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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6 항쟁의기관차〉 양민학살

1950 코리아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은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조선이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협조할 것>이라며 보도연맹원 ·정치수들을 무차별검속하고 즉결처분했다. 이때 희생된 사람들의 수는 최소 20만명에서 100만명으로 알려졌다. 희생자수의 격차가 큰 이유는 양민학살지역이 전국적으로 광범위하며 지역마다 희생자수가 천차만별이기때문이다. 전쟁발발이전시기에 문경양민학살은 <공산비적토벌>을 명분으로 이뤄졌다. 제주와 여수·순천주변지역에서도 광범위하게 벌어졌다. 전쟁기간 미군에 의한 대표적인 양민학살중 하나는 신천군양민학살이다. 신천군은 전체인구인 14여만명중 3만여명이 학살됐다. 미군은 코리아인대부분이 <좌익>이라는 인식하에 양민학살을 당연시했다. 학살은 노근리처럼 직접적으로 자행된 곳도 있지만 주로 공중폭격의 형태로 벌어졌다. 브루스커밍스는 미군이 2차대전때 태평양전쟁구역전체에 투하한 50만3000t보다 많은 폭탄 63만5000t을 북에 퍼부었다고 밝혔다. 전쟁당시 미군사단장 윌리엄킨소장은 <(이남의 양민들은 전투지역에서 소개됐기때문에) 전투지역에서 눈에 띄는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한다며 사격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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