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신문은 27일 <꾸르스크격전>을 소개했다.

신문은 <꾸르스크격전은 1943년 7월5일-8월23일 쏘련군이 파쑈도이췰란드군과 진행한 치열한 전투>라고 소개했다.

이어 <50일간에 걸친 꾸르스크격전에서 쏘련군은 도이췰란드군 30개사단(그중 땅크사단7개)를 격멸하고 승리함으로써 전략적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고 해설했다.

끝으로 <승리를 거둘수있은 요인은 땅크를 잘 활용한데도 있지만 중요하게는 촌토를 사수하려는 쏘련군인들의 애국정신에 있다>고 짚었다.

아래는 전문이다. 


력사의 갈피에서
꾸르스크격전
 
《쓰딸린그라드격전이 나치스군대의 쇠퇴를 가져왔다면 꾸르스크격전은 이 군대를 파국에로 몰아넣었다.》
이것은 꾸르스크격전이 가지는 군사전략적의의에 대하여 쓰딸린이 한 말이다.
꾸르스크격전은 1943년 7월 5일-8월 23일 쏘련군이 파쑈도이췰란드군과 진행한 치렬한 전투이다.
쓰딸린그라드격전과 동기공격작전에서 녹아난 파쑈도이췰란드군은 전략적주도권을 틀어쥘 목적밑에 꾸르스크돌출부를 새로운 공격대상으로 정하였다.히틀러는 1943년 4월 극비명령에서 《꾸르스크지역에서의 승리는 전세계를 비치는 〈홰불〉로 될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꾸르스크지역에는 방대한 도이췰란드군병력이 투입되였다.
도이췰란드군은 이 전투에 5개 집단군의 90만명을 투입하였다.쏘련군은 14개 집단군과 5개 군단을 포함한 약 133만명의 병력으로 대응하였다.이외에도 전략적예비부대로서 7개 집단군과 10개 군단이 있었다.
몇해전 로씨야의 한 잡지는 꾸르스크격전에 참가하여 용감히 싸운 한 쏘련군관의 무훈담을 소개하였다.
그에 의하면 소대장으로서 그가 속한 중대는 1943년 7월 6일 아침 8시에 전투에 진입하였는데 16시경에 살아남은 전투인원은 중대에 10여명밖에 되지 않았다.소대를 지휘하면서 공격해오는 도이췰란드군과 싸우던 그는 1m밖에서 지뢰가 터지는 바람에 중상을 입었다.파편에 두개골이 맞아 소뇌를 다쳤다.
전투에서 세운 공로로 그는 붉은별훈장을 수여받았다.그에게 훈장을 수여할데 대한 명령서에는 이렇게 씌여져있었다.
《알표로브동지는 자동총소대 소대장으로서 꾸르스크주 벨고로드구역 먀쏘예도브-쎄브류꼬브 두 주민지역사이에서 소대원들과 함께 아군방어구역에 대한 적의 반공격을 물리치는 전투에 인입되였다.
알표로브동지는 소대를 능숙하게 지휘하여 적의 반공격을 물리치고 40명가량의 적자동보총수들을 포위소멸하였다.그리고 그는 직접 육박전에 참가하여 15명의 히틀러군을 소멸하였다.전투에서 알표로브동지는 중상을 입었으나 의식을 잃을 때까지 소대를 지휘하였다.》
7월 12일 쁘로호로브까지역에서는 최대규모의 땅크전이 벌어졌다.그곳은 워로네쥬전선군의 《급소》나 같은 곳이여서 만일 도이췰란드군의 땅크들이 이곳만 통과하게 되면 일거에 꾸르스크에 가닿을수 있었다.그리하여 이름없던 쁘로호로브까지역은 일시에 쌍방의 중요한 전략적지점으로 되였다.
50일간에 걸친 꾸르스크격전에서 쏘련군은 도이췰란드군 30개 사단(그중 땅크사단 7개)을 격멸하고 승리함으로써 전략적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로씨야정부수상 메드베제브는 꾸르스크격전승리 70돐에 즈음하여 로병들을 축하하면서 《인류력사에서 이러한 전투는 단 한번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것이다.기술기재들이 그렇게 많이 집중된적은 없었다.그러나 기본은 인간의 힘과 정신이 집중된것이다.여기서 도이췰란드군의 기가 꺾이였으며 위대한 조국전쟁과정은 역전되였다.》라고 강조하였다.
정치가들은 물론 력사가들도 쏘련군이 꾸르스크격전에서 승리를 거둘수 있은 요인은 땅크를 잘 활용한데도 있지만 중요하게는 촌토를 사수하려는 쏘련군인들의 애국정신에 있다고 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