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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5 항쟁의기관차〉 해방된 조국을 지키기 위한 전쟁

일제는 패망하면서도 사회주의세력의 진출을 두려워하며 미국에 굴복했다. 미제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원자탄의 위력을 시위하고 소련의 진출을 견제하고 코리아를 분단해 코리아남반부를 점령했다. 소련은 일제패망이후 <조선인민들에게고함>에서 조선은 조선인민의것이며 붉은군대는 지원과 원조를 아끼지않겠다고 밝혔듯이, 소련은, 혁명은 각국이 각국의 실정에 맞게 각국인민들 자신이 해야할 과업이라는 입장이었다. 조선에는 김일성조선인민혁명군사령관이 있었고 김일성사령관은 항일전쟁을 자체의 힘으로 수행했듯이 조선인민의 독립국가건설과 혁명과업수행도 조선인민 자체의 힘으로 해야한다고 봤다. 김일성주석은 1945.8.20 건당·건국·건군노선을 천명했다. 1945.10.10 북조선공산당중앙조직위를 건설하면서 혁명의 참모부인 당을 창건하는 문제를 가장 시급하게 해결했다. 남북으로 분단되고 남에 미군정이 들어선 조건에서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문제는 복잡했다. 김일성주석은 자체의 힘으로 나라의 독립을 실현하기 위해 북에서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을 철저히 수행하고 조선인민혁명군에서 단련된 핵심들로 정규군을 건설하며 북을 혁명적민주기지로 꾸렸다. 1948 남에서 유엔을 내세운 미국에 의해 단선단정이 획책되는 가운데 김일성주석은 남북연석회의를 추진하고 우리민족의 힘으로 1948.9.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건설했다. 결과적으로 북과 남에 2개의 정부가 대립했고 남에서는 미국의 괴뢰정권인 이승만정권을 반대하는 <빨치산>의 유격투쟁이 전개됐다. 1949 코리아반도는 사실상의 전쟁상태였다. 한편 김일성주석은 1946~49 중국국내혁명전쟁을 최대로 지원했다. 중국동북지역은 항일시기 김일성주석이 활동했던 지역으로서 군중지반이 튼튼했고 코리아에서 전쟁이 날경우 중국동북지역은 그후방이 된다. 중국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해 중화인민공화국이 건설되고 만주로 쫓겨난 장개석잔당의 완전한 제압을 앞두고있었다. 1949 소련은 원자탄개발에 성공하면서 미제국주의의 핵공격을 견제할수 있게 됐다. 반면 미국은 애치슨라인선언등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지역에서 발을 빼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이는 제국주의침략세력의 교활한 기만전일뿐, 오히려 전쟁을 노골적으로 추진했다. 당시 이승만은 <승공>을 주장하며 전쟁을 강력하게 호소해나섰다. 1950.6 덜레스미국무부고문은 서울에 방문해 38도선을 시찰한뒤 도쿄로 이동해 맥아더사령관등과 회담을 갖고 코리아전쟁계획을 확정했다. 이승만도 비밀리에 도쿄를 방문했다. 소련은 3차세계대전으로의 확대를 막기 위해 군대파견은 하지않았다. 중국도 중국인민해방군이 아닌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참전했다. 반면 미국은 유엔을 내세워 개입을 합리화했고 유엔군을 조작해 16개국을 코리아전선에 끌어들였다. 전쟁의 확대를 바란것이 누구였는가는 명확했다. 북은 전쟁초기 선제적인 반공격으로 우세를 점했다.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에 3일간의 월미도방어전으로 대항하며 <전략적후퇴>를 보장하고 1952 가을 제2의인천상륙작전으로 기획된 통천상륙작전을 차단했으며 1953.1 미군이 전쟁에서의 승리를 포장하고 국제여론을 조작하기 위해 기획된 정형고지전투에서 북의 성과적승리를 담보했다. 북은 철저히 전세를 주도하며 7.27 정전협정체결을 이뤄냈다며 승리적으로 평가하고있다. 북은 제국주의침략을 막아내고 코리아전역을 해방하기 위한 <조국해방전쟁>이라고 규정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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