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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 항쟁의기관차〉 중·홍콩 〈혼란가중· 배후미국·중입장확고〉

1997 홍콩반환을 앞두고 중·영은 협상에 들어갔다. 홍콩섬은 1841 영국에 의해 점령됐고 남경조약으로 정식 양도됐으며 1860 2차아편전쟁후 구룡이 대영제국에 귀속, 1898 신계지역이 99년간 조차됐다. 2차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이 대륙에 수립됐다. 1971.10.25 유엔에서 대만이 스스로 탈퇴하고 중의 가입승인이 통과됐다. 1979.1 미는 대만과 단교했고 중국과 수교한다. 영은 1950 중과 수교했다. 1984 중·영사이에 홍콩반환협정이 체결돼 1997.7.1 중에 이양됐다. 홍콩은 향후50년간 기존체제를 유지하는 1국양제가 적용돼 실시됐다. 이미 1983 주강삼각주서부와 홍콩을 잇는 다리가 제안됐고 그 구상이 심화돼 2018 강주아오대교가 만들어졌다. 반환협정체결이후인 1986 홍콩증권거래소가 개장됐다. 홍콩은 오랜 준비과정을 거쳐 중에 이양된것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홍콩은 중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장점이 뚜렷한 지역이었다. 중이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고 꾸준히 발전해가면서 양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홍콩이북지역의 심천을 비롯한 광동지역이 첨단산업등을 받아들이며 빠르게 발전해갔고 광동홍콩마카오특구는 홍콩인들에게 더 나은 삶을 의미하기보다 중으로의 편입이라는 의미가 더 강했다. 2014.9 우산시위는, 2017홍콩행정장관선거에 1200여명안팎으로 구성된 후보추천위원회에서 50%이상의 지지를 받은 사람만 입후보할수 있도록 하는 안이 전인대에서 통과되자 반중인사를 배제하려는 의도에 반발하며 일어났다. 한마디로 직선제를 요구한것이고 반중인사도 선거에 나가서 행정장관이 될수 있게 하라는 요구였다. 시위는 성과없이 끝났다. 2019.6 범죄인송환법이 제정된 데 반대해 다시금 시위에 불이 붙었다. 시위대는 한때 200만을 헤아렸다. 그 배경에는 경제적으로 힘든 시대에 홍콩인들에게 이익이 되지않는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8.6 홍콩시위주도자들과 미외교관이 만나는 장면의 사진이 공개되기도 했다. 중정부는 <배후에미국이있다>고 강력비난했다. 실제 시위자들은 미성조기와 영유니언잭을 들고 시위하는등 미영의 지지를 호소하고있다. 반면 중오성기를 훼손하거나 불태우면서 반중정서를 표출하고있다. 북대하회의후 중정부의 입장은 홍콩에 대한 온건대응기조였으나 홍콩이북심천지역에서 군대를 포함한 경찰병력의 훈련이 진행되는등 무력진압의 가능성이 커졌다. 8월에는 경찰의 실탄경고사격이 있었고 중국경절인 10.1 처음으로 총격피해자가 나타났다. 9월에 송환법철회가 발표됐으나 시위는 계속되고있다. 11.4 시진핑은 공안부장을 배석시킨 자리에서 캐리람행정장관을 접견하고 <법에따라폭력활동을진압하고처벌하는것은홍콩의광대한민중의복지를보호하는것>·<조금도흔들리지말라>고 격려했다. 자본주의체제를 선전하는 홍콩자유주의자들의 반중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시진핑은 10.1 건국70돌기념식에 인민복을 입고 참석했다. 중국공산당의 확고한 혁명전통·혁명성·인민성을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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