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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열리고 배나무에서 배가 열린다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열리고 배나무에서 배가 열린다

 

 

늘 김정일총비서는 북의 혁명이 3번의 ‘고난의행군’을 겪었다고 말했다. 항일유격대가 눈보라속에 혈전 100일행군을 하던 1938~1939년, 북이 김일성주석의 서거직후 대자연재해와 최악의 식량난이 있었던 1990년대중반 그리고 1956년 8월종파사건때다. 1956년사건이 1950년대3년전쟁보다 더 간고했다는 뜻이다. 도대체 어떤 사건이기에 김총비서가 그렇게 평했겠는가.

 

김일성주석(당시 수상)은 소련에서 스딸린이 지명한 후계자를 밀어내고 등장한 흐루시초프를 매우 경계했다. 직접 흐루시초프를 만나본 김주석은 단번에 그 기회주의적 본질을 꿰뚫어봤다. 실제로 코리아전중에 소련은 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았다. 김주석은 그때 소련이 제대로 지원했다면 전쟁의 결과가 달랐을 것이라고 자주 회고했다. 흐루시초프는 결국 까리브해위기 때 케네디에 밀려 실각됐다. 허나 소련에 그 우경적인 제국주의와의 평화공존노선은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다. 또 코메콘(COMECON, 상호경제원조이사회)을 중심으로 사회주의나라들을 수직계열화하려는 노선도 달라지지 않았다.

 

소련은 동구와 꾸바, 베트남을 자국의 중공업을 중심으로 한 국제경제체계인 코메콘에 포함시켰다. 가령 꾸바가 사탕수수를 집중적으로 재배해 소련에 보내주면 소련이 꾸바가 원하는 중공업제품을 우호적인 조건으로 보답하는 식이다. 이것은 미국·유럽과 같은 제국주의나라들이 제3세계의 식민지를 착취하는 것과는 분명 차원이 다른 진일보한 국제협력체제였다. 허나 코메콘에 속한 사회주의나라들의 경제자립성을 훼손했다. 당시 소련이 북에 요구한 것은 과일재배였다.

 

북의 현실은 전후복구건설을 위해 소련으로부터의 경제지원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잿더미에서 경제를 재건하는 것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 못지않게 간고했다. 여기에 친소련파들과 소련이 안팎에서 강하게 압박했다. 허나 김주석은 이에 굴하지 않고 중공업을 우선하고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키는 독창적인 노선을 제기하고 이를 관철시켰다. 이미 소련의 소극성과 기회주의성을 체험한 김주석에게는 중공업을 포기하고 과일재배만 해서는 미래가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반면 소련을 유학하거나 ‘유식’한 친소련파들은 중공업우선노선이 맑스와 레닌의 원전에 없다며 김주석의 중학중퇴학력을 겨냥하며 ‘무식’하다고 비난했다.

 

한편 중국의 경우는 더 심각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다른 모든 군사지휘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코리아전에 중국군의 참전을 관철한 혁명가다. 자기 대신 아들 마오안잉(母岸英)을 참군시키기도 했다. (마오안잉은 김주석의 배려로 평양에서 복무했지만 폭격으로 사망했다.) 허나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이 실패하여 류사오치(劉少奇)로 주석직을 넘기게 되며 권력을 상실해가자 이성을 잃었다. 마오쩌둥은 군중을 선동해 류사오치를 실각시키고 극좌적인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을 황폐화시켰다. 마오쩌둥의 대북정책도 한계를 넘겼다. 항일시기 동만에서 벌어진 반민생단사건이 중국내에서와 타국과의 관계에서 재현됐다고 보면 된다. 8월종파사건의 주동은 친소파가 아니라 친중파였다. 마오쩌둥은 1957년 10월혁명40주년기념 모스크바행사장에서 만난 김주석에게 정식으로 깊이 사과했다.

 

김주석은 인사에서 정권의 요직은 진보적인 민족주의자들에게 배려하고 당의 요직은 김주석이 지도한 조선인민혁명군이나 조국광복회 출신이 아닌 다른 그룹의 공산주의자들에게 배려했다. 그러다보니 김주석과 노선을 달리하는 세력이 당중앙의 과반을 넘었다. 그리고 그들은 정권을 틀어쥘 때를 기다렸다. 마침 김주석은 소련의 우경화와 중국의 좌경화를 경계하고 경제문제해결의 예비를 찾으며 외교적 고립을 피하기 위하여 동구를 순방했다. 이 때다 싶은 친중국파는 친소련파와 손을 잡고 정치쿠데타를 추진했다. 귀국후 열릴 당중앙회의에서 김주석의 경제노선을 비판하며 당권을 찬탈하려고 획책했다.

 

생애에서 가장 큰 정치적 위기를 맞은 김주석을 결사적으로 옹호보위한 세력은 항일빨치산들이었다. 그 앞장에 최현과 김일이 있었다. 최현은 당중앙회의장에 권총을 차고 들어가 김주석에 대한 비난연설을 준비하던 발표자들의 이마에 권총을 들이대며 알아서 하라고 했다. 겁을 먹은 그들은 비난연설을 찬양연설로 바꿨고 정치쿠데타는 흐지부지 실패했다. 김주석은 이 기막힌 과정을 그냥 말없이 지켜봤다. 반민생단사건과 관련된 다홍왜회의부터 남로당사건을 다룬 당중앙6차전원회의까지 수많은 일들이 주마간산처럼 흘러갔을 것이다. 중앙위회의 후 김주석은 그들을 체포할 대신 원하는 나라로 갈 수 있도록 아량을 베풀었다.

 

김주석이 왜 그토록 강선제강소에 공을 들이고 또 그 노동자들이 기적적인 위훈을 발휘했는가의 배경이 여기에 있다. 북의 노동계급은 6만톤을 생산하던 압연기에서 12만톤의 강철을 뽑아내며 김주석의 중공업우선노선을 결사적으로 지지관철했다. 김주석은 이 한점의 불꽃을 들불로 타오르게 하고는 이를 ‘천리마운동’이라고 명명했다. 이렇게 해서 중공업을 우선하고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발전시키는 자립적 민족경제건설노선과 주체혁명역량에 기초하여 사회주의생산관계로의 전환을 사회주의공업화보다 우선할 데 대한 노선이 성공할 수 있었다. 북은 사회주의생산관계수립과 천리마운동의 놀라운 성과에 기초하여 사회주의공업화도 14년만에 끝냈다. 김주석은 어쨌든 1956년 당중앙위회의가 파행을 겪으며 비민주적으로 운영된 만큼 1958년에 그보다 한급 높은 당대표자회를 개최하여 모든 것을 바로 잡았다.

 

최근 김일성주석탄생100돌기념 태양절열병식장에 등장한 북의 강력한 첨단무기와 재래무기들은 60년전 김주석의 중공업우선노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때 북이 코메콘에 들어가 과일이나 재배했다면 오늘 꾸바나 베트남처럼 농업국가에 머물러있을 것이고, 반미하다가 맥없이 무너진 이라크, 리비아의 전철을 따랐을 것이다. 정치가의 선견지명과 노선의 중요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역사적 사례다.

 

김일성주석의 서거직후, 당시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중앙위 최용해위원장이 제일 먼저 김정일비서에게 충성맹세를 했다. 청년·청소년을 “김정일동지를 결사옹위하는 800만의 총폭탄”으로 준비시키겠다는 최용해의 말이 아주 유명하다. 최용해는 그후 황해북도당책임비서, 당중앙위비서를 거치며 주로 당사업을 전담했다. 한때 평양시 상하수도관리당비서로 좌천되는 듯 했으나, 이는 김정일총비서의 깊은 뜻이 담긴 일종의 검열·교양과정으로 보인다.

 

최용해는 지난 2010년 9.28당대표자회에서 정치국후보위원, 당비서로 선거되고 그 직전에 대장칭호를 받았다. 당비서는 이해되지만 대장칭호는 정말 뜻밖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4.11당대표자회에서 정치국상무위원으로 선거되고 그 직전에 차수칭호를 받으며 총정치국장으로 임명됐다. 김정일총비서가 최용해를 얼마나 믿고 있으며 총정치국장, 정치국상무위원자리를 얼마나 중시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8월종파사건을 ‘고난의행군’으로 보는 김정일총비서에게 총대로 김일성주석을 결사옹위한 최현의 아들 최용해는 김정은제1비서를 총대로 결사옹위할 조선인민군의 정치사상사업을 책임질 믿음직한 적임자로 여겨진 것이다. 김일성주석에게 최현이 있었다면 김정은제1비서에게 최용해가 있는 셈이다. 최용해는 지난 9.28당대표자회직후 금수산기념궁전(현 금수산태양궁전)앞 사진촬영에서도 당시 김정은군사위부위원장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군복 입은 최용해총정치국장의 모습은 생전의 최현을 빼닮았다. 마치 김정은제1비서가 김일성주석을 그렇게 닮았듯이. ‘800만의 총폭탄’맹세로 김정일비서중심의 유일적 영도체계 확립에 크게 기여한 최용해의 충실성이야말로 최현 그대로다. 김일성주석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의 ‘백전노장 최현’편에서 이를 두고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열리고 배나무에서 배가 열린다’는 뜻깊은 말을 남겼다.

 

조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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