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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5 항쟁의기관차〉 미완의 20세기혁명

미완의 20세기혁명

18·19세기혁명, 20세기혁명으로

1789 프랑스혁명은 결국 왕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최초의 근대적인 공화정을 실시한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었다.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은 일반적인 부르주아혁명중에서도 노동자·민중이 강력한 사회세력으로 성장해 자기의 독자적인 계급적요구를 들고나오며 자본주의적사회관계가 상당한 정도로 발전된 사회적조건을 배경으로 하는만큼 이사회적변혁은 부르주아의 요구를 초월한다. 그럼에도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은 계급적 착취와 억압의 청산을 직접적목적으로 내세우지않는다. 자본주의상승기에 진행된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은 부르주아가 영도해 자본주의적국가제도의 수립과 자본주의적착취관계에 의한 봉건적착취관계의 교체로 끝나게 된다. 1789프랑스혁명은 완벽한것으로 되지못해서 다시 새로운 왕정으로 이어졌고 1848.2 새로운 혁명을 부르게 된다. 이시기 맑스는 <정의자동맹>을 <공산주의동맹>으로 바꿔내고 노동계급의 선언 <공산당선언>을 새로운 강령으로 발표한다. 1848프랑스2월혁명은 독일3월혁명등 주변국들에 영향을 끼쳤다. 당시 프랑스만이 왕정을 공화정으로 바꾸는데 성공했지만 역시 오래가지못했고 또다시 왕정으로 바뀌었다. 1870 독일통일을 위해 프랑스를 제압하고자 했던 비스마르크에 의해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이 발발하고 프랑스가 거듭 패배해 황제마저 포로로 잡히자 프랑스의 정치지배층은 3공화정을 수립한다. 파리의 노동계급은 프로이센의 침략에 맞서 <민중근위대>를 조직하고 조국을 지켜 나선다. 파리의 노동자·민중은 1871.3.18 파리코뮌을 선포하고 최초의 노동자·민중정권을 수립한다. 코뮌은 부르주아통치기구를 철폐하고 노동자·민중의 새형의 정치조직을 창설했으며 혁명적조직들을 내오고 반동경찰을 철폐했다. 일련의 노동자·민중의 이익을 실현하는 사회경제개혁을 실시했다. 3공화정의 지배층은 노동자·민중의 혁명적기세에 두려움을 느껴 프로이센과 굴욕적인 휴전조약을 체결하고 파리코뮌의 <민중근위대>가 장악하고있던 몽마르트언덕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다. 파리의 노동자·민중은 영웅적으로 싸웠으나 코뮌자체의조직사상적한계·계급투쟁의불철저성·반혁명세력의군사적우위에 밀려 종국적목적을 실현하지못하고 실패했다. 그혁명정신과 진보정책들은 프랑스의 노동자·민중들을 통해 20세기로 계승됐다.

계급적착취를 끝낸 첫사회주의혁명

19세기말 부르주아들은 스스로 정권을 장악하려는것보다 왕을 비롯한 봉건세력과 결탁해 자신들의 이익을 실현하는데 더 절실한 이해관계를 가지고있었다. 자본주의가 성장하면서 봉건세력과 부르주아세력의 차이가 없어지고 입헌군주제나 제정의회가 여러나라에 보편화되면서 부르주아들의 권력참여가 이미 성숙단계에 있었으므로 혁명세력으로서의 부르주아들의 역할은 이미 사라졌다. 러시아는 후발자본주의국가로 특히 다른 자본주의나라들보다 정치·경제적으로 취약했다. 러시아의 노동자·민중은 자본주의경제체제와 더불어 봉건농노제의 잔재로 2중3중의 고역과 억압·착취에 시달렸다. 1900~03 경제공황으로 모순이 심화되고 선진사상을 받아들인 노동자·민중의 혁명운동이 장성했다. 1904~05 러·일전쟁에서의 연속적패배와 짜르등지배계급의 부정부패는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1905 9월 모스크바노동자들의 파업투쟁과 10월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은 전국적파업을 촉진하며 나라의 모든 정치·경제체계를 마비시켰다. 짜르는 10.17 <조서>를 통해 국회소집을 약속하고 정치범사면·핀란드자치복구·농민부채징수금지등을 선포했다. 노동자들은 무장투쟁을 준비하며 대중적정치조직인 노동자대의원소비에트를 창설했다. 노동자·농민·병사의 혁명적창의에 의해 발생한 소비에트는 파업투쟁기관에서 혁명투쟁기관·무장투쟁기관으로 발전했다. 노동자·농민·병사는 가혹한 탄압속에 무장투쟁을 전개했으나 혁명세력이 짜르봉건전제제도를 전복하지못하고 패배했다.

혁명세력의 투쟁은 계속됐다. 레닌은 반혁명의 시기 좌우경기회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며 볼셰비키를 강화했다. 1914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러시아의 정치·경제적위기는 더욱 심화됐고 러시아민중들의 삶은 더욱 처참해졌다. 러시아 노동자·민중은 제국주의전쟁에 총알받이로 내몰려 희생됐고 최소한의 식량문제도 해결되지못해 빵과 우유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이런 상황은 짜르정권에 대한 분노로 모아졌다. 1917.2 짜르전제제도가 전복되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 이뤄진다. 2월혁명수행과정에 노동자·민중의 노동자·병사대의원소비에트들이 광범위하게 창설됐고 노동자의용군부대들과 적위대들이 조직됐다. 2월혁명후 노동계급과 부르주아사이의 정권쟁취투쟁이 전개됐다. 소비에트지도부를 차지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인 에세르들은 부르주아·지주정당인 입헌민주당·10월당과 협정을 맺으며 노동자·민중을 배신했다. 결국 3.2 부르주아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러시아는 노동자·병사대의원소비에트와 임시정부가 공존하는 <2중정권>이 수립됐다.

부르주아임시정부는 전쟁중단과 땅·빵의 경제위기와 민생문제해결등 혁명적조치에 소극적이었다. 레닌은 1917.4.4 <현혁명에서의프롤레타리아의과업에대하여>를 통해 사회주의혁명에로의 이행방침을 제시했다. 소비에트공화국을 가장 혁명적인 정권형태로 제시하며 <모든권력을소비에트로!>구호를 제기했다. 임시정부는 볼셰비키와 소비에트를 탄압하는데로 나아갔다. 혁명이 고조되자 1917.9 미·영·프제국주의세력은 러시아군총사령관인 코르닐로프를 앞세워 군사독재를 수립하려했으나 볼셰비키에 호응한 뻬쩨르부르크노동자·병사들에 의해 저지됐다. 10.10 당중앙위원회회의에서 무장투쟁에 관한 레닌의 결의가 채택됐고 레닌을 수반으로 한 정치국을 결성했다. 이후 뻬쩨르부르크소비에트집행위원회는 군사혁명위원회를 창설하고 당중앙위원회확대회의는 스탈린등으로 투쟁지도를 위한 군사혁명중앙을 조직했다. 4만뻬쩨르부르크적위대등 강력한 혁명무력이 형성됐다. 10.24 임시정부는 볼셰비키신문인쇄소를 습격하고 군사혁명위원회성원들의 체포를 명령했다. 레닌의 혁명군대와 임시정부의 반동군대가 격렬히 대치했다. 혁명군대는 도시주요지점들을 점거했고 10.25아침 뻬쩨르부르크는 혁명군대의 수중에 완전 장악됐다.

군사혁명위원회는 레닌이 쓴 <러시아의공민에게!>격문을 발표하고 국가주권이 뻬쩨르부르크노동자·병사대의원소비에트-군사혁명위원회에 있음을 선포했다.

11.2 모스크바소비에트정권이 수립됐고 1918.2 혁명은 러시아전역에 걸쳐 승리했다. 1918.1.13 각각의 소비에트가 전러시아 노동자·농민·병사소비에트로 통합됐으며 대회에서 러시아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을 창건했다. 소비에트정권은 1917.11 기업·철도를 국유화하고 부르주아정권시기 체결된 모든 차관을 무효화했다. 1918.6 대규모공업을 국유화했고 사회주의적생산관계를 확립했다. 학교·도서관등을 국유화하고 문맹퇴치등을 진행했다. 레닌은 1918.4 <소비에트정권의당면과업>을 통해 사회주의기초건설강령을 제시했다. 농촌에서는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러시아사회주의혁명은 기존의 모든 혁명과 다른, 사람에 의한 사람의 착취와 억압을 청산한 첫사회주의혁명이었다. 혁명은 노동자·민중을 자유와 해방을 위한 투쟁으로 고무하였으며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에로의 이행의 시초를 마련했다. 10월혁명의 결과 전일적인 제국주의체계가 무너지고 자본주의의 전반적위기가 시작됐다.

혁명의 세기로 빛난 20세기

러시아의 사회주의혁명승리로 고무된 전세계노동자·민중들은 자기나라에서의 혁명을 주도해 떨쳐나섰다. 1920~30년대 세계도처에서 노동자·민중들의 정치적결사체인 공산당·노동자당들이 결성됐다. 노동자·민중에 기생해오던 자본주의경제의 모순은 더욱 심화돼 전반적위기로 치닫게 됐다. 경제위기의 심화와 노동계급의 장성으로 위기에 처한 부르주아정권은 노동계급을 개량화하고 한편으로는 파쇼화로 줄달음쳤다. 독일은 1938.3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인거주자들이 많은 주데텐란트주의 할양을 주장했다. 당사국인 체코슬로바키아는 배제된채 영·프가 독·이와 뮌헨협정을 체결해 이를 인정해줬다. 소련은 이때 유럽집단안전대책수립을 제기했으나 미·영·프제국주의자들의 방해로 실현되지못했다. 미·영·프제국주의자들은 파쇼독일과 소련의 대결구도를 강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방치·방조한것이다. 그러자 오히려 소련은 선제적으로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제국주의나라들의 전쟁에 개입하지않았다.

1939.9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이어 1940 프랑스까지 점령했다. 마침내 1941.6 독일은 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했다. 1942.1 소련과 미·영은 파쇼독일에 대항해 연합전선을 형성했다. 1942~43 스탈린그라드방어전투는 승승장구하던 파쇼독일을 궁지로 몰아넣고 대전의 전황을 결정적으로 전환시켰다. 2차세계대전에서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나라도 소련이다. 소련은 파쇼독일을 막기 위해 제1전 초선에 섰으며 제국주의나라들의 고립·견제속에서도 혁명적원칙을 지키며 사회주의소련과 국제주의이상을 위해 싸웠다.

2차세계대전이 전세계반파쇼민주역량의 승리로 끝나고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나라들에 사회주의나라 또는 인민민주주의나라들이 수립됐다. 반면 전쟁기간 영국·프랑스등의 제국주의국가의 식민지통치체제가 약화되고 민족해방운동역량은 장성해 민족해방투쟁이 강력하게 전개돼 제국주의식민지체제가 전반적으로 붕괴됐다. 점령군이 아닌 해방자로 내려온 소련은 미국의 핵위협을 감안해 서쪽으로는 그리스로 진군하지않았고 동쪽으로는 코리아반도38선이남으로 전진하지않았다. 코리아의 항일무장투쟁세력인 조선인민혁명군은 이미 1942 소련·중국과 함께 국제연합군을 조직할정도로 전쟁당사자로서 자체역량을 갖추고있었으므로 소련은 조선인민혁명군세력이 자체역량으로 북지역에서 정부를 구성하고 국가를 수립할것을 의심하지않았다. 조선인민혁명군은 1945.8.9 최후공격명령하에 코리아반도내로 총공격했고 동시에 전인민적봉기와 각지에 조직된 인민유격대들의 배후연합작전이 벌어졌다.

8.15 일제가 항복을 선언하자 민중들은 도처에서 일제식민통치체제를 대신할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일제의 무장해제도 진행했다. 북은 1945겨울 대대적인 문맹퇴치운동을 벌였다. 일제치하에서 민족적 차별과 멸시로 식민지교육조차 받지못했던 이들이 해방된 조국에서 자기권리를 누리기 위해 필요한 기초적인 교육이었다. 1946.2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됐고 인민민주주의혁명으로 일제소유로 있던 중요산업을 몰수해 일제의 경제적지반을 청산했다. 씨붙임을 하기전인 3월 일제와 지주들의 토지를 무상몰수하고 밭갈이하는 농민들에게 무상분배하는 토지개혁을 실시해 이해의 농사를 보장했다. 노동법과 남녀평등권법, 중요산업국유화법령을 제정했다. 인민민주주의혁명을 계속하며 북은 1947.2 선거로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건설했다.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사회주의혁명으로 나가기 위한 과도기의 정권기관으로 자기성격을 규정했다. 한편, 미국은 모스크바3상회의의 결정사항을 위반하며 일방적으로 코리아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했으며 유엔은 당사국인 코리아의 입장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미국의 거수기가 돼 유엔감시하의 선거를 결정했다. 미국의 제국주의적침략기도를 간파한 북은 이런 유엔의 조치를 거부했다. 무엇보다 우리민족이 자주적으로 정권을 수립하고 나라를 세울수 있다고 확신했다. 1948.4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가 개최됐고 남에 대한민국이 수립된 직후인 8.25 전국적인 선거를 통해 9.9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근대의 청나라말 제국주의침략의 각축장이었던 중국에는 1937.7~1945.8 전쟁기간 장성한 중국공산당이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1945.8.26 시국선언을 발표했고 10.10 국민당과 정치협상회의소집등을 합의했다. 미국은 1945.9.30 일제패잔병을 <무장해제>시킨다는 명목으로 중국영토내에 미군12만명을 주둔시켰고 미국의 비호를 받은 장개석은 중국의 전략적거점들을 장악해들어갔다. 중국공산당은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1946.1 중국인민해방군과 국민당군대사이에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충칭에서는 정치협상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장개석의 군사활동은 중단되지않았다. 1946.7.20 모택동은 중국공산당중앙이 기초한 <자위전쟁으로장개석의진공을분쇄하자>라는 당내지시를 하달했다. 1946~49 중국에서의 <중국인민해방전쟁>은 반제반봉건혁명전쟁이다. 1949.4 난징해방전투에서 승리하고 국민당정권의 붕괴를 선언했다. 1949.9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가 진행됐고 10.1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이 선포됐다.

2차세계대전당시 일제치하에 놓여있던 베트남도 1945.8 일제가 패망하자 베트남의 해방을 선포했고 9.2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수립했다. 9.3 호치민은 1차국무회의를 열고 기근추방·문맹퇴치·총선실시·새생활건설·인두세시장세및사용세폐지·종교의자유보장등을 혁명권력의 공고화를 위한 5대긴급과제로 제시했다. 한편 미국의 비호를 받고있던 장개석군대가 베트남북부지역에 주둔해있었으며 영국군대도 9.23 남베트남으로 들어와 사이공을 점령하고 프랑스의 복귀기반을 마련해줬다. 1945.11 윈난성에 파견된 프랑스군 2개대대가 라이쩌우를 점령했다. 11.25 호치민은 인도차이나혁명이 여전히 민족해방혁명단계에 있음을 지적하면서 항전과 국가건설에 관한 지침을 제시했다. 선거로 구성된 국회는 1946.11.9 베트남민중의 민주적자유와 노동자·민중의 지배권향상을 규정한 베트남민주공화국의 혁명적초대헌법을 통과시켰다. 1946~54 프랑스제국주의에 맞서 1차인도차이나전쟁을 치른다. 1954.3~5 디엔비엔푸전투에서의 결정적승리로 프랑스는 항복을 선언했고 1954.7 베트남은 제네바협정에 의해 위도17도를 경계로 북과 남이 분단됐다. 남에서는 왕정이 붕괴되고 베트남공화국이 수립됐다. 혁명은 계속돼 1960.12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 1961.2 남베트남해방군이 결성됐다. 1962.1 남베트남에 인민혁명당이 창당됐다. 1964.8 통킹만사건이후 8.7 미의회에서 베트남전쟁안이 통과됐고 미국은 북베트남에 대대적인 공습을 가했다. 1965.2 미군은 자신의 동맹국들을 베트남으로 끌어들였으며 베트남중부지역은 전쟁터가 됐다. 1969.6.6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해방지구에서 인민대표자회의가 열려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가 수립됐다. 1973.1.27 파리평화조약이 체결됐다. 1975.3 남베트남해방군은 베트남공화국정부에 대한 총공세를 펼쳤다. 해방군은 4.29 사이공해방전투인 <호치민작전>을 개시했고 베트남공화국정부는 무너졌다. 1976.4.25 베트남남북총선거가 실시됐다. 6.24~7.3 베트남인민회의1차대회가 개최돼 통일된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을 수립했다.

혁명은 세계 곳곳으로

20세기 라틴아메리카에서도 혁명이 전개됐다. 1959.1 쿠바민중은 친미군사독재정권을 전복하고 라틴아메리카에 첫노동자·민중의 정권을 수립했다. 1961.4.16 카스트로는 쿠바혁명을 사회주의혁명으로 선언하고 혁명을 영도할 노동계급의 통일적당으로 1961 인민사회당과 <3.13혁명지도부>를 통합하여 <통일혁명조직>을 결성했다가 1962.3 이를 쿠바사회주의혁명통일당으로 바꿔 유일집권당으로 선포했다. 1965 쿠바공산당으로 개칭됐다. 1963.10 새로운 토지개혁법령을 시행해 부농경리를 청산하고 농촌경리의 사회주의적개조를 실시했다. 1976.2 쿠바의 새헌법은 쿠바가 노동자농민들과 기타근로자들의 사회주의국가임을 선포했다.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에 참여한 체게바라는 아르헨티나출신으로 라틴아메리카의 해방과 독립을 꿈꿨으며 볼리비아의 민족해방혁명에 기여하다 전사했다. 1970년대 칠레의 아옌데정권도 독립된 민주주의정권을 수립했으나 친미군사쿠데타에 의해 전복됐다. 니카라과의 민족해방무장투쟁과 멕시코의 사파티스타무장투쟁도 벌어졌다.

1954~62 알제리민중은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의 지도밑에 프랑스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통치를 청산하고 민족적독립과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족해방전쟁을 벌였다. 알제리는 16세기초 오스만제국에 예속됐다가 18세기 독립해 1830 프랑스에 강점된뒤 프랑스식민지로 프랑스총독정치치하에 있었다. 2차세계대전후 민족해방투쟁이 점차 무장투쟁으로 발전해 1947말 알제리산악지대에 <민주주의적자유승리운동>과 관련된 지하조직들이 거점을 형성했다. 1954.3 통일행동혁명위원회가 창건됐다. 이해 10.10 통일행동혁명위원회는 민족해방전선으로 개칭하고 민족해방군을 조직했다. 1955말 노동자·농민을 비롯한 근로자들과 민족자본가들까지 광범위하게 망라됐다. 1956.8 알제리혁명의 강령을 채택하고 지도기관을 선출했으며 무력건설문제를 토론했다. 1957 알제리민족해방군은 확대장성됐다. 1958.9.19 민족해방전선은 알제리공화국을 선포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일부지역에는 지방행정기관들이 조직돼 개혁정책을 실시했다. 민족해방전선은 알제리민중들의 반프랑스대중투쟁을 조직전개했다. 미국과 나토는 프랑스군을 지원했다. 1962 알제리민족해방군은 프랑스침략군에 대한 최후포위작전을 벌였다. 1962.3 프랑스는 알제리에서 군사행동을 중지하며 알제리의 자결에 관한 국민투표실시를 규정한 에비앙협정을 조인했다. 1962.7.1 국민투표가 실시됐으며 7.5 독립을 선포하면서 130년식민상태로부터 해방돼 민족적독립을 이룩했다.

이란은 19세기중반부터 영국과 러시아의 침략을 받았다. 1857 파리조약으로 영국에게 일부영토를 빼앗겼고 1906 입헌군주제로 됐으며 1907 러시아·영국이 양분해 경제적으로 수탈했다. 1차대전당시에는 러시아·영국·터키의 전쟁터로 됐다. 1919 영국의 보호령에 들어가며 식민지화됐다. 1925 파흘라비왕조가 들어선다. 이란의 주요경제명맥은 1909설립된 영국이란원유회사가 장악하고있었다. 2차대전후 원유회사의 국유화를 위한 투쟁이 전개됐다. 모사데크정부는 원유공업국유화법령을 채택하고 1952말 영국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1953.8미CIA공작으로 모사데크정부가 전복됐다.

1963.6 콤에서 이슬람성직자 호메이니의 지휘아래 반정부투쟁이 시작됐다. 1978.1.9 호메이니에 대한 날조된 신문기사에 항의한 신학교학생들이 정부당국에 의해 학살됐다. 이사건을 계기로 봉기가 일어나 1978.9 10만명의 시위가 일어났고 9.8 약 5000명의 시위군중이 목숨을 잃었다. 대중적시위와 노동자들의 태업이 벌어졌다. 정치적위기에 몰린 파흘라비를 위해 미군은 <반란진압전문가>를 이란에 파견하고 미7함대항공모함을 페르시아만에 집결시켰다. 1979 이란에 있는 미국기관이 습격파괴되고 연일40여만명의 시위가 계속되자 파흘라비는 1.16 해외로 도주했다. 항쟁은 무장폭동으로 발전해 황제의 궁전을 점령했다. 2500년간의 군주제가 무너지면서 4.1 이란이슬람공화국을 수립했다. 친미예속정권이 무너지고 민족해방숙원이 이뤄진 순간이었다. 이집트는 1952.7.23 친영봉건왕조를 뒤집어 엎고1953.6.18 공화국을 건설했다. 대외정책으로는 블록불가담정책을 실시하고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반대했다. 1977 카다피는 리비아아랍사회주의민중공동체를 건설해 제국주의로부터 독립된 국가를 유지했으나 2011 미제침략세력에 의해 학살됐다. 시리아·레바논헤즈볼라·팔레스타인하마스·이라크시아파 민병대등이 제국주의적침략에 맞서 투쟁을 계속하고있다.

스스로 강해지지못했다

20세기가 혁명의 세기로 빛나는데서 러시아혁명의 역할은 지대했다. 그한계·오류도 분명했다. 한마디로 한세기를 넘기지못하고 소비에트정권이 붕괴됐다. 제국주의세력의 와해책동은 강력했다. 1918~22 5년간의 소련의 1차조국전쟁시기때의 미국·영국·프랑스·일본의 직접적인 군사적간섭도 그랬지만 2차세계대전전과 후에도 소련의 붕괴만 호시탐탐 노렸다. 특히 중·소분쟁을 조장하고 대중매체를 동원한 소련에 대한 악의적인 왜곡모략선전이 심각했다. 미국은 평화를 가장한 내부와해책략을 구사했다. 1980년대 레이건정부의 <스타워즈>정책은 소련과의 군비경쟁을 촉발하며 소련의 경제적위기를 촉진했다.

발전된 자본주의공업체계를 갖추지못해 농업국가나 다름없던 초기소련이 군사·경제·과학·기술·문화의 모든면에서, 세계패권국인 미국과 견줘 손색없는 사회주의국가로 된것은 소련민중의 위대한 투쟁의 결과다. 혁명의 전취물들을 보위하지못한것은 소련사회주의가 객관·물질중심의 사상으로 주체·민중을 중심으로 보지못한데 본질적인 원인이 있다. 러시아혁명은 레닌이 레닌주의·볼셰비키·소비에트의 주체혁명역량을 강화하면서 승리할수 있었다. 자본주의멸망의 필연성과 1국적사회주의혁명승리의 과학적확신도 필요하지만 혁명을 직접 담당수행할 주체역량의 준비는 결정적이다. 레닌 스스로 말했듯 혁명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당·조직역량은 그혁명을 끝까지 완수하고 지켜내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혁명이후 레닌은 <공산주의는소비에트더하기전기화>라 하며 상대적으로 전기화·기술혁명을 강조했다. 레닌은 전기화를 다이룬 소련을 보지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소비에트를 강조하지않은것은 아니나 소련사회주의는 혁명의 전진에 맞게 발전하지못하고 좌절했다. 특히 과도기계선을 잘못 그어 성급하게 혁명의 완성을 선언하는 우경주의적오류를 범했다. 스탈린사후 소련에서는 혁명의 유산들이 잊혀지기 시작했고 혁명적원칙들이 사라졌다. 국제주의가 사라지고 패권주의가 기승을 부렸다. 중국은 노동계급의 혁명적당이 집권하고 사회주의적민주주의의 시책을 시행하면서도 과도한 계급독재정책을 시행하며 좌경적오류를 범했다. 노동자·민중의 혁명적열의와 창조적적극성을 이끌어내지못하고 단결의 집단주의적원칙을 구현하는데 장애를 조장했다. 결국 중국사회주의도 사회주의원칙을 저버리고 자본의 자유로운 유입을 위한 사적소유와 시장경제를 허용했다. 혁명적원칙을 끝까지 고수한 북은 소련붕괴이후 1992.4 <평양선언>을 발표하며 인민대중중심의 사회주의를 건설하겠다고 천명했다. 김일성주석의 서거직후 북은 더욱 강력한 주체혁명역량을 갖춰야했다. 20세기마지막시기 <고난의행군>·강행군시절,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선군정치로 새로운 혁명의 세기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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