서 미6함대와 공동으로 알바니아에 대한 무장공격을 계획했다. 뿐만아니라 1956.10 헝가리반란직후 티토는 반동적조치를 지지하는 서한을 발표했고 11.11 연설에서 반란을 <진보주의자들에의한저항>으로 호도했다. 티토는 유고슬라비아내부적으로도 맑스레닌주의자에 대한 학살·박해·수감을 대대적으로 감행하며 반역적본색을 드러냈다. 티토사후·소련붕괴후 미국·나토의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침략과 분열의 근원은 사회주의배신자인 티토·유고슬라비아수정주의자들에게 있다.

한편 1956 20차당대회에서 배신적인 스탈린격하운동을 감행한 흐루시쵸프의 소련공산당은 1955 베오그라드선언을 통해 유고슬라비아를 인정하더니 1963.7.14 공개서한에서 유고슬라비아를 <사회주의나라>, 티토의 당을 <형제의당>이라고 선언했다. 소련붕괴의 주원인이 수정주의적변질에 있다는것은 이미 밝혀진 역사적사실이다.

발칸반도의 복잡하고 간고한 혁명투쟁역사는 주체역량이 혁명의 승패를 좌우한다는 진리를 확인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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