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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 항쟁의기관차〉 미양당체계의 형성과 권력교체의 역사

미국식정당과 미국식정치의 한계

정치란 사회를 유지·발전시킬데 대한 요구에 의해 발생·발전하는 사회적현상이며 정당은 같은 정치적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정치조직이다. 부르주아세력과 노동자·민중간의 적대적모순관계가 기본인 자본주의사회에서의 정치는 지배계급의 독점물로, 민중을 지배하며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2차세계대전의 원인중 하나인 전체주의의 대두와 그에 맞선 반파쇼인민전선의 승리는 자본주의체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2차세계대전후 부르주아세력은 국내적으로는 국가독점자본주의, 국외적으로는 현대제국주의로 변모했다. 금융자본집단등 국가독점자본세력은 빈익빈부익부 99대1의 하상양극화를 사민주의당대보수주의당의 좌우양극체계로 기만했다. 부르주아양당체계에 의해 부르주아세력이 안정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공고히 유지해온 대표적인 나라가 미국이다. 미국의 복잡한 선거제도·승자독식제는 민심과 다른 선거결과로 진보세력의 정치적진출을 가로막는데 이용됐다. 미국의 제국주의적본색이 <세계구원자>라는 이미지로 윤색됐듯이 미국의 반민중성은 미국식민주주의란 미명하에 세계민중들에게 주입됐다.

최근 미대선으로 인해 미국식민주주의·부르주아양당체계의 허구성이 드러나고있다. 전대미문의 불법선거정황으로 미대선직후 공화당·민주당의 권력쟁투가 남북전쟁급으로 고조되고있다. 미대통령 트럼프의 측근들은 대선결과에 불복하며 법률전·의회전등 평화적방법을 쓰는 동시에 미역사상 있어왔던 계엄령등 비평화적방법을 준비하고있다. 역사적으로 불법·부정선거는 이번만이 아니며 불법성으로 인해 미대통령이 사임한 경우도 있었지만 이번과 같이 부정선거증거가 너무나 명백해 대선결과에 불복하는 경우는 처음이다. 물론 이번사건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공화당·민주당세력이 번갈아가며 권력을 장악해온 미국의 부르주아양당체계가 무너지는 상황은 아니다. 부르주아정당으로서 비적대적모순관계인 공화당·민주당과 그배후세력인 금융자본집단은 양당체계가 가장 안정적으로 부르주아정권을 유지할수 있는 체계라는것을 역사적으로 잘 알고있다. 다만 이번사건으로 미국식민주주의·부르주아양당체계의 반민중성은 결정적으로 폭로될수밖에 없게 됐다.

<건국의아버지들>로부터 부정당한 민주주의

1775 미독립전쟁이 있기전부터 아직 정당형태가 아닌 정치적파벌이 크게 둘로 나뉘어있었다. 2개의 정치적파벌들은 영국의 찰스2세시대 왕위계승문제를 시작으로 형성된 토리당·휘그당의 명칭을 본따 영국왕을 추종하는 왕당파를 토리파, 그렇지않은 세력을 휘그파라 부르며 서로 비난했다. 1776 독립선언서 채택후 토리파중 8만명은 캐나다로 추방됐으며 추방되지않은 수십만은 상당한 부와 높은 교육수준을 바탕으로 이후 연방파로 변모했다. 1786 매사추세츠에서 일어난 셰이즈의 봉기로 인해 중앙정부강화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1787 제헌회의가 열렸다. 오늘날 <건국의아버지들>이라고 불리는 제헌회의구성원들은 조지워싱턴같이 노예·농장·대토지소유자, 기업가, 전문직업인등이었다. 제헌회의의 한구성원은 민주정치에 대해 <장님에게색깔을선택하게하는것과같이어리석은일>이라고 비난했다. 이들은 민중이 중앙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것을 방지하기 위해 선거인단에 의해 대통령을 선출하게 했으며 재산을 소유한 성인남성에게만 선거인단선출을 위한 투표권을 부여했다. 정당정치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던 <건국의아버지들>은 헌법에 정당조직을 위한 어떤 조항도 제정하지않았다. 헌법초안에 대한 비준절차과정에서 정치 세력은 연방파와 반연방파로 분열됐다. 헌법지지자들인 연방파는 강력한 연방·중앙정부를 추구했다. 연방파는 보수적이며 중앙집권을 중시했고 과거 온건한 왕당파를 포함하고있었다. 반연방파는 중앙정부에 의한 주(州)권리의 침해를 우려했다. 이들은 자유주의적이며 지방분권을 중시했고 스스로 미국혁명정신을 계승했다고 믿었다. 경제적토대에서도 두 세력은 차이가 있었다. 연방파가 대토지소유자중심의 정치세력이라면 반연방파는 소부르주아중심의 정치세력이었다. 연방파·반연방파는 둘다 부르주아정치세력이지만 각기 다른 목적을 중심으로 정치조직을 구성했다는 점에서 양당제도와 형식상 유사했다. 그러나 헌법비준을 중심으로 일정기간 나타난 일시적인 정치집단이었다.

1789 조지워싱턴이 선거인단의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무소속이었으나 연방대법원·주요관직에 연방파를 임명하는등 경제지반이나 정치사상에서 연방파에 가까웠다. 반면 내각의 핵심인물인 국무장관 토마스제퍼슨은 반연방파, 재무장관 알렉산더해밀턴은 연방파출신이었다. 해밀턴은 1789 의회가 관세법을 통과시키게 하고 1790 의회를 통해 연방정부의 채무를 완화시켰으며 연방정부자금을 취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연방은행설립을 제안했다. 해밀턴에 반대한 반연방파하원의원들은 제퍼슨을 중심으로 1792 민주공화당(Democratic-Republican Party)을 형성했다. 제퍼슨공화당(민주공화당)이 상대적으로 농업을 선호하며 남부·남서부를 지지기반으로 한다면 해밀턴연방파는 상업·대기업에 우호적이며 중부대서양해안지역에 지지세력이 집중됐다. 제퍼슨공화당은 오늘날 주로 민주당에 계승됐다. 공화당도 자신들의 뿌리를 제퍼슨공화당으로 삼고있지만 성격은 해밀턴연방파에 가깝다.

1797 2대대통령으로 <연방주의자> 존애덤스가 선출됐다. 당시 2위득표자가 부통령에 임명되는 제도에 의해 부통령은 다른당의 제퍼슨이 선출됐다. 3표차로 대통령이 된 애덤스는 정치력이 떨어질수밖에 없었다. 애덤스집권기간내내 <연방주의자>와 <반연방주의자>간의 충돌이 지속됐다. 1800대선에서 제퍼슨이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1800대선은 하원에서 대통령이 결정된 최초의 선거였다. 선거인은 한사람당2표를 가지고있었는데 같은 민주공화당출신이자 당내에서 부통령으로 지목돼 출마한 애런버와 득표에서 73표로 공동1위를 한것이다. 결국 해밀턴이 같은주출신 버를 견제해 제퍼슨이 당선됐다. 1804 제정된 수정헌법12조에 의해 동수득표가능성은 제거됐다. 1800대선이후 연방파는 중앙권력을 잡지못하며 몰락해갔다. 1799 워싱턴의 사망과 해밀턴·애덤스의 분열이 그원인이었다. 반면 제퍼슨은 <우리는모두공화파이며동시에모두연방파>라고선언하며 연방파를 포섭하려했다. 제퍼슨은 연방은행을 존속시키고 해밀턴식 재정구조를 유지했다. 1816 제퍼슨공화당은 보호관세를 통과시켰고 해밀턴의 연방은행이 20년특허기간만료로 1811 소멸되자 1816 2연방은행을 설립했다. 이런 정책을 시행한 사실은 두당이 사상·이념상 본질적차이가 없는 부르주아정당임을 보여준다.

1812전쟁승리이후 연방파들은 공화당진영으로 이동했고 그후 10년간 사실상 1당체제였다. 1824대선은 제퍼슨공화당출신의 4파전으로 진행됐다. 앤드류잭슨·존퀀시애덤스·윌리엄크로포드·헨리클레이는 각각 득표율·선거인단표수에서 99·84·41·37표를 기록해 누구도 과반수를 얻지못했다. 수정헌법12조는 후보자가 선거인단투표의 과반수이상을 획득하지못할경우 하원에서 최종결정한다고 명시하고있다. 애덤스·클레이가 정치적으로 결탁한 결과 1825 애덤스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제퍼슨공화당의 분열은 필연이었다. 애덤스·클레이파는 국민공화당(National Republicans)을 조직했다. 보수적연방파를 비롯한 보수세력이 국민공화당으로 집결했다. 잭슨파는 민주공화당(Democratic-Republicans) 을 결성했고 이후 민주당으로 변경했다. 제퍼슨공화당을 계승한 민주공화당은 제퍼슨의 이론을 추구했다. 국민공화당은 1834 당명을 휘그당으로 변경했다. 이는 미국혁명당시 반왕당파세력인 휘그파를 연상시켰다. 잭슨을 <왕>·<독재자>로 규정하며 그로부터 권력을 되찾겠다는 의도였다. 1828 민주당집권후 1861까지 8년을 제외하고 24년동안 민주당이 집권했다.

노예제갈등과 공화당의 출현

노예제를 둘러싸고 북부<자유>주와 남부노예주간의 갈등은 1820 미주리주의 연방가입문제를 둘러싸고 표면화됐다. 매사추세츠주의 일부인 메인지방을 <자유>주로 하고 미주리를 노예주로 할것, 미주리주남부경계36°30’이북에는 노예주를 설치하지말것, <자유>주·노예주를 동수로 유지할것을 내용으로 하는 <미주리타협>이 합의됐다. 타협안의 <자유>주·노예주간 갈등원인과 주의 동수유지는 모두 정권장악을 위한것이었다. 미주리타협은 일시적미봉책이었고 노예제를 둘러싼 이권다툼은 계기때마다 되풀이 됐다. 1848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다. 캘리포니아주민들은 <자유>주로서 연방가입을 희망하며 의회에 압력을 넣었는데 이에 남부노예주가 분노했다. 북부·남부의 상원의원수가 동일했는데 캘리포니아가 <자유>주로 합병될 경우 <자유>주에 유리해지기때문이다. <1850타협>을 통해 캘리포니아를 비노예주로 연방에 편입시키는 대신 도망노예법을 만들어 도망노예를 노예주에 되돌려주기로 합의했다. 일시적으로 중단된 갈등은 4년후 캔자스·네브래스카법에 의해 다시 시작됐다. 캔자스·네브래스카법은 1854 캔자스·네브래스카준주를 만들며 <개척>자들에게 노예제결정권한을 준것이다. 미주리타협·1850타협에 의하면 이지역은 <자유>주가 돼야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새농장개방, 대륙횡단철도개설로 준주에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하려는 목적으로 미주리타협·1850타협을 무력화시키는 법안을 제시했다. 이로 인해 노예제찬성측과 노예제반대측이 캔자스로 몰려와 <피의캔자스>폭력사태가 벌어졌다. 노예제를 둘러싼 격렬한 갈등으로 민주당·휘그당은 노예제찬성·반대를 중심으로 사분오열됐으며 노예제 반대세력은 공화당을 창설했다. 공화당은 부분적으로 제퍼슨공화당을 계승했다. 1787 북서부조례에서 신주설립인정, 노예제금지를 결정했는데 조례에 대한 초기해석에서 제퍼슨은 오늘날의 오하이오·인디아나·일리노이·위스콘신·미시간에서의 노예제금지를 규정했다. 이는 공화당이 1856 첫전당대회에서 제퍼슨을 내세운 이유다. 공화당에는 노예제폐지론자·자유토지론자·자유토지휘그파·자유토지민주당원·노우낫씽(Know Nothing 이민자배척세력)등 다양한 정치세력이 들어갔다. 공화당은 전당대회에서 캔자스·네브래스카로 노예제가 확대되는것을 반대하고 캔자스를 <자유>주로 편입시킬것을 선언했다. 연방정부에는 태평양연안까지 철도건설, 강·항구개량을 위한 예산배정을 촉구하며 북부산업의 이권을 대변했다. 1856대선에서 민주당의 제임스뷰캐넌이 약183만6000표를 획득해 당선됐으나 창당한지 2년밖에 되지않은 공화당의 존찰스프리몬트가 약134만2000표를 획득하면서 민주·공화양당체계가 형성됐다.

뷰캐넌정부하에 남·북부갈등은 첨예해졌다. 특히 드레드스콧대샌 드퍼드판결, 소설<톰아저씨의오두막>의 흥행, 노예제를 둘러싼 링컨·더글라스의 토론, <피의캔자스>이후에도 계속되는 투쟁, 노예해방운동가 존브라운의 하퍼스페리 연방군무기고습격사건등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은 남북전쟁을 불러오고있었다. 특히 드레드스콧 대샌드퍼드판결은 미국영토내의 노예제도를 금지할 권리가 없다는 판결로 북부<자유>주를 격분시켰다.

1860 공화당은 정강을 통해 남부노예소유주들에게 흑인노예가 이미 존재하고있는곳의 노예제를 근절하지않을것을 보장했다. 공화당의 <흑인노예소유주가노예를소유하는데하루에단지10센트밖에안들어가는데어떻게백인노동자들이하루에2달러를벌수있겠는가>하는 말은 노예<해방>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확인시켜준다.

링컨의 계엄령과 남북전쟁

1858 링컨·더글라스논쟁은 에이브러햄링컨과 스티븐더글라스사이 7차례에 걸친 토론회를 말한다. 링컨은 일리노이주미상원의원공화당후보로 무명의 정치신인이었고 더글라스는 현직일리노이주상원 의원이자 민주당후보로 재선에 도전하는 정치거물이었다. 링컨은 캔자스·네브래스카법을 고안했던 더글라스를 상대로 노예제를 초점으로 한 공개토론을 하며 전국적인 인물이 됐다. 링컨의 <분열된집(A Divided House)>연설중 <나는이정부가절반의노예주,절반의자유주로지속될수없을것이라고믿는다>라는 말에서 알수 있듯이 링컨은 노예제문제를 <연방주의>적관점으로 접근했다. 더글라스는 링컨이 노예제폐지를 통해 결국 연방분열을 부추기고있다고 주장했다. 토론은 무승부였고 당시 선거에서는 더글라스가 승리했다. 2년뒤 대선에서 링컨은 더글라스를 누르고 당선됐다.

1860대선에는 연방의 사활이 걸려있었다. 링컨이 노예제폐지를 고수한채 대통령이 된다면 남부는 연방에서 탈퇴할것이라고 위협했다. 링컨은 국민투표에서 약40%를 차지했지만 선거인단투표에서 180표를 획득하며 압승했다. 남부연합10개주에서 단한표도 얻지 못했지만 북부의 인구가 밀집된 제조업·농업지역과 북서부지역에서 우세했다. 공화당은 링컨을 중심으로 결집했고 북부<자유>주를 대변하는 후보자는 링컨을 단일후보로 내세웠지만 민주당은 분열됐으며 남부노예주를 대변하는 후보자는 3명이나 나왔다. 링컨은 민주당분열의 반사이익을 얻었다. 링컨취임전 서남부지역 7개주가 공식적으로 연방에서 탈퇴했다. 탈퇴는 총격전을, 총격전은 내전을 불러왔다. 휘그당이 소멸된 조건에서 남부인의 대부분은 민주당원이었다. 남북전쟁은 필연적으로 공화당·민주당의 정치대격돌이었다.

1861.4 남북전쟁개전초기 남부노예주중 하나인 메릴랜드주의 볼티모어에서 반북군폭동이 발발했다. 볼티모어군중들은 볼티모어를 지나는 매사추세츠 6보병대를 공격했고 메릴랜드주의 다른 남부연합동조자들은 전신줄을 끊고 외부와 연결하는 철도교량들을 불태웠다. 이에 링컨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인신보호령(Habeas Corpus Act)을 정지시켰다. 링컨은 메릴랜드주정부요원들을 체포했고 재판절차없이 수감했다. 연방항소법원은 인신보호특권정지가 대통령권한이 아니고 의회권한으로 대통령이 군통수권자로서 민간인을 군법회의에 넘기기로 한것은 위헌이라 는 판결을 내렸다. 민간인에 대한 군사법정재판을 둘러싸고 여러차례 위헌시비가 있었다. 연방대법원은 전쟁지역밖에서 사법기능이 정상적으로 수행되는 한 계엄령은 집행될수 없으며 어떤 초긴급사태에 있어서도 기본권은 정지될수 없다고 결론했다. 반면 연방의회는 <현재의반란이계속되는동안미국대통령은공공의안전이그것을요구한다고판단될경우에는언제든지미국전역에걸쳐또는그일부지역에서인신보호령의특권을정지할권한을가진다>라고 결의했다. 이후 인신보호영장을 정지한다는 링컨의 명령은 그 범위가 확대돼 1862.9.24 선언에서는 전국적범위의 군법·군사법원재판에서 입증된 <모든반역자들및반란자들,그들의조력자들및교사자들>·<자발적인병적편입을반대하는모든사람들,군대징집에반대하는사람및모든종류 의반역행위를한자,미국의국법에반해반란자들에게도움을주거나편의를제공하는자들>의 인신보호령이 정지됐다. 링컨은 남북전쟁에 반대하는 언론인·기업인과 시민 수천명을 영장없이 체포했으며 약200개의 신문사를 폐쇄했다.

링컨은 1863.5.19 뉴욕주 올버니공개회의에서 채택된 계엄령·인신보호령폐지반대결의안에 대한 답변을 6.13 뉴욕타임스에 기고했다. 링컨은 장문의 편지에서 <우리의경우는반란의경우다.-내앞에있는결의안에서불렀던-사실,분명하고명백하며거대한반란의경우다.그리고<반란이나침략의경우공공의안전이요구할수있는경우를제외하고는인신보호영장의특권이정지되지않는다>는헌법의조항은우리의현사건에특별히적용되는조항이다.>라고 답변함으로써 계엄령·인신보호령정지를 정당화시켰다. 링컨과 공화당은 남북전쟁기간 민주당에 의해 가로막혔던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무상원조>계획을 담고있는 자영농지법, 내란중 긴급히 필요한 조세수입을 위한 고세율보호관계법, 대륙횡단철도를 위한 자금·토지제공을 위한 태평양철도법등을 제정하며 전쟁승리와 북부자본가세력의 이익을 위한 법적토대를 마련했다. 북부내에서 의 노예제폐지반대·전쟁반대여론을 계엄령·인신보호령폐지로 진압했던 링컨은 1863.1.1 노예제폐지를 선포함과 동시에 흑인육·해군을 모집하며 전세를 역전시킨다. 노예제폐지가 발표됨과 동시에 빠르게 이탈한 백인군인의 빈자리를 흑인군인들이 채웠다. 흑인군인들은 450여차례 전투에 참가했고 그중 7만명이 희생되며 피로써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분투했다. 남북전쟁으로 인해 링컨의 지지세는 공화당내에서조차 회의적이었고 <링컨을내버리자>는 운동으로 발전했다. 정치적위기상황속에서 링컨은 자신을 위해 투표하도록 북부연합군인들에게 휴가를 줬다. 애틀란타·모빌을 점령했다는 승전보는 링컨의 지지세를 어느정도 회복시켰다. 펜실베이니아에서는 한사람이 48명의 부재자를 대신해 투표하는 부정이 발생하기도 했다. 1864링컨은 선거인단212표를 획득하며 여유있게 승리했으나 당선약7주만인 1865.4.15 암살됐다. 공화당은 1868 수정헌법14조를 통해 흑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했으며 1870 수정헌법15조를 통해 흑인들이 유권자가 되도록 허용했다. 남부주정부들은 여러 비열한 방법을 동원해 수정헌법15조를 사문화시키며 흑인참정권을 박탈했고 남부주를 사실상 지배했다.

논란의 1876선거와 공화당집권기

남북전쟁후 민주당은 연방을 분리시키려했다는 이유로 한동안 정권장악에 실패하게 됐다. 1868 공화당대의원들은 율리시스심 슨그랜트를 대통령후보로 지명했다. 공화당은 이시기부터 20여년동안 <연방을보존한정당이정권을유지하게하자>라는 전략적구호를 내세웠다. 그랜트의 연임이후 1876 공화당대통령후보로 루더포드헤이스가 지명됐고 민주당은 사무엘틸덴을 대통령후보로 내세웠다. 틸덴은 그랜트집권기 있었던 철도를 둘러싼 정경유착과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공격하며 <파렴치한들을축출하자>는 구호를 들었다. 1876대선은 여러모로 논란이 일었다. 헤이스·틸덴은 각 각47.9%(403만6572표)·50.9%(428만4020표)를 획득하며 틸덴이 득표율에서 앞섰다. 문제는 선거인단표였다. 틸덴은 184표의 선거인단투표를 획득한 상황에서 당시 논쟁이 됐던 20표중 1표만 더 획득하면 당선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20표중 단 1표도 획득하지못해 185대184로 공화당 헤이스가 당선됐다. 공화당의 적은 득표수와 논란이 되는 20표로 인해 공화당·민주당은 서로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상황이 됐다. 공화당은 민주당원들이 살인 또는 다른 형태의 위협을 통해 남부의 많은 흑인유권자들을 투표에서 배제시켰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은 수많은 투표용지들이 부패한 공화당선거관리위원들에 의해 파기됐다고 주장했다. 남부 3개주의 선거인단투표는 공화당·민주당의 통계가 서로 달라 계산될수 없었다. 8명의 공화당원과 7명의 민주당원으로 구성된 선거관리위원회는 당연히 공화당의 손을 들어줬다. 민주당이 민병대를 동원하는등 내전직전까지간 공화당·민주당은 1877타협을 통해 민주당이 헤이스의 당선을 동의하는 대신 공화당은 남캐롤라이나·루이지애나에서 연방군을 철수하고 남부교통망개량을 위한 경비지출, 민주당의 연방정부로의 진출등을 약속하며 전쟁직전에 극적으로 합의했다. 남캐롤라이나·루이지애나는 민주당계열로 합류했고 수정헌법15조를 위반하며 공화당을 지지한 흑인들의 참정권을 박탈하면서 남부지역에서 1당이 됐다. 남부를 중심으로 단결한 민주당과 달리 공화당은 2개분파로 갈라지면서 1884대선은 민주당이 승리했다. 버클리블랜드민주당후보와 제임스블레인공화당후보간 득표율은 0.6%차이, 선거인단득표수는 37표로, 블랜드가 가까스로 당선됐다. 공화당은 여전히 강했다. 1888대선은 공화당이, 1892대선은 민주당이 차지하며 공화당·민주당간의 정권교체가 빠르게 진행됐다.

1893 대공황과 그에 따른 정책적차이는 공화당·민주당의 이합집산과 공화당의 독주를 가져왔다. 1893 대공황당시 철도등 건설이 늘어나 지출이 증가하고 새광산개발로 시장에 은이 과도하게 공급돼 은가격이 하락했다. 특히 농산물가격하락으로 밀·면화를 재배하는 서·남부농민들의 생존권이 추락했다. 민주당은 부채탕감을 위한 화폐팽창을 주장했다. 은광산주들은 은16온스대금1온스의 비율로 은화의 무한정한 주조를 촉구했다. 1896 민주당은 이들을 대변하는 윌리엄제닝스브라이언을 대통령후보로 지명했다. 공화당은 윌리엄매킨리를 후보로 지명했고 은본위제도를 거부했다. 당내 은본위주의자들은 민주당으로 합류했다. 은화생산에 따른 화폐가치하락에 대한 공포는 결국 공화당을 당선시켰다. 한편 민주당의 <화폐의완만한절상>정책은 노동자의 구매력을 위협하며 결국 민주당의 지지기반인 동부·중서부공업지대 공장노동자들을 이탈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897~1911까지 공화당은 대통령직과 상·하양원을 모두 지배했다. 공화당은 1897 관세법, 1900 금본위법을 통과시켰고 해외팽창정책을 본격화하며 라틴아메리카에서의 패권장악, 필리핀식민지화, 하와이·푸에르토리코까지 미국의 지배력을 확장했다. 경제불황에서 호황으로 넘어가면서 공화당의 권력은 더욱 공고화된 반면 민주당은 공화당을 반대하기 위한 정책으로만 일관하며 고전을 면치못했다.

공화당의 장기집권은 공화당내 분열로 종식됐다. 1912 공화당전당대회에서 현직대통령 윌리엄하워드태프트와 전직대통령 시어도어루즈벨트간의 갈등이 폭발했다. 태프트와 루즈벨트간 공화당대선후보경선에서 루즈벨트는 거의 모든 주에서 태프트보다 앞섰다. 그러자 태프트는 조직력을 이용해 더많은 대의원을 확보했다. 그중에 많은 수는 공화당과 무관한 남부연방지역출신의 사람들이었다. 루즈벨트는 공화당에서 탈당한 사람들과 진보당(Progressive Party)을 결성했다. 진보당은 당명만 <진보>일뿐, 진보적성격의 정당이 아니었으며 <공화당의2중대>이자 루즈벨트의 대권장악을 위한 발판일뿐이었다. 민주당은 토마스우드로윌슨을 후보로 내세웠다. 윌슨은 기업·금융기관등의 개혁을 강조하며 <뉴프리덤(New Freedom)>을 주요구호로 내세웠다. 1912선거결과 민주당 윌슨이 진보당 루즈벨트, 공화당 태프트를 누르고 선거인단의 485표를 차지하며 당선됐다. 윌슨은 <뉴프리덤>개혁의 일환으로 관세개혁을 위한 언더우드법, 은행구조개혁을 위한 연방지불법, 기업의 횡포·부당거래개혁을 위한 클레이턴트러스트금지법·연방통상위원회법등을 제정했다. 1916대선은 멕시코내전·1차세계대전에 대해 <반전>·<불간섭원칙>을 내세운 윌슨과 <전쟁대비>를 내세운 공화당 찰스휴즈간의 대결이었다. 루즈벨트는 참전을 촉구하며 공화당을 지원했다. 재선에 성공한 윌슨은 1918.11 14개조평화원칙을 발표하고 1차세계대전에 참전하며 <반전>·<불간섭원칙>공약을 저버렸다. 1920대선은 국제연맹가입여부가 화두였다. <고립주의>를 내세운 공화당 워런하딩이 득표율 60.3%·선거인단404표를 차지하며 월슨의 정책을 계승한 민주당의 제임스미들턴콕스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미국은 1876이래로 대체적으로 공화당이 대권을 장악했으며 1912·1916 윌슨이41.8%·49.2%를 차지하며 가까스로 승리한것외에 1932년까지 지속됐다.

1929대공황과 양당정권교체

1929.10 월스트리트대폭락과 함께 대공황이 시작됐다. 1930후버행정부가 관세인상법안인 할리-스무트법을 통과시킴으로써 각국간 보복관세가 유발됐고 주식시장은 더욱 붕괴됐으며 대공황 또한 더욱 심각해졌다. 약1300만명이 해고됐음에도 대통령 허버트클라크후버는 개인의 문제로 치부했으며 정부의 적극적개입으로 문제를 해결해선 안된다고 확고히 믿었다. 그러면서도 금융자본을 위한 대부를 승인하고 은행구제를 위해 재 건금융공사(Reconstruction Finance Corporation)를 설립해 재정을 지원했다. 금융자본·부르주아세력만을 위한 공화당정부에 대한 미국민중의 분노와 심판의지는 1932대선결과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났다. 민주당 프랭클린루즈벨트는 득표율 57.4%·선거인단472표를 얻어 득표율39.7%·선거인단59표를 차지한 후버를 꺾고 대통령이 됐다. 사실상 공화당의 장기집권 시대가 끝나고 민주당의 시대가 열렸다. 루즈벨트의 뉴딜(New Deal)정책이 구체화되면서 실업구제·연방주택공급·파산·빈민재정착·노동등에 대한 법안이 채택됐다. 루즈벨트의 정치적라 이벌이자 뉴딜정책을 반대했던 민주당 앨스미스는 <어떤사람도산타클로스를쏘길원하지않는다>고 힐난할 정도로 복지를 위한 비용은 투표직전에 한꺼번에 <배달되는> 이상한 관례가 생겼다. 루 즈벨트특별보좌관 해리홉킨스는 <우리는돈을쓰고또쓰고,세금을부과하고또부과하며,선거하고또선거할것이다>라는 말로 루즈벨트정 책이 인플레이션·세금정책이며 새로운 착취방식임을 드러냈다.

루즈벨트시기를 거치며 전통적인 민주당의 정체성이 크게 바꼈다. 제퍼슨을 계승해온 민주당은 제퍼슨이 고수해온 지방분권·작은정부의 원칙을 버렸다. 민주당에 대항해 공화당의 성격도 변화를 겪었다. 공화당은 민주당과의 차별성을 고수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보수화됐으며 네거티브가 강한 정당으로 변화했다. 루즈벨트는 독점자본주의시대에 맞게 저율의 관세적용 혹은 관세폐지를 통해 기업의 이익을 창출하는데 복무했다. 노동자·민중의 투쟁의 성과이자 정권입장에서는 개량화책동의 일환으로 1935 와그너-코네리법을 채택해 노동조합을 합법화했다. 이시기를 거치며 공화당을 지지하던 흑인들이 민주당쪽으로 돌아섰다. 루즈벨트는 뉴딜정책으로 결코 대공황을 극복하지못했다. 뉴딜정책은 미봉책이었으며 경기는 1939 2차세계대전으로 인한 전시경제가 가동되면서 회복됐다. 루즈벨트는 대공황과 2차세계대전이라는 특수한 조건에서 이례적으로 4선에 성공한 유일무이한 미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루즈벨트는 1945 대통령취임후 3개월만에 갑자기 사망했고 부통령 해리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민주당이 16년동안 집권한 가운데 공화당은 1946 중간선거에서 1928이후 처음으로 의회다 수당이 되면서 정권교체에 대한 기대도 높아졌다. 트루먼은 흑인민권을 강조하며 출마함으로써 남부민주당원들의 표심을 이반했다. 그럼에도 뉴딜정책으로 인해 흑인·노동자·농민들의 표심은 여전히 민주당에 있었다. 1948대선에서 트루먼은 재선에 성공하게 된다. 코리아전에서의 패퇴는 트루먼의 정치적위기를 가중시켰다. 미국민들은 코리아전을 두고 <미스터트루먼의전쟁(Mr. Truman’s War)>이라고 조롱했다.

1950 공화당상원의원 조셉매카시는 연설에서 백지를 흔들며 <여기내손에205명의명단이있다.공산당원이라는사실이국무장관에게알려졌음에도불구하고계속국무부에서일하면서미국의대외정책을입안하는사람들의명단이다.>라고 정부를 저격했다. 공화당은 이사실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민주당을 정치적위기상황에 몰아넣기 위해 매카시광풍을 일으키며 진보세력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민주당은 중간선거 직전 9월 매카란국내안보법을 통과시키며 매카시즘에 동조했다. 트루먼은 거부권을 행사했으나 결국 공화당·민주당의원에 의해 거부권이 무력화됐다. 매카시선풍은 11월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하원에서 28석, 상원에서 5석을 늘리는 효과를 낳았고 1952대선에서 공화당 드와이트아이젠하워가 득표율55.2%·선거인단442표를 획득하며 민주당 애들레이스티븐슨을 꺾고 당선됨으로써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20년만에 정권이 교체된다. 아이젠하워는 1956대선에서도 스티븐슨을 상대로 압승했다. 공화당이 주도적으로 입법한, 1951 대통령임기를 2번으로 제한한 조항인 수정헌법22조가 아니라면 아이젠하워는 3선에도 도전했을 가능성이 크다. 1960대선결과 민주당 존피츠제럴드케네디는 득표율에서 49.7%로 공화당 리차드닉슨보다 0.1% 높았으나 선거인단303표를 획득해 84표를 앞서면서 승리했다. 케네디는 카톨릭교도·흑인·노동자의 높은 지지를 받았으며 인구가 많은 북부상업중 심지에서 많은 지지를 얻었다. 반면 카톨릭교도에 반감이 큰 남부프로테스탄트의 전통적인 민주당지역의 지지는 상실했다. 케네디는 뉴프론티어(New Frontier)를 내세우며 나름의 개혁정책을 시도했으나 1963.11 암살되며 개혁조치들이 일시적으로 가로막혔다. 부통령 린든베인스존슨이 대통령직을 승계해 케네디암살로 인한 충격에 편승, 여러 법안들을 입법화했다

1964대선은 민주당 존슨과 공화당 배리골드워터간의 대결이었다. 공화당은 민주당의 인플레이션정책에 반대하며 긴축을 주장하는 한편 베트남전확대·고엽제작전지지·핵무기사용등을 주장하며 호전적으로 나왔다. 특히 흑인에 대한 공민권부여를 반대해 흑인유권자들이 공화당에 등을 돌리게 했다. 미국민의 반전여론과 개혁적인 사회분위기는 민주당이 미대선역사상 최다득표율인 61.1%를 얻도록 이끌었다. 골드워터는 남부5개주와 출신주인 애리조나에서만 승리했다. 흑인표의 90%가 반골드워터표가 되면서 과거 흑인의 정당이었던 공화당이 반흑인지역인 남부에서 대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1964선거를 계기로 공화당·민주당의
지지기반이 확실히 뒤바꼈다. 존슨은 미국민의 반전여론을 배반하며 1965 베트남북부중심부에 대규모폭격을 명령하며 전세를 뒤집으려했다. 전쟁에서 패배가 거듭되고있었고 전쟁비용은 재정을 악화시켰으며 미국내에서의 반전평화·흑인인권운동은 나날이 고조됐다.

1968대선은 여러모로 민주당에게 악재였다. 민주당에 대한 정권심판론으로 진행됐고 민주당출신 조지월리스가 민주당에서 나와 미국독립당을 창당하고 대선후보로 출마하면서 민주당이 분열됐다. 닉슨은 <법과질서의회복>을 내세웠고 득표율43.4%·선거인단301표로 닉슨의 공화당이 12년만에 정권을 되찾았다. 1972대선은 베트남전이 종식되지않은 조건에서 치러져 민주당 조지맥거번은 반전을 내세웠다. 닉슨도 정전될것이라 단언했다. 선거결과 닉슨이 득표율 60.7%·선거인단520표로 압승했다. 그러나 닉슨은 2년후 <워터게이트>사건으로 사임했다. <워터게이트>사건은 1972당시 민주당대선 본부<전국위원회>가 있던 워터게이트호텔에 닉슨측에서 도청장치를 설치한 사건이다. 현장에서 체포된 5명중 1명은 닉슨재선위원회 수석경호원출신이었고 다른 1명은 미중앙정보부(CIA)전직직원이었다. 1973 재판과정에서 닉슨이 직접 사건은폐에 개입했다는것이 드러나고 그결과 닉슨은 탄핵위기에 몰렸다. 1974.8 닉슨은 사임을 발표했다. 1972대선에서 닉슨의 압도적승리는 <워터게이트>도청과는 무관하다는 평도 있다. 그럼에도 이사건은 부정하게 치러진 대선의 결과가 어떠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닉슨사임후 부통령인 제럴드 루돌프포드주니어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1974대공황과 공화당집권기

석유가폭등이 계기가 돼 발생한 1974 공황의 근본원인은 인플레이 션정책에 있다. 루즈벨트시기부터 있어온 인플레이션정책은 물가폭등·화폐가치하락으로 이어졌고 세금을 매개로 한 착취구조는 더이상 가릴수 없이 심각해졌다. 경제적으로 공황이 있다면 정치적으로는 소련·동구권의 개량주의, 유럽의 <제3의길>등으로 인해 우경화가 심화됐다. 이같은 정치·경제적상황을 이용해 미정부를 장악하고있던 부르주아세력은 신자유주의경제체제로 경제질서를 재편했고 이는 필연적으로 정권교체로 연결됐다. 1976대선은 민주당 지미카터가 득표율50.1%·선거인단297표를 획득하며 득표율48.0%·선거인단240표를 획득한 공화당 포드를 힘겹게 이겼다. 카터는 스태그플레이션을 해결하겠다며 초고금리정책을 선택했다. 경제성장은 마이너스로 내려가고 실업률이 10%대로 치솟으며 경제가 더욱 악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게다가 이란미대사관인질사건으로 결국 1980대선에서 카터는 공화당 로널드레이건에게 패배한다.

레이건은 기존정책과는 정반대로 신자유주의정책을 시행한다. 레이거노믹스로 불리는 신자유주의정책의 주요내용은 <정부지출의축소>·<노동과자본에대한소득세한계세율인하>·<정부규제축소>·<화폐공급량조절>등을 들수 있다. 전통적인 공화당정책에 가까운 레이거노믹스를 앞세우며 레이건은 미국내뿐만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정책을 확산시켰다. 레이건의 연임이후 1988대선에서도 공화당이 승리했다. 레이거노믹스의 결과 복지가 축소되고 감세는 주로 부유층에게 더 많은 이익을 줬고 빈부격차가 심화됐으며 고금리·달러화강세현상으로 미경제전반에 걸친 침체를 가져왔다. 레이건시기 부통령출신 조지허버트워커부시는 레이건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며 대권에 도전했고 1988 득표율53.4%·선거인단426표를 획득하 며 당선됐다.

부시는 재임기간 걸프전·파나마침공등을 감행하며 호전적성격을 드러냈다. 1992대선은 이례적으로 3파전으로 진행됐다. 자본가출신의 무소속 로스페로는 18.9%를 득표하며 공화당 부시의 표를 잠식했다. 그결과 민주당 빌클린턴이 득표율43.9%·선거인단370표를 획득해 당선됐다. 클린턴초기 행정부·의회 모두 민주당이 실권을 장악했으나 당선과 동시에 계속되는 실책으로 당선 4개월만에 지지율이 39%로 떨어졌으며 1994 중간선거결과 42년만에 공화당에 하원을 넘겨줬다. 그러나 1990년대 경기호황의 흐름을 타고 클린턴은 재선에 성공한다. 클린턴시기 금융자본은 집요한 로비끝에 1999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업무를 엄격히 분리하는 은행법(Banking Act of 1933)을 무력화했다. 2000대선은 득표율에서 민주당 앨고어가 48.4%로 공화당 조지워커부시의 47.9%보다 앞섰음에도 선거인단득표수에서 266대271을 기록, 과반수 270표보다 1표더 획득한 부시가 가까스로 당선됐다. 두후보가 박빙이었던 조건에서 선거인단 25명인 플로리다주에서의 승부가 관건이었다. 플로리다주에서의 두후보간 격차가 0.05%이내로 줄어들면서 재검표에 들어갔고 그결과 선거는 투표가 시작된후 1달여간 개표·검표·재검표과정을 거쳤다. 12.8 플로리다주대법원이 무효표논란을 빚은 표들에 대한 수작업재검 표와 함께 다른 군단위의 <논란표>도 재개표하도록 판결했다. 그결과 부시· 고어간표차가 537표에서 154표로 좁혀졌다. 그러나 12.12 연방대법원은 재검표를 최종기각했고 12.13 고어는 패배를 공식인정하며 부시가 최종 당선됐다. 2000대선은 미국식민주주의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

부시는 2001 군사자작테러이후 아프가니스탄·이라크를 침략하는 한편 2001.11 행정명령으로 특별군법회의를 창설했고 2006 <애국법(USA PATRIOT Act)>을 통과시켰으며 <테러>와의 전쟁에서 <적전투원>으로 결정된 사람에 대한 인신보호영장을 정지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2006 연방대법원은 군법회의가 미연방헌법·국제법위반임을 확인했다. 부시는 <9.11테러사건>를 이용해 국민의 불만과 분노를 외부로 돌리는 침략전쟁을 감행했고 내부로는 파시즘을 강화해 결과적으로 미국식민주주의의 비민주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미국식민주주의에는 민주주의가 없다

부시는 2001 <군사자작테러>로 시작해 2008 금융공황으로 마무리했다. 부시집권기 침략전쟁·파쇼정국·경제침체등의 문제는 공화당에 대한 심판으로 이어졌다. 2008대선은 민주당 버락오바마가 득표율52.9%·선거인단365표를 획득해 공화당 존매케인을 꺾고 당선됐다. 오바마는 취임과 동시에 8310억달러경기부양법안에 서명하는등 인플레이션정책을 시행했다. 2006 연준의장에 <헬리콥터벤> 벤버냉키가 임명됐다. 버냉키는 제로금리·양적완화정책을 시행하며 2008~14까지 4조5000억달러를 시장에 풀었다. 오바마·민주당은 사민주의·증세정책을 시행했으나 공황으로부터 서민을 구제하기 위한 경기부양에 실패했고 공황의 원인인 금융에 대한 규제 또한 단행하지못했다. 오바마·민주당에 대한 미국민심의 이반은 2016대선에서 공화당 도널드트럼프의 승리로 이어졌다.

트럼프는 46.1%를 득표함으로써 힐러리클린턴보다 득표율이 2.1% 모자랐다. 그러나 선거인단에서 클린턴보다 77표가 더 많은 304표를 획득해 당선됐다. 미국식민주주의의 비민주성이 다시한번 입증된 순간이다. 40대이상·백인·남성·저학력자·기독교인등이 트럼프를 전폭적으로 지지한 사실은 오바마시기 경제침체로 인한 고통이 누구에게 집중됐는지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트럼프의 선거전략이 유효했다는것을 보여준다. 트럼프는 당선과 동시에 <오바마케어>폐지를 주장하고 <아메리카퍼스트>를 외치며 기업감세·관세인상·무역전쟁을 벌이는등 전통적인 공화당정책을 따르는 한편 경제위 기에 대응해 Fed(Federal Reserve System 연방준비제도)에 제로금리·양적질적완화를 압박하며 전통적인 민주당정책을 동시에 시행했다. 트럼프재임기간 성과로 꼽히던 경제부문은 코비드19팬데믹대응실패·바이러스공황으로 인해 부정평가를 받고있다. 실례로 2020.12.6~12사이 신규실업수당청구건수는 88만 5000건으로 지난 9월이후 최고치를 찍었는데 이는 공황의 심각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바이러스공황속에서 치러진 2020대선결과로 인해 미국은 현재 대혼란을 겪고있다. 미대선에서 민주당 조바이든이 득표율 51.3%·선거인단306표를 획득했다. 문제는 바이든측 부정선거의 구체적증거들이 쏟아지고있다는 점이다. 펜실베이니아·애틀랜타·위스콘신·미시간·조지아·네바다·애리조나·알래스카등에서 1개주당 수만에서 수십만의 바이든표가 갑자기 추가되거나 트럼프표가 증발되는 상황이 발생하며 개표조작의혹이 확실시 되고있다. 2020.11 트럼프지지자들이 바이든지지자들에게 총격을 가한 사건은 양측간 남북전쟁급의 무력충돌가능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인신보호영장폐지·계엄령을 예고하는 트럼프정부의 모습에서 거듭 확인되듯이 미국식민주주의에는 민주주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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