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쟁의기관차7 – 광주40] <신바빌론>GV 인류역사에 훌륭히 계승된 파리코뮌

<신바빌론>GV
인류역사에 훌륭히 계승된 파리코뮌 양고은 MIF조직위원

파리코뮌의 역사적배경으로 1789혁명, 1830 7월<혁명>, 1848 2월혁명·6월항쟁이 있다. 프랑스민중들은 혁명의 매시기마다 영웅적투쟁으로 정국을 돌파하며 결정적역할을 했으나 정치적으로 미숙해서 혁명의 열매를 부르주아세력에게 빼앗겼다. 그러나 민중의 혁명적진출은 굴함없이 계속됐다. 특히 6월항쟁은 최초의 부르주아세력과 노동계급간의 국내전쟁으로 부르주아세력에게 큰 타격을 줬으며 프랑스노동운동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런 혁명의 결과들이 축적돼 세계최초의 노동자·민중정권인 파리코뮌을 건설하게 된다.

파리코뮌은 나폴레옹3세와 부르주아세력의 학정에 대항해 투쟁하며 건설됐다. 나폴레옹3세는 1870 프랑스-프로이센전쟁에 패배하고 프로이센군에 굴욕적으로 잡혔다. 당시 파리민중들은 <제정타도>·<공화국만세>를 외치며 투쟁했고 2제정을 붕괴시키며 혁명에 성공했다. 부르주아세력에 의해 <민족방위정부>가 조직됐는데 이들은 파리민중의 요구인 경찰청폐지·시의회선거시행·재판권선거제·기본권보장등을 거부했다. 민중들이 조직한 민병대와 정부감시기구인 <감시위원회>·<파리20구공화주의중앙위원회>가 군사·정치기관의 역할을 했다.

1871.3.18새벽 정부군2개대대가 몽마르트언덕에 있는 국민근위대대포227문을 끌어내리려했다. 파리민중들은 이를 막고 정부군을 무장해제시켰다. 혁명세력과 민중은 1871.3.18 부르주아정부인 티에흐정부를 전복시키고 파리코뮌을 건설했다. 파리코뮌에는 집행위원회를 비롯해 재무·군사·사법등 10개위원회가 설치됐다. 1871.4.19 사실상 공식강령인 <프랑스민중에게보내는선언>을 통해 파리민중의 권리를 규정했다. 노동관련 사회정책은 <노동·산업·교환위원회>에서 결정했다. 경제 적으로 부르주아의 공장을 몰수해 노동자협동조합이 관리했고 임금상한선규정·집세면제·무상의무교육등 노동자·민중중심의 정책이 시행됐다.

파리코뮌의 한계로는 우선 혁명적당의 부재를 들수 있다. 1국 제당프랑스지부의 지도부는 분열돼있었고 이는 결정적순간에 혁명을 지체시키는 원인이 됐다. 노농동맹이 부재해 파리노동계급이 고립적으로 투쟁했고 부르주아재산을 몰수하지않아 티에흐군대의 물적자원이 보존됐다.

1871.5 맑스는 연설을 통해 <노동자들의파리는그코뮌과더불어새로운사회의영광된선구자로서영원히찬양될것>이라고 격조높게 평가했으며 <코뮌을절멸시킨자들에대해이미역사는그들의목에씌운영원한형구에못질을했다>고 선언했다. 파리코 뮌은 세계최초의 노동자·민중정권으로 세계진보주의자들에게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내적으로는 1930년대중반 레지스탕스투쟁과 전국레지스탕스평의회강령, 1945직후 혁신적사회보장제도인 쎄큐히떼쏘시알, 오늘날 전개되고있는 노란조끼투쟁까지 그투쟁정신과 진보적성과가 계승돼 오고있다. 외적으로는 대표적으로 1917 러시아10월혁명을 들수 있다. 파리코뮌의 역사적경험은 러시아혁명지도자인 레닌에 의해 훌륭히 계승·혁신됐다. 레닌은 사상적으로 맑스주의를 계승한 레닌주의와 당으로서 볼셰비키, 노농동맹을 발전시킨 노동자·빈농·병사소비에트를 조직해 러시아10월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다.

우리역사에는 <광주코뮌>이 있다. 1980.5.18 광주민중항쟁이 민중항쟁의 주인은 민중임을 증명했다면 해방광주는 민중정권건설의 담당자가 민중임을 증명했다. 5.21 도청을 장악한 광주시민은 권력의 일시적공백상황에서 민주적·체계적으로 활동하며 민중자치정권의 꿈을 실현했다. 이시기 사회악이 급격히 감소됐고 시민들사이의 진정한 연대와 협력, 초보적인 공동주의사회가 이뤄졌다. 미웬트워스공대교수인 카치아피카스는 <광주는20세기의파리코뮌이며,민중의저항과자치역량의 세계사적정점>이라고 격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