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9.15 인천상륙작전으로 미군이 코리아반도의 허리를 자르고 들어왔다. 인천으로 들어온 미군이 서울까지 오는데 14일이 걸렸다. 10월중순경 다시 미군이 전세에서 밀려 남으로 내려오고 1951.6 38선일대를 경계로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북에서는 <전쟁4계단에서수행해야할전략적방침>이 제시되고 마침내 1951.7 휴전회담이 시작됐다. 회담은 군사분계선문제로 논의가 지지부진하다가 1952.1 군사분계선문제가 기본적으로 합의되지만 포로교환문제가 쟁점화됐다. 이승만이 <보다강력한방법>인 원자탄의 사용을 요청하고 맥아더도 중국에 원자탄사용을 검토했다는 얘기는 악명높다. 북은 1951 <하기및추기공세>의 대표적 전투로 <1211고지방어전투>를 꼽는다. 1952.10.15 미국은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강원도해안 통천에서 인천과 같은 상륙작전을 추진했다. 그러나 사전에 이를 감지하고 은밀히 포화력을 집중시킨 후 불의의 타격을 가한 북에 의해 통천상륙작전은 격파됐다. 북에서는 <지상에서의공격과함께 수백척의함선과백수십대의비행기를동 원하여 통천상륙을꾀하는적들의기도를앞질러간파>·<강력하고집중적인포병화력타격을들이대어 완전히분쇄해버리도록> 했다고 밝혔다. 1952.12 북의 당중앙위5차전원회의가 진행됐고 12.30 최고사령관명령등을 통해 미군의 <신공세>를 저지했다. 1952.12.2~5 아이젠하워가 미대통령으로 당선된지 한달만에 코리아를 방문했다. 미군은 세계언론들을 모아 여론몰이용으로 <신공세>의 <스맥크작전>을 기획했으나 북의 1953.1 <정형고지전투>로 인해 파탄났다. 이로부터 북은 포화력의 중요성을 확인하고 지금까지 그 위력을 전략적으로 강화하고있다. 최근 북은 포병국장을 총참모장으로 파격인사하며 동시에 작전총국의 지휘성원도 교체해 언론의 비상한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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