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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아카이브항쟁의 기관차〈2022.11 항쟁의기관차〉 3차세계대전, 제국주의세력을 결정적으로 타격하는 반제전쟁

〈2022.11 항쟁의기관차〉 3차세계대전, 제국주의세력을 결정적으로 타격하는 반제전쟁

제국주의국가간 식민지쟁탈전

1차세계대전은 제국주의국가간 식민지쟁탈전이 극단에 치달으며 발발한 전쟁이다. 18세기산업혁명을 거치며 강대국이 된 영국은 아시아·아메리카·인도·아프리카등에 진출하며 침략·전쟁·약탈을 감행했다. 19세기말에는 영국이 주로 아프리카와 인도에 대한 식민지지배에 주력했는데 아프리카북쪽 이집트를 <보호령>으로 전락시키고 수에즈운하권을 얻었으며 아프리카남단의 <희망봉>에 진출해 이곳을 거점으로 남아프리카연방을 식민지화하려고 했다. 더해 인도의 콜카타, 아프리카의 카이로·케이프타운을 잇는 거대한 식민지라인인 3C정책을 통해 아프리카동해안·페르시아만·인도양·아라비아를 포괄한 지배·약탈을 계획했다. 

같은 시기 프랑스는 아프리카의 알제리·마다가스카르를 연결하는 횡단정책을 실시하며 1830 알제리점령, 1831 튀니지<보호국>화, 이집트·수단으로 진출, 아프리카횡단철도건설등을 감행했다. 

한편 1862.9 프로이센총리로 오토폰비스마르크가 임명됐다. 비스마르크는 강력한 무력을 중심으로 독일을 통일하고 프랑스를 패배시키며 1871.1 독일제국을 건설했다. 이를 바탕으로 1888 즉위한 빌헬름2세는 군비경쟁과 식민지쟁탈에 몰두했다. 독일은 식민지배의 기본정책으로 3B정책을 내세웠다. 이는 독일베를린·터키비잔티움·이라크바그다드를 의미하며 이를 통해 독일·동유럽·발칸·페르시아만을 연결하는 세력팽창을 추구했다. 

일본은 <정한론>을 앞세워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만주에까지 진출하려는 의도를 노골화하며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던 청과 1894.7 전쟁을 감행했고 1905.7 미국과 가쓰라-태프트밀약을 체결했다.

1901 미대통령이 된 테오도르루즈벨트는 <큰몽둥이정책>을 내세우며 중남미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했다.

제국주의국가들은 협상과 분쟁으로 식민지민중들의 의사는 배제한채 영토분할을 감행했다. 1884 베를린서아프리카회담은 비스마크르가 중심이 돼 감행된 아프리카분할에 관한 회담으로, 여기에 오헝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프랑스·독일·영국·이탈리아·러시아·미국·스페인·포르투갈·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벨기에·네덜란드·터키등이 참석했다. 그러나 식민지배를 위한 제국주의의 무한대한 탐욕은 점차 <협상>보단 군사적충돌·국지전을 불러왔다. 

1880.12 영국과 네덜란드계보어족사이의 보어전쟁, 1898.4 중남미쟁탈전인 미국·스페인전쟁, 9월 영국·프랑스가 아프리카에서 충돌한 파쇼다사건, 1904.2 조선식민지배를 위한 러·일전쟁등이 대표적이다.

제국주의국가들은 군사블록을 형성하고 군비경쟁을 심화하며 전쟁에로 치달았다. 독일은 1879 오헝제국, 1881 이탈리아와 각각 동맹을 맺었으며 1882.5 5년기한으로 3국동맹을 체결했다. 한편 1892 러시아·프랑스동맹, 1904 영국·프랑스협상이 체결됐다. 1907 프랑스의 중재로 영국·러시아가 식민지분쟁에서 서로의 세력범위를 확정한 협상을 맺었고 같은해 3국은 독일의 위협에 대항하고 영토확장을 저지하는데 협력하기로 결정하며 3국협상이 체결됐다.

1905 영국이 배수량1만7900t의 드레드노트전함을 만들기 시작하며 다른 나라들도 경쟁적으로 전함건조에 뛰어들었다. 육군병력에서도 1880~1913 독일상비군은 42만명에서 87만명으로, 프랑스는 50만명에서 80만명으로, 러시아는 80만명에서 140만명으로, 오헝제국은 27만명에서 80만명으로 대폭 증가했다. 

1차세계대전과 사회주의국가의 등장

1차세계대전의 근본원인은 제국주의국가간 식민지쟁탈전의 격화며 직접적계기는 사라예보의 총성이다. 당시 유럽의 화약고는 발칸반도였다. 발칸반도는 지중해·유럽·아시아·아프리카가 만나는 지점으로 전략적가치가 높은 곳이었다. 대부분은 슬라브민족이었던 이지역은 14세기부터 오스만(오스만튀르크제국)의 식민통치를 받아왔기에 독립을 갈망해왔다. 19세기 들어 세르비아·불가리아·그리스등이 연이어 독립을 선포했으나 1908.10 오헝제국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점령하며 갈등은 심화됐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려고 했던 세르비아가 오헝제국에 격분했고 세르비아의 동맹이자 같은 슬라브국가인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지지했다. 반해 독일은 오헝제국을 지지하면서 위기는 증폭됐다. 1909.3 독일이 러시아에 최후통첩을 보내자 러·일전쟁의 여파를 회복하지못한 러시아는 굴복했고 연쇄적으로 세르비아까지 물러서자 세르비아내 반오헝제국조직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민족주의비밀단체와 손잡고 오헝제국의 페르디난트대공암살을 결의한다. 1914.6 페르디난트는 결국 암살되고 이사건이 도화선이 돼 7.28 오헝제국이 세르비아를 침공하며 1차세계대전이 시작됐다. 

유럽에는 3개전선이 형성됐다. 프랑스접경지대의 서부전선에서 영국·프랑스-독일이 싸웠다. 동유럽과 러시아일부지역을 포괄한 동부전선에서 러시아-독일·오스트리아가 싸웠다. 발칸반도를 중심으로 형성된 남부전선에서 러시아·세르비아-오헝제국이 싸웠다. 1차대전의 승패는 서부·동부전선에서 결정됐다. 

1914.8 독일주력부대는 벨기에를 침략하고 곧바로 프랑스북부를 습격하려고 했다. 독일군대는 벨기에군대, 영국·프랑스연합군을 물리치며 프랑스파리인근까지 진입했으나 파리북부 마흔강부근에서 프랑스군의 저항을 이겨내지못하고 후퇴했다. 한편 동부전선에서는 8월중·하순경부터 러시아군이 동프로이센에 진입했다. 쌍방군대의 150만명이 참여한 마흔전투에서 독일이 패배한 이유는 프랑스의 강력한 저항에 더해 독일군전력이 동부전선으로 분산됐기에 그렇다. 쌍방은 진지전으로 넘어가며 전쟁은 지연됐는데, 그럴수록 동부전선·서부전선사이에 있는 독일은 불리해질수밖에 없었다. 

동부전선은 보다 복잡하게 진행됐다. 러시아는 동프로이센·폴란드중부지역등지의 거듭된 전투에서 독일에 패배했다. 이에 러시아를 손쉽게 이길것이라 예상한 오헝제국이 러시아를 공격했으나 러시아가 맹렬히 저항했다. 독일·오헝제국과 러시아간 접전이 계속되며 진지전으로 넘어갔다. 한편 오헝제국은 세르비아를 여러차례 공격했지만 번번이 패배하며 발칸지역을 확실하게 장악하지못했다. 이에 독일은 오스만을 전쟁에 끌어들였고, 오스만은 독일에게 1억프랑의 차관을 받고 러시아를 공격하다 캅카스전투에서 러시아에 의해 전멸됐다. 

1915 서부전선에서는 장기전이 시작됐고 독일은 우선 동부전선에 집중하는것으로 방향을 바꾼다. 동부전선에 모인 독일·오헝제국의 병력은 130만명, 러시아병력은 175만명이었다. 당시 러시아군의 1/3은 무기도 제대로 지급받지못했고 대부분이 4주훈련만 거친 신병이었으며 각부대 포탄도 매우 부족한, 열악한 상황이었다. 러시아는 거듭 패배해 독일·오헝제국군대는 8월 폴란드전체를 점령했고 러시아군75만명은 독일의 포로가 된다. 여기에 9월 불가리아가 동맹국가입을 선포한 후 10월 오헝제국과 함께 세르비아를 총공격했고 동맹국은 세르비아전역을 점령하며 발칸지역방어를 했던 러시아에 큰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러시아는 끝내 투항하지않았고 1915 리가만에서 드네프르강까지 1000여km에 걸쳐 동부전선이 형성됐다. 1916 전쟁의 중심이 서부전선으로 이동했다. 프랑스북동부에서 1916 2차례 거대한 전투가 발발한다. 2월 베흐됭전투와 7월 솜강전투다. 베흐됭전투에서 독일군은 대포1000여문·16.5구경유탄포·유산탄등 살상무기들을 투입해 연합군전멸을 시도했다. 독일은 초반 승기를 잡는듯했으나 프랑스가 후방지원을 바탕으로 장기전에 돌입하면서 독일은 결국 베흐됭요새를 함락시킬수 없었다. 베흐됭전투가 진행중이던 7월 솜강전투가 개전돼 11월까지 전개됐다. 2개전투에서 쌍방은 200만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다. 더해 6월 유틀란트해전에서 독일해군이 패배한다. 협상국은 서부전선을 방어했고 전황은 독일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한편 1차세계대전으로 러시아내 짜르체제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고 혁명세력이 성장하면서 1917 2월·10월혁명이 성공하며 세계최초의 사회주의국가가 등장한다. 2국제당의 수정주의적오류에 맞서 1차세계대전을 제국주의전쟁으로 정의한 블라지미르레닌은 <제국주의전쟁을국내전쟁으로전환시켜야한다>는 노선을 제시한다. 1917.2 러시아볼셰비키뻬쩨르부르그위원회는 봉기를 일으켜 짜르전제정권을 타도하라고 호소했고 이에 러시아노동자·민중·병사가 호응하며 노동자·병사대표소비에트를 건립했다. 뻬쩨르부르그봉기는 전국적규모의 혁명으로 발전했고 러시아제정은 붕괴됐다. 제국주의국가내 민중들의 반전운동도 고조됐다. 2월혁명의 승리로 레닌의 사상·전략의 과학성이 실천적으로 입증됐다. 

레닌의 러시아는 제국주의전쟁에서 단호히 물러섰다. 사회주의국가의 등장으로 각국의 혁명운동은 전례없이 앙양되며 1차세계대전종전에 결정적영향을 미친다. 1918.10 오헝제국이 와해됐고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가 독립을 선포했고 1918.11 독일 킬군항에서 독일해군의 봉기를 시작으로 독일전역에 걸쳐 항쟁이 일어났다. 결국 독일황제가 퇴위했고 11.11 독일은 투항을 선포하며 1차세계대전이 종전한다. 

대공황과 파시즘

1929 대공황이 발생했다. 1차세계대전당시 무기판매자였던 미국은 종전후 막대한 경제적이득을 챙긴 유일한 나라로서, 전세계부는 미국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재편됐다. 1920년대중반 미국내 통화완화정책으로 투기광풍이 불었다. 1928부터 통화유통이 조작됐고 1929 미증시가 붕괴되며 상대적과잉생산경제공황이 발생했다. 1929 457억달러에 달했던 통화량이 1933 300억달러로 30%나 줄어들며 디플레이션이 심화됐고 그결과 미국내 실업률은 37.6%까지 치솟았다. 유럽의 여러나라들은 미국의 채무국이었기에 대공황의 충격은 전세계적으로 확산됐다. 

한편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정권이었던 에버트정권은 칼리프크네히트와 로자룩셈부르크를 학살하며 독일공산당에 탄압의 예봉을 집중했다. 1차세계대전패전에 더해 대공황까지 겹치며 사민주의정권은 붕괴되고 그틈에 1921.6 나치당당수였던 아돌프히틀러가 1933 독일수상에 오르더니 1934 내각을 구성해 국가수상에 등극한다. 한편 미국중심의 제국주의국가들은 1924도스플랜·1929영플랜을 통해 독일배상금을 2차례 조정하고 히틀러나치즘에 금전적지원을 하며 독일나치즘을 부추겼다. 1938.3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독일은 이탈리아와 함께 스페인파쇼세력의 쿠데타를 지원하며 무력간섭을 했다.

한편 이탈리아의 베니토무솔리니는 1919.3 이탈리아전투자단을 결성했고 1921.11 국민파시스트당으로 조직명을 변경한 후 파시스트강령을 채택한다. 1920.11 무장한 파시스트행동대 흑셔츠단이 공산당·사회당등을 습격·파괴하고 성원들을 학살했다. 1922 무솔리니는 쿠데타를 예고하며 정권을 탈취한 후 공산주의자·진보주의자들을 체포·투옥했다. 미국은 무솔리니파쇼체제를 전적으로 지지했고 모건상회는 1억4200만달러의 차관까지 제공했다. 이탈리아파시즘은 미·영·프제국주의국가의 불간섭정책에 의해 정치적으로 뒷받침돼 1936 에티오피아를 완전강점하고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이탈리아령소말리아를 통합해 이탈리아령동부아프리카를 조작해 식민지화했다. 

일본은 1920~21 경제공황위기에 빠지며 파쇼화가 심화됐다. 1923.9 간토대지진을 반정부여론을 바꾸기 위한 계기로 삼으며 재일조선인에 대한 야수적학살을 감행했다. 1929 대공황으로 계급모순이 심화되자 일본은 침략전쟁·파쇼통치강화를 정치·경제적위기의 출로로 삼았다. 1931.9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2.3 만주국을 조작하며 대륙침략의도를 더욱 노골화했고 1937.7 노구교사건을 일으키며 전쟁을 본격화했다. 급기야 1940 일본·만주국·중국·동아시아일부를 아우르는 <대동아>건설을 내세웠다.

파시스트전선은 독·이·일의 군사블록형성을 통해 심화됐다. 1936.10 독·이, 11월 독·일사이 각각 조약이 체결됐다. 

2차세계대전발발의 직접적원인은 미국·영국·프랑스의 배신적인 뮌헨조약체결에 있다. 1938.9 영·프는 독·이와 뮌헨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분할·몇개국경지역독일할양을 결정했다. 미국은 뮌헨협정을 사실상 찬성했다. 미·영·프의 의도는 독일의 해외침략방향을 서부가 아닌 동부로 향하게 해 소련사회주의국가와의 전쟁을 통해 사회주의를 붕괴시키기 위한것이었다. 미·영·프의 <양보정책>은 파시즘의 발호를 부추겼고 그결과 1939.3 독일은 영·프의 동의없이 체코슬로바키아전역을 점령하고 폴란드침략에 들어갔다. 1939.8 모스크바3국(소·영·프)군사대표교섭을 통해 영·프는 최종적으로 소련과 연합할 의사가 없다는것이 확인됐고 이시기 영국은 독일측과 비밀리 교섭해 불가침조약·세력권분할협정체결을 제안했다. 일련의 상황은 소련에 매우 불리하게 돌아가고있었다. 소련은 이를 타개하기 위한 전술적조치로 1939.8 소·독불가침조약을 체결한다. 

2차세계대전과 세계반파쇼전선의 승리

1939.9.1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하며 전쟁이 시작됐다. 영·프는 9.3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으나 사실상 전쟁에 나서지않았다. 전선을 동부에 집중하기 위한 의도였으나 결과적으로 독일의 서진을 자초하는 결과를 낳았다. 독일은 1940.4 덴마크·노르웨이, 5월 벨기에·룩셈부르크·네덜란드를 점령하며 북서부지역을 파죽지세로 휩쓸었다. 6월 이탈리아는 프랑스남부를 침공했다. 프랑스북부는 독일이 점령하고 남부는 친독괴뢰비시정권이 수립됐다. 7월에는 영국에 대한 공습을 시작했다. 이탈리아는 1940.10 그리스를 침공했으나 그리스·영국의 협공으로 인해 패배했다. 스페인은 이패배를 확인하면서 중립을 선택했고 이로써 스페인과 합작해 대서양과 지중해의 경계에 위치한 지브롤터해협을 장악하려고 했던 히틀러의 계획이 무산됐다. 가열하게 저항한 그리스는 결국 독일에 의해 점령된다. 

일본은 1937.7~1940 중국의 화북점령지역에서만 무려 109차례에 걸쳐 항일세력소탕작전을 벌였으나 중공산당의 영도를 받은 팔로군이 맹렬히 맞서 일본부대들을 전멸시켰다. 한편 1938 하싼호사건, 1939 노몬한사건을 일으키며 소련침략을 단행했고 1940.9 프랑스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를 점령했다. 1940.9 독·이·일은 3국동맹을 체결해 <유럽신질서>·<대동아공영권>을 망상했다. 

서·북부유럽을 점령한 독일은 1941.6 소련을 기습공격했다. 독일의 당초계획은 겨울까지 전쟁을 종결하는것이었다. 소련은 전시체제로 빠르게 전환하고 소련지도자 이오시프스탈린은 1941.7 총동원계획을 발표했다. 소련공산당은 <모든것을전선을위하여!모든것을승리를위하여!>구호를 내세웠다. 독일은 소련공격이후 약1달간 파죽지세로 소련땅을 점령했으나 소련민중들은 1941.8 스몰렌스크전투를 2개월간이나 전개하며 독일군의 속도를 지체시켰다. 이어 7·9월 레닌그라드전투·모스크바전투방어전을 영웅적으로 전개하며 독일의 기세를 꺾었다. 1941.11 10월혁명24주년기념 붉은군대열병식에서 스탈린은 전쟁의 성격을 <해방전쟁>·<정의의전쟁>으로 정의했다. 1941.11 소련유럽지역대부분이 독일에 의해 점령됐지만 이지역은 당을 중심으로 유격대가 조직돼 파괴활동·유격전을 전개하며 독일군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1942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 소련은 33만명이상의 파쇼부대를 포위·섬멸해 대승을 거두며 파시스트블록에 타격을 가하고 소련침략계획을 분쇄했다. 1943 역사상 최대규모 기갑전인 쿠르스크전투에서 소련군의 승리로 파쇼독일은 전략적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한편 소련의 고군분투에도 사실상 전쟁에 개입하지않던 미·영은 1942.11 소련과 함께 파시스트블록분쇄를 위한 군사·경제자원동원선언을 체결했다. 1943 미·영은 유럽에 서부전선을 구축한다는 협정을 체결했다. 1943.11 소·미·영정상은 테헤란회담을 개최해 3국협력선언문을 채택하고 서부전선구축에 대해 논의했다. 서부전선은 1943에도 구축되지않아 1944.5.1이전에 구축하기로 결정했으나 이조차 지켜지지않았다. 결국 소련의 승기가 확실해진 전쟁후반기인 1944.6이 돼서야 노르망디상륙작전을 벌이며 서부전선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소련이 동부전선에서 거듭 승리하며 소련·동부유럽을 해방시키자 독일은 작전을 바꿔 1945.1 서부전선에 공세를 가했다. 1945.4 소련은 베를린작전을 개시했고 4.30 독일국회의사당안에 붉은기를 내걸었다. 1945.5.8 독일은 무조건적항복문서에 서명했다. 

한편 1941.12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중국화북지역에 대한 식민통치를 강화하며 광란적인 3광정책을 실시하고 세균전까지 벌였다. 1941~42 일본군은 화북해방구소탕작전에 1000명

이상의 병력을 174차례나 동원했고, 1942.5.1 대소탕에서만 중국공산당간부·민중을 5만명이나 학살했다. 그럼에도 중국공산당과 민중들의 저항을 꺾지못했다. 중공산당은 혁명역량을 강화하며 거듭 전투를 전개해 해방구를 확대했다. 1945봄 해방구는 화북·화중·화남까지 두루 분포됐다. 

1930년대중후반 대규모군사작전을 여러차례 전개하며 일본군을 상대로 거듭 승리를 거둔 조선인민혁명군은 1940년대 소부대·소조들을 편성해 조선·만주각지에서 매복전·습격전을 벌이며 일본군을 연속타격하고 조선민중들을 항일투쟁에로 불러일으켰다. 1940년대전반기에는 조국해방3대노선으로 조선인민혁명군의총공격·전인민적봉기·배후연합작전을 제시했다. 조선인민혁명군을 따르는 여러조직들은 곳곳에서 파괴활동·유격전을 전개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1945.5 독일의 무조건항복이후 최후공격작전준비를 다그쳐 8.9 조국해방최후공격작전명령을 내렸다. 한편 일본의 패배가 확정됐음에도 미국은 8.6·9 일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며 아시아의 해방을 가로막고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음모했다. 

2차세계대전은 반파쇼전선대 파쇼전선의 전쟁이었다. 1935.8 코민테른7차대회에선 <파시즘의공세와노동계급의반파쇼투쟁에서코민테른의과업>을 채택하며 파쇼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광범위한 반파쇼인민전선창설을 도모했다. 소련은 제국주의국가인 미·영의 배신적행위에도 불구하고 반파쇼전선형성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고 제국주의국가내 공동주의세력·노동운동세력은 민중들을 반파쇼투쟁에 불러일으켰다. 

반파쇼인민전선형성을 위한 코민테른의 노력은 1943.5 주동적해산을 통해도 확인된다. 코민테른은 각나라들의 공산당·진보정당의 혁명역량이 충분히 장성해 국제당의 중앙집권적영도 없이도 혁명이 발전할수 있다는 확신과 함께 반파쇼연합이 이념과 제도를 초월해 광범위하게 형성되는데 코민테른의 존재가 걸림돌이 된다는 판단으로 주동적해산을 결정했다. 

한편 파쇼독일의 식민지로 전락한 서부유럽에서는 레지스탕스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됐는데 대표적인 반파쇼역량으로 프랑스레지스탕스세력이 있다. 프랑스공산당은 1941.7 주도적으로 NF(민족전선)을 결성하고 FTPF(의용군과파르티잔)군대를 조직하며 군사활동을 전개했다. 1942 전국적무장봉기를 위해 11월 프랑스공산당과 드골세력간에 공동행동에관한협정을 체결했으며 1943.5 CNR(전국레지스탕스평의회)을 결성하고 1944 50만명의 FFI(국내프랑스군)로 세력을 통합했다. 

만주를 중심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조선인민혁명군은 1930년대 중국부대와의 동북항일연군을 조직하고 조선민족주의세력·중국민족주의세력과의 통일전선형성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다. 1936.5.5 반일민족통일전선체인 조국광복회를 결성한다. 한편 1940 조선인민혁명군은 소할바령회의를 통해 대부대작전에서 소부대작전으로 이행을 결정했다. 이는 인민혁명군의 역량보존·축적을 위한 조치이자 소련의 아시아에서의 정세완화정책을 반영한 국제주의적조치였다. 1942.7 조선인민혁명군은 소련·중국측과 국제연합군을 창설해 국제반제역량과의 공동투쟁을 강화하며 2차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2차세계대전에서 반파쇼인민전선이 승리한 결과 파쇼세력은 격멸됐다. 1차대전결과 러시아사회주의가 등장했다면 2차대전결과 동부유럽·아시아등에 사회주의정권이 들어서고 식민지·반식민지나라들은 민족해방을 이룩했으며 전세계적으로 사회주의·공동주의가 확산됐다.

우크라이나전과 3차세계전쟁의 시작

2022.2.24 우크라이나전이 발발했다. 러시아측은 우크리아전을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동진반대·반나치·주민보호를 목적으로 한 우크라이나특수군사작전이라고 정의하고있다. 1949 조직된 나토는 유럽의 반소침략적군사동맹으로 출범했다. 소련붕괴후 반러침략적군사동맹으로 전변된 나토는 동유럽국가들까지 나토에 가입시키고 러시아주변지역에 나토군을 주둔시켰으며 반러군사연습을 전개하며 러시아침략책동을 심화시켰다.

한편 1920년대말 우크라이나에 형성된 나치핵심들을 2차세계대전종전후 구제해 관리하며 반소선전에 이용해온 미국은 1991.12 소련붕괴후 신나치세력을 우크라이나에 투입하고 우크라이나신흥재벌과 결탁해 신나치세력을 육성하며 우크라이나내 친미신나치세력을 형성한다. 2004 <오렌지혁명>과 2014 유로마이단쿠데타는 미국과 신나치세력이 합작해 공작해온 결과물이다. 신나치민병대의 민간인학살로 인해 돈바스에서만 8년동안 1만4000명이나 사망하고 학교를 비롯한 공공시설은 폭격으로 인해 파괴됐다. 신나치민병대의 가장 악명높은 아조프민병대는 우크라이나신나치정권하에 아조프연대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블라지미르푸틴러대통령은 2022.2.21 전쟁시작 3일전에 러시아·우크라이나간 뗄수 없는 역사적관계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우크라이나를 미국의 <꼭두각시체제의식민지>라고 지적했고 2021.3 우크라이나정부가 크림반도·돈바스지역에 테러집단을 조직하고 러시아와의 대결에서 외세의 군사적지원을 받을것에 대해 결정하며 대러시아침략계획을 세운 사실을 폭로했다. 이같은 사실은 우크라이나특수군사작전이 해방전쟁이자 예방전쟁이며, 실제는 미제침략세력·나토를 상대로 한 반제전쟁임을 보여준다.

한편 미국은 우크라이나전을 하이브리드전·대리전·재래전으로 감행하고있다. 하이브리드전은 정치·경제·정보·기타비군사적조치등 다양한 요소를 활용해 상대를 공격하는 전쟁형태다. 2022.3 러시아측은 <그들은우리에게진정한하이브리드전,즉전면전을선포했다>고 미국·나토를 규탄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미제침략세력의 꼭두각시이자 신나치세력 볼로디미르젤렌스키우크라이나대통령을 <구국의영웅>으로 띄우면서 전쟁을 대리전으로 전개하는 동시에 우크라이나에 천문학적규모의 침략전쟁물자를 투입하고 세계언론들을 동원해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이 <부정의한침략전쟁>인것처럼 완전히 호도했다.

현재 미제침략세력은 우크라이나신나치세력에게 계속 전쟁물자를 투입하고 나토군을 동원해 대러침략전쟁연습을 감행하면서 현재 이전쟁을 장기전으로 끌어가고있다. 한편 2022.9 우크라이나의 도네츠크·루간스크·헤르손·자포리자지역의 러시아와의 합병을 위한 주민투표는 찬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푸틴은 9.30 영토합병조약체결식을 갖고 <우리는우리의모든힘과모든수단을동원해우리의땅을지킬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로써 이지역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공격은 러시아본토에 대한 공격과 같다. 특수군사작전이 전쟁으로 전화되며 빠른 종전을 위한 전술핵무기사용가능성도 높아진다. 2022.9 부분동원령을 개시한 푸틴은 10.19 4개주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임박한 남코리아전과 대만전

미제침략세력이 우크라이나전에 이어 남코리아전·대만전을 준비하며 세계적규모의 착취·약탈을 심화하고있다. 미연준(미연방준비제도 Fed)이 9월까지 3회연속 자이언트스텝으로 빠르게, 대폭 금리를 인상하는 동시에 우크라이나전을 이유삼아 에너지가·곡물가등이 치솟고있다. 다른 한켠으로 우크라이나전에 무기를 쏟아붓고 전시위기의식을 자극해 친미국가들에 전쟁무기를 대거 팔아넘기며 금융자본집단과 산군복합체만이 비대해지고있다.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앞세워 정치적지배·경제적약탈을 심화하는 제국주의침략세력의 수법이 오늘날 하이브리드전·대리전으로 형태만 바꾼채 되풀이되는 형국이다. 

미국은 남코리아의 윤석열·군부친미호전세력과 대만의 차이잉원반중분리주의세력을 앞세우고 일본을 미군전초기지화하면서 남코리아전·대만전을 우크라이나전과 마찬가지로 대리전·재래전·장기전으로 준비하고있다. 그러나 미국의 의도와는 달리 남코리아전·대만전은 전격전·핵전·초단기전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대만전의 양상은 8.2 미하원의장 낸시펠로시의 대만방문을 계기로 중국이 실시한 대만포위군사훈련을 통해 확인된다. 8.4 시작된 중국의 군사훈련에는 항공모함을 비롯한 각종무력들을 총동원해 미·일지원을 차단하고 주남미군의 개입을 봉쇄하는 각종군사훈련들이 실시됐다. 한전문가는 이훈련은 대만해방전쟁예행연습이라고 칭했다. 72시간동안 진행된 이연습은 중국군이 실전에서 72시간만에 대만을 정리하겠다는 의미다.

한편 9.15 중·러정상회담에서 반미전략을 재확인하며 중·러군사적협동관계를 공고히 했다. 우크라이나전직전인 2022.2 베이징에서 푸틴과 시진핑의 정상회담후 7개월만에, 대만전이 예고되는 중에 진행된 회담이다.

20차중국공산당대회는 첫핵실험성공기념일인 10.16에 맞춰 진행됐다. 당대회개막식업무보고에서 시진핑중국국가주석은 <무력사용포기를결코약속하지않을것이고모든필요한조치를취할수있는선택지를가지고있을것>·<조국의완전한통일은반드시실현될수있다>고 선언했다.

남코리아전이 임박했다는것은 2022.9부터 진행된 각종북침핵전쟁연습과 이에 대응한 북의 군사행동을 통해 확인된다. 9.23 5여년만에 부산작전기지에 입항한 로널드레이건핵항모전단은 미남합동군사연습을 전개한 후 이어 일해상자위대를 동원해 독도인근에서 미·일·남대잠수함연습을 실시했다. 이에 북이 9.25·28·29 단거리탄도미사일들을 연속적으로 발사했다. 10.4 미남공군정밀폭격연습, 5일 레이건핵항모회항과 미남지대지미사일대응사격, 6일 미·일·남미사일연습, 7일 미남핵항모호송연습이 감행됐다. 이사이 북은 6일 군용기12대, 8일 150여대를 각각 동원해 편대비행훈련을 전개했다. 뿐만아니라 13~14일새벽 군용기비행·대규모포병사격, 14일오후 동·서해안에서 동시다발적포사격을 실시했다. 북의 미사일·군용기·포를 동원한 전격적이고 입체적인 군사대응행동은 실제 남코리아전이 발발할 경우 북의 대응방식을 보여준다.

한편 북·중·러의 전략전술적협동관계가 갈수록 공고화되고있다는것은 여러방면으로 확인된다. 8.1 이영길북국방상은 중국인민해방군창건95돌즈음에 중국무위원국방부장에게 축전을 통해 <전략전술적협동작전>을 강조했으며 8.3 북외무성은 대만문제에 대한 외부세력의 간섭행위에 대한 규탄배격의 메시지를 발표했다. 8.15 김정은위원장과 푸틴러대통령은 축전을 주고 받으며 <두나라사이의전략전술적협동과지지연대는새로운높은단계>·<종합적이며건설적인쌍무관계를계속확대해나갈것>을 강조했다. 한편 북은 중지도부의 베이다이허회의가 끝나자 8.17 사정거리가 오키나와미군기지까지 포괄하는 순항미사일발사시험을 전개했으며 중·러정상회담시기즈음인 9.8 <국가핵무력정책>법화를 천명했다.

남코리아전과 대만전이 본격화되면 역사는 우크라이나전발발시점인 2022.2.24을 3차세계대전으로 기록할것이다. 3차세계대전은 미제침략세력의 격멸을 위해 북중심으로 사회주의중국과 자본주의러시아가 전략전술적으로 협동해 전개하는 반제전쟁이다. 북·중·러의 정치·군사적위력강화와 전략전술적협동, 미제침략세력을 위시한 제국주의연합세력의 취약성과 분열상은 반제세력의 필승을 가늠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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