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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4월20일 토요일 16:3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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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신문 〈봉화혁명사적지를 찾아서〉

노동신문은 10일 <봉화혁명사적지를 찾아서>를 게재했다. 

신문은 <먼저 찾은 곳은 봉화산기슭에 정중히 모셔져있는 김형직선생님의 동상>이라고 전했다.

이어 <명신학교>를 소개했다.

<명신학교>에 대해 <조국해방의 밝은 새날을 앞당겨올 후대들을 키운다는 뜻에서 명신학교라고 지으시였다>고 전했다.

더해 <교실앞벽면에 씌여진 <지원>이라는 글발>에 대해 <나라의 독립과 번영,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서는 그 어떤 난관과 시련이 앞을 가로막아나서도 조금도 굴함이 없이 끝까지 싸워야 하며 조국해방을 위한 혁명위업은 당대에 하지 못하면 대를 이어서라도 기어코 완수해야 한다는 사상이 담긴 글발>이라고 밝혔다.

이어 <김형직선생님이 체포되신 후 일제경찰놈들과 싸우시던 강반석 어머니의 투쟁모습을 되새겨보게 하는> 사적물들에 대해 소개했다.

또 <김형직선생님께서 비밀모임을 가지군 하시였던 바위터>라며 <주체6(1917)년 6월 봉화산모임을 지도하시는 김형직선생님의 모습을 형상한 모자이크벽화가 모셔져있었다>고 전했다.

아래는 전문이다.


력사의 새벽길에 새겨진 불멸의 자욱

봉화혁명사적지를 찾아서
 
소나무며 전나무, 참나무를 비롯하여 여러 수종의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룬 봉화산, 갖가지 꽃들이 활짝 피여난 산기슭을 따라 옛 모습그대로 보존되여있는 사적건물들…
유서깊은 봉화혁명사적지의 전경을 바라보느라니 한평생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모든것을 다 바치신 불요불굴의 혁명투사 김형직선생님의 존귀하신 영상이 어려와 가슴이 뜨거워졌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나의 아버지는 우리 나라 민족해방운동의 선구자의 한사람으로서 1894년 7월 10일에 만경대에서 탄생하여 1926년 6월 5일 망국의 심야에 한을 품고 돌아갈 때까지 일생을 혁명에 바친분이였다.》
우리가 참관자들과 함께 먼저 찾은 곳은 봉화산기슭에 정중히 모셔져있는 김형직선생님의 동상이였다.
수수한 두루마기차림으로 교탁을 짚으시고 책을 펼쳐드신 김형직선생님!
마치도 김형직선생님께서 우리를 반겨맞아주시며 시련과 난관이 겹쌓여도 혁명의 길을 끝까지 가라고 말씀하시는것만 같았다.
강사는 일찌기 지원의 큰뜻을 품으시고 고향 만경대에서 혁명활동을 벌리시던 김형직선생님께서 보다 적극적인 투쟁을 위해 주체5(1916)년 3월 봉화리로 투쟁무대를 옮기신데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참관자들을 명신학교로 이끌었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이전에 《개량사숙》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던 글방을 학교로 새로 꾸리시고 그 이름도 조국해방의 밝은 새날을 앞당겨올 후대들을 키운다는 뜻에서 명신학교라고 지으시였다.
교실안에 있는 교탁과 종, 벽시계와 조선지도를 비롯한 여러 사적물에서는 후대들에게 애국의 넋을 심어주시던 김형직선생님의 손길이 뜨겁게 느껴졌다.
눈길을 류달리 끄는것은 교실앞벽면에 씌여진 《지원》이라는 글발이였다.
나라의 독립과 번영,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서는 그 어떤 난관과 시련이 앞을 가로막아나서도 조금도 굴함없이 끝까지 싸워야 하며 조국해방을 위한 혁명위업은 당대에 다하지 못하면 대를 이어서라도 기어코 완수해야 한다는 사상이 담긴 글발을 가슴에 새겨안을수록 민족수난의 세월 갈길 몰라 헤매이는 인민들에게 지원의 뜻을 심어주시고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새 력사를 창조하신 김형직선생님의 업적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절감하게 되였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주체6(1917)년 11월 여기서 수업도중 갑자기 달려든 일제경찰놈들에게 체포되시였습니다.일제교형리들은 야수적방법으로 선생님의 혁명적절개를 꺾어보려고 미쳐날뛰였지만 그 무엇으로써도 김형직선생님의 혁명적신념과 의지는 꺾을수 없었습니다.》
강사의 해설을 듣느라니 노래 《남산의 푸른 소나무》에 담으시였던 김형직선생님의 신념의 맹세가 심금을 세차게 울리였다.
명신학교를 돌아서니 학교건물뒤에 자리잡은 살림집이 나졌다.김형직선생님께서 가족들과 함께 계시던 집이였다.집뜨락에 들어서니 왼쪽에는 베틀과 물레, 나무절구 등이 있는 허청간이 있었다.살림방에는 김형직선생님께서 체포되신 후 일제경찰놈들과 싸우시던 강반석어머님의 투쟁모습을 되새겨보게 하는 농이 있었고 부엌에는 반동이, 망, 단지를 비롯하여 어머님의 체취가 어려오는 사적물들이 있었다.
김형직선생님께서 바로 이 집에 계실 때 평양학당골에서 조선국민회를 결성하시였다고 하는 강사의 말을 들으며 살림집을 돌아보는 우리의 눈앞에 일제의 야수적탄압속에서도 조선국민회와 같은 강위력한 지하혁명조직을 결성하시여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을 새로운 앙양에로 강화발전시키신 불요불굴의 혁명투사 김형직선생님의 모습이 숭엄하게 안겨왔다.
비밀문건보관장소와 박우물, 김형직선생님께서 가족들이 봉화리로 이사오시기 전에 생활하시던 배나무집 그리고 몸소 가꾸시던 배나무를 돌아본 우리는 봉화산에 올랐다.
풍치수려한 봉화산의 경치를 부감하며 한동안 올라가니 김형직선생님께서 비밀모임을 가지군 하시였던 바위터가 안겨들었다.바위터에는 주체6(1917)년 6월 봉화산모임을 지도하시는 김형직선생님의 모습을 형상한 모자이크벽화가 모셔져있었다.
국내외각지로 조직을 확대하기 위한 방도를 밝혀주시는 김형직선생님, 그이의 가르치심을 받아안으며 격정을 금치 못해하는 조선국민회 회원들…
오로지 조국과 인민, 혁명을 위해 심신을 깡그리 바치신 김형직선생님의 고귀한 발자취가 깃들어있는 봉화산!
산마루에 올라서니 앞이 환히 트이였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바로 이 산마루에 거연히 서시여 해방된 조국의 밝은 미래를 그려보시였으리라.
푸른 숲 설레이는 봉화산에서 우리는 김형직선생님께서 헤쳐가신 력사의 새벽길을 다시금 그려보았다.
그 길은 결코 누구나 걸을수 있는 길이 아니였다.대를 이어서라도 민족해방의 력사적위업을 반드시 수행하여야 한다는 지원의 뜻을 안으신 김형직선생님께서만이 걸으실수 있는 참다운 애국의 길, 성스러운 혁명의 길이였다.
봉화혁명사적지를 떠나며 우리는 확신하였다.
우리 나라 혁명운동력사에 쌓아올리신 김형직선생님의 고귀한 혁명업적은 인민의 가슴속에 영원히 간직될것이며 조국청사에 길이 빛날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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