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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투병양심수 김혜영의 삶과 길③] 사회활동의 시작과 또다시 찾아온 시련

[편집자주] 암투병에 공황장애까지 겪고 있는 김혜영양심수가 박근혜<정부>의 공안탄압과 인권유린에 맞서 20일째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다. 생명이 위태로운 김혜영양심수가 하루빨리 석방되길 바라며 학생운동시절부터 지금까지 자주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해온 코리아연대 김혜영회원의 삶과 길에 대해 연재한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운동>

학생운동을 하며 구속과 아버지의 죽음까지 견뎌내면서 <다시 흔들리지 않겠다>고 결심한 김혜영양심수는 선배의 제안으로 8.15범민족대회준비를 도와주게 됐다. 그 활동을 하면서 김혜영양심수는 당시 자신에게는 대선배였고 구속도 됐던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남측본부 최진수사무처장이 수배상태였는데, <따뜻한 밥이라도 드시게 해야 할 거 같다>는 생각에 도시락을 준비해갔던 추억을 떠올렸다. 작은 것에 감동을 받는 모습에 김혜영양심수 자신도 감동을 받았다. 

그러면서 <운동은 사람으로 시작하는 것>, <한사람 한사람을 귀중히 여기고 한사람한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이후에도 김혜영회원의 모든 활동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었다. 최진수씨도 김혜영양심수의 그 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민권공대위활동과 99년 명동성당농성투쟁  

그해 8.15범민족대회를 탄압속에서 힘들게 치르고 본격적으로 범민련에 대한 탄압에 맞서서 민권공대위(민중의기본권보장과양심수석방을위한공동대책위원회)활동을 시작한다. 1997년 김영삼<정권>말기 범민련과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 <이적단체>로 규정되고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다. 이른바 정권교체가 됐지만 DJP연합이라는 한계 때문인지 1998년 김대중정권이 들어선 다음에도 공안탄압은 계속됐다. 범민련과 한총련의 모든 활동은 불법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최소한의 민주주의적 기본권을 보장하는 <이적단체>규정철회와 국가보안법폐지, 양심수석방을 위한 활동이 필요했고 김혜영양심수도 당시 그 활동에 참여했다.

1999년 김혜영양심수는 99통일대축전·10차범민족대회(민족의자주와대단결을위한99통일대축전·10차범민족대회)에 중앙집행위원으로 참여한다. 이 대회는 통일운동의 곡절을 딛고 통일운동진영의 단결이라는 주목할만한 성과를 이뤄내며 90년대통일운동을 승리적으로 결속하는 자리가 됐다. 

그러나 대회후 대회지도부에게 체포영장이 발부되면서 수배상태가 되자 이들은 범투본(미국과일본의한반도전쟁책동·경제침탈분쇄와국가보안법완전철폐·공안탄압분쇄를위한범국민투쟁본부)을 결성했다. 당시 강희남의장, 박창균통일선봉대장, 김양무상임부의장 등 범민련지도부는 명동성당에서 천막농성에 돌입한다. 당시 김혜영양심수도 지도부를 엄호하고 통일운동에 대한 탄압을 투쟁으로 분쇄하겠다는 의지로 규탄집회와 집단단식에 동참했다. 

양심수석방을 위한 활동 

그러던 중 2000년 6월 남북수뇌회담이 성사되고 6.15공동선언이 합의되면서 남북당국차원의 민족의 화해와 단합, 통일을 위한 활동이 전개되고 민간진영에서는 6.15공동선언실천민족공동위원회를 중심으로 활동이 이뤄지게 되자 통일운동은 자연스럽게 합법화되었다.

남북관계가 새로운 전환을 맞이했지만 남코리아사회의 진보와 민주주의는 아직도 먼 과제였다. 2000년이후 김혜영양심수는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에서 일하면서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반민주악법에 의해 구속된 양심수들의 석방을 위한 활동을 했다. 2002년에는 단국대동문이기도 한 차경애씨가 국가보안법위반혐의로 구속되자 그의 석방을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대안사회를 향한, 진보를 위한 연구와 실천 

2000년대 초반은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되고 2002년 총선에서 10명의 국회의원까지 당선되면서 진보운동의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던 시기였다. 김혜영양심수도 민주노동당당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2003년 7월에는 21세기코리아연구소연구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진보정당강화와 진보정치발전을 위한 연구와 실천에 매진한다.

연구위원활동 뿐만 아니라 매체사업을 비롯한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되는데 김혜영회원은 어떤 일이든 책임있게 해내는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활동했고 어렵고 까다로운 일앞에서도 힘든 내색없이 사람들과 토론하며 문제를 해결해내곤 했다. 늦은 밤까지 동료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것을 좋아했으며 누구나 그에게 자기얘기를 털어놓고는 했다. 

또다시 찾아온 시련 … <암투병은 스스로 단단해지는 과정>

그렇게 왕성하게 활동을 하던 중 2006년 다시금 뜻밖의 시련을 겪게 된다. 김혜영양심수는 <별밤>에서 <어느날인가부터 죽을 것같이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일어나보니 목이 안돌아갔다. 잠을 잘못자서 그런 건가라고만 생각했다가 약사의 권유로 병원에 찾아갔다. 결국 조직검사를 하고 갑상선암이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

스스로 <이렇게 피곤해서 죽는 거 아냐>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김혜영양심수를 아는 누구나 그 말에 동감할 정도로 김혜영양심수는 치열하게 생활하고 활동했다. 그러면서 얻게된 갑상선암에 대해 <갑상선암은 그냥 사람을 지치게 하는 암, 그걸로 죽지는 않지 않냐, 물론 잘못돼서 죽기도 하지만>이라고 담담하게 말하며 <그때는 저보다 가족이 더 놀란 거 같다.>고 했다. 

당시 김혜영양심수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남편인 코리아연대 이상준공동대표와는 민권공대위때 함께 활동했다가 21세기코리아연구소연구위원으로 다시 만나 인연을 맺게 됐다. 이상준공동대표는 결혼식을 하기전이었지만 김혜영양심수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바로 혼인신고를 한다. 김혜영양심수는 <예비시아버님이 저를 만나서 손을 꼭 잡아주시면서 네가 아파도 우리는 너에 대한 마음에 변함이 없다. 이런 말씀을 해주신 기억이 있다. 감사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2번의 수술을 하고 항암치료를 받았다. 목에 난 큰 수술흉터에 대해 <처음에는 그게 상처로 됐었다.>고 말했다.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제 상처를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게 몇달정도 갔던 것 같다.>고 밝히며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남편에게만 간혹 그 어려움을 나누었을 뿐이었다고 전했다. 자신도 말했지만 그는 아프거나 힘들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놓는 사람이 아니었다. 2007년에도 그는 2번의 방사선치료를 받았다. 

2015년 공안탄압저지를 위한 기독교회관농성을 하면서 김혜영양심수는 그때를 돌아보며 <그게 삶에서 좀더 단단하게 되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혜영양심수의 한 후배는 <김혜영선배를 보면 든든하다는 느낌이 든다. 선배의 삶에 이런 묵직한 경험들이 배경으로 있기 때문인 거 같다.>고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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