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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巨星을 追慕한다 (2) 夢陽 呂運亨

민족일보 서기1961년 5월12일(음3월28일 을사) (금요일) 


잃어버린 巨星을 追慕한다 (2) 夢陽 呂運亨



夢陽은 民主主義의 化身이다 그는 兩班집안에서 태어났어도 平凡했고 平凡한 가운데 哲學을 가진偉大한人物이었다



그는또한 仁慈하여 乞人에對해서도 아무런 差別을 두지않았다 그러나 同胞를抑壓하고 搾取하는 兩班階級에게는 猛虎같은 분이었다



나는 지금부터 四十二年前 上海臨政을 만들때 그를 처음만났다 그해 十一月 黨是 三十四歲이던 夢陽이 原敬內閣의 招請을 받아 日本으로 갈때 隨行員의 한사람으로 따라갔다 그때 田中陸軍大臣이『당신네들 獨立萬歲란 한 개가 짖으면 여러 개가 따라 짖는 格이다』라고 말하자 夢陽은 『당신은 새벽에 닭이 우는 것을 모르느냐』고 말하여 田中를 失色케 했었다



 一九二○年 一月號 中央公論에 古野作造博士가 『내가 中國이나 印度의革命家를모두 만나보았지만 理論과實踐, 雄辯과 그 훌륭한 身體등을보아 朝鮮의 呂運亨같은분이없었다』는 글을쓴것은 夢陽이 黨是公産世界에서나 資本主義世界를 莫論하고 얼마나 人氣가 있었나하는 것을 端的으로 表現한다 그러기에 日本은 夢陽만을만나면 韓國問題를 解決할줄 알았던것이다



六年동안의 獄中鬪爭을 겪고나서도 元來 革命的인 性格을 타고난 夢陽은 世界情勢에 따라 解放이 가까와온다는것을 洞察하고 建國同盟을地下組織하였다 解放直前에 建國同盟은 彈壓을 받기始作하였다 解放後 夢陽의 人氣는 한결 높았고 建國準備委員會의 委員長이 되었다



夢陽의思想에대해서는 여러억測이있다그러나 一九二九年 公判記錄에의하면 裁判官이『피고는 唯物論者냐 共産黨員이냐』고 물었을 때 몽양은『나는 어렸을때부터 基督敎信者다 따라서 哲學的으로 볼때는唯物論者가 될수없지만 가난한 사람을위해서 싸운다는 立場에서는 共産主義者라 할수있을것이다』라고 答辯했다.



그런데 夢陽이 共産黨에대해 一聲을加한 것은 『朝鮮의「프로레타리아트」利益은 全世界 「프로레타리아트」의 綜合된 利益보다크다』고 말한것이다 여기서 그가 確實히 大衆的이며 愛國的이라는面이나타나있다



統一路線에 있어 夢陽은 一貫된 自主性을갖고美‧蘇어느側에 대해서도 一邊倒로치우치지 않았다 美‧蘇共委黨是 德壽宮에서「아놀드」와「스티코프」의두손을잡고가운데서서찍은寫眞이있다 이것이 바로 그의美‧蘇 및 統一에대한 態度이다 더욱 黨是美國에서 五,六名의新聞社社長이와서 夢陽을 만나『貴下가 統一된後 國家元首가되어 蘇聯이 淸津港을要求할境遇 어떻게하겠는가』라는 물음에 『美國은 太平洋沿岸에 重要한 要衝地인 鎭海港을 要求하지않을것이다』라고 말하여 그들이 歸國하여「亞細亞의 指導者」라는 記事를 낸일이있다



一九四七年七月十九日 下午一時十五分 夢陽은 兇彈에 넘어졌다 黨是우리는 여러情報에接하고 夢陽의 外出을 삼가도록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여보시오 내生命이 무어길래 그리아껴야겠소』라고만 對答했다 그날 夢陽은「마샬」國務長官이 夢陽에게보낸 秘密特使金龍中氏를만나「메시지」를 傳하고 서울運動場體育會 會議에 參席하기위해 옷을바꾸어 입고자 歸家途中 惠化洞「로타리」에서 兇彈을 맞았다



그때「로타리」길목엔故意로「트럭」이車길을막고있어 兇漢은 夢陽의車에올라타서쏘았다그때警察도있었다 



夢陽이 살아있다면 그는 무척苦生했을것이다 그러나 그가살아있다면 六‧二五는 發生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崔 謹 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