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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8월16일 화요일 9: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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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6 항쟁의기관차〉 국제반파쇼세력의 반파쇼반전투쟁과 2차세계대전에서의 승리 

유럽에서의 인민전선형성

1930년대 프랑스는 정치·경제적으로 극도로 불안정한 시기였다. 1차대전과 2차대전사이 내각은 42번이나 교체됐고 실업자는 1933 100만명, 1935 200만명을 넘어섰다. 정치적불안과 경제적위기는 극우세력이 난립할수 있는 바탕이 되면서 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 걸쳐 반공주의·반사회주의를 기치로 내건 극우조직체가 폭넓은 지지를 획득했다. 공산당·사회당·CGT(프랑스노총)등이 분열된 현실은 파시즘의 집권에 매우 유리한 사회적조건이었다. 그러던중 1934.2 공산당은 <자본의유혈독재타도!노동자·농민정부만세!>구호를 내걸고 공화국광장에서 시위를 전개했다. 정부의 금지속에서도 파리노동자 약6만명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됐고 경찰대의 유혈진압으로 시위참가자9명이 사망하고 1000명이상이 부상당했다. 이에 노동자·민중이 격분했고 3일뒤인 2.12 CGT가 총파업에 결합했다. 여기에 공산당·사회당·CGTU(통일노총)이 적극 합류했다. 이총파업은 프랑스곳곳에서 이뤄졌고 노동자들이 대거 참여했으며 여러산업분야로 확산됐다. 시위에 참가한 노동자수는 전국450만명에 이르렀고 파리에서만 100만노동자가 참가했다. 이날 사회당주도의 반파쇼투쟁도 프랑스전역에서 100만명, 파리에서 10만명이상이 참가했다. 이시위에서 노동자·민중은 공산당·사회당의 통합을 촉구했다. 당시 한언론에선 <박수와노래,그리고<통합!>이라는구호가이대중들로부터터져나왔다.인민전선이우리의눈앞에서탄생하고있었다.환희와질서속에서>라고 보도했다. 파리와 교외를 제외하고 약346개지역에서 집회·시위가 전개됐고 최소161곳에서 행동통일이 이뤄지면서 반파쇼를 핵심내용으로 하는 인민전선운동이 시작됐다. <2월투쟁>이후 1934.3~5 프랑스전역에 247개 반파쇼투쟁위원회가 탄생했는데 여러위원회중에 사회당중심의 반파쇼지식인감시위원회와 공산당중심의 <암스테르담·플레이엘운동>이 반파쇼운동을 이끄는 핵심세력이었다. <암스테르담·플레이엘운동>은 1932.8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공산당중심의 반전대회에서 공산당과 CGTU의 대표로 구성된 대표단이 전쟁위험에 대한 투쟁의 구체적강령을 제기하고 이를 채택하면서 시작됐다. <암스테르담·플레이엘운동>의 발의자인 호망홀랑·앙히바흐뷔스는 1932.5 공동호소문을 통해 <정치적소속과관계없이모든남자와여자,모든노동자조직,모든세력과모든조직>에게 전쟁을 반대하는 국제대회에 참가할것을 촉구했다. 이에 공산당을 비롯해 인권동맹·평화와자유를위한여성동맹·양심적병역기피자동맹등의 단체가 호응했다. 1932.8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반전국제대회에는 27개국에서 2196명의 대표가 참가했으며 정치적으로는 공산주의자830명·사회주의자291명·무소속과그밖의단체들1041명이 참석했다. 선언문에서는 자본주의체제를 전쟁의 원인으로 규정하며 소련방위를 위한 피착취자들의 단결과 각국부르주아에 맞선 노동자들의 행동전개를 촉구했다. 1933.6 반파쇼유럽대회가 파리 플레이엘회관에서 열렸다. 프랑스공산당정치국이 암스테르담운동과 플레이엘운동을 결합시킬것을 결정하며 <암스테르담·플레이엘운동>이 본격화됐다. 한편 코민테른집행위정치위원회는 1934.6 프랑스공산당에 서한을 보내 당이 마치 부르주아민주주의를 파괴하기 위해 투쟁하는것처럼 말하는것은 <정치적오류>이므로 중단해야한다고 강조했다. 파시즘에 대한 반대투쟁이 주요목표로 설정됐고 이를 위해 모든 경향의 노동자들을 결집시키며 소부르주아의 요구를 고려한 반파쇼전선구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34.2 프랑스각지에서 650여개에 이르는 <암스테르담·플레이엘운동>하부위원회가 활동하고있었다. 반파쇼운동은 정당·노조의 시위로도 나타났는데 1934.2~1936.5 1063건의 시위·행진·소요가 있었다. 

한편 극우단체의 난동에도 대립적이던 공산당과 사회당은 1934.7 <통일행동협정>을 맺고 10월 공산당은 <자유·노동·평화를위한인민전선>의 결성을 제안하며 급진당과 도시·농촌프롤레타리아와 소부르주아를 인민전선으로 끌어당겼다. 1935.7 대규모시위행동을 통해 프랑스반파쇼인민전선이 최종 창설됐다. 공산당·사회당·급진당은 50만명이 참가한 파리집회를 공동으로 개최했고 전국에서 모인 반파쇼조직대표들은 <인민전선선서>를 채택했다. 1936.1 3개당은 공동작성한 인민전선강령을 발표했다. 정치적으로 반파쇼·민주주의·반전평화, 경제적으로 노동시간단축·각종기금제정·농업문제해소·은행국영화등을 요구했다. 1936.4 인민전선3개당이 선거연합을 형성하고 공통강령을 제시했다. 같은해 6월 레옹블룸을 수반으로 한 최초의 인민전선정권이 탄생했다. 내각은 사회당·급진당으로 구성됐고 공산당은 정부밖에서의 지지를 약속했다. 인민전선정권은 2차대전직전 복잡한 국제정세하에서 스페인내전을 둘러싼 인민전선내 갈등으로 인해 분열이 가속화됐다. 블룸은 스페인인민전선정권에 대한 군사원조가 아닌 이탈리아·독일이 스페인의 파쇼세력인 프랑코세력을 지원하는것을 막기 위한 <불간섭조약>을 내세웠는데 이는 공산당·진보단체의 심한 비판을 불러왔다. 이에 블룸은 사임했고 이후 등장한 급진당중심의 달라디에내각은 1938.9 프랑스정부이름으로 히틀러파시즘의 침략전쟁을 사실상 방조한 뮌헨협정에 서명했다. 

인민전선정권은 사실상 와해됐지만 반파쇼인민전선의 명맥은 레지스탕스투쟁세력에 의해 계승됐다. 1939.9 불법화된 프랑스공산당은 1940.7 선언문을 통해 반파쇼전선구축을 호소했다. 이후 전투조직(OC)를 창립했고 1941.7 공산당주도의 민족전선(NF)이 결성됐는데 여기에는 공산당·사회당·기독민주당·급진사회당·소부르주아정당·부르주아정당등이 포괄됐다. 군사조직으로는 <의용군과파르티잔(FTPF)>이 결성됐다. 1942.11 공산당과 드골지지자들간에 공동행동에 관한 협정이 체결됐고 1943.5 전국레지스탕스평의회(CNR)가 조직돼 모든 저항운동에 대한 통일적지도가 진행됐다. 1944초에는 프랑스국내의 전투부대전체가 50만명의 국내프랑스군(FFI)으로 통합됐다. 8월 공산당은 대중봉기결행을 호소하는 호소문을 발표했으며 8.19 봉기가 시작됐다. 파쇼독일군대는 8.25 항복하며 반파쇼인민전선은 결국 승리했다. 

1923.9 스페인의 카탈루냐지구군사령관 미겔프리모데리베라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리베라는 총리로 임명된 후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의회·지방의회를 해산했고 군사독재를 반대하지않았던 사회당(스페인사회주의노동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활동을 금지시켰다. 공산당원의 1/5이상과 노동운동가 수백명이 투옥됐다. 리베라정부는 한켠으로 개량주의적정책을 시행했는데 사회당지도부와 협력관계를 구축했고 노동운동세력을 흡수하기 위해 1924.10 노동총동맹(UGT)사무총장을 군사독재의 국가평의회고문으로 영입했다. 사회당지도부는 리베라의 정책에 동조했으나 일반당원을 비롯한 많은 당활동가들은 리베라독재정권에 적대의식을 갖고있었기에 리베라정권의 위기가 보이자 사회당은 반정부쪽으로 돌아섰다. 1926부터 노동계급의 파업투쟁과 스페인공산당의 반독재지하투쟁이 활발히 전개됐다. 이런 흐름속에서 1930 리베라는 사임했고 다마소베렝게르장군이 새내각을 구성해 1931.4까지 집권했다. 1930.8 공화주의자·사회주의자·좌우익자유공화파·카탈루냐자치주의자등이 공화국수립과정에서 행동통일을 위한 <산세바스티안협약>을 체결하고 실행위원회(혁명위원회)를 구성했다. 1931.4 지방선거에서 공화파·사회당이 단일후보를 내세워 41개시에서 공화파가 승리했다. 선거결과가 공표되자 많은 대도시자치제가 공화제를 선언했고 그결과 1931.4 국왕 알폰스13세가 퇴위하며 도주했다. 혁명위원회는 2공화국임시정부로 전환됐다. 1931.6 제헌의회선거에서 공화파·사회당이 압도적다수를 차지했다. 이후 2공화국은 종교단체해산·토지개혁·새헌법제정을 둘러싸고 여러 갈등에 봉착했다. 특히 리베라정권당시 미국통신기업 ITT에 매각된 텔레포니카네트워크에 대해 전국노동연합이 사보타주에 들어가자, 2공화국이 미국의 압박에 못이겨 군부대를 배치하고 조합간부들을 구속했다. 이에 노조측은 총파업을 선언하며 반정부투쟁에 나섰다. 1933.11 국회의원선거에서 파시스트정당은 많은 의석을 차지했고 이들은 정부에 맞서며 반동적정책을 계속 주장했다. 이같은 과정을 통해 우익정당들은 정부권력을 장악했다. 한편 사회당은 좌경화노선을 취하고 노동조합의 파업투쟁은 계속되는 상황에서 파쇼정권은 전국계엄령을 선포했고 노동자들과 진보세력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2년여의 암흑기를 지나 테러반대·희생자구제·정치범대사면을 촉구하는 정치적행동이 확대되며 1935.6 계엄령이 해체되고 혁명열기가 되살아났다. 1936.1 총선거를 앞두고 사회당·공산당·공화좌파·공화연합·노동총동맹·맑스주의통합노동자당·생디칼리스트당·사회주의청년단대표들이 인민전선강령을 체결했다. 강령은 공산당이 주도했는데 이는 코민테른7차대회의 결의를 기본으로 했다. 8개협약내용중에 은행국유화·토지개혁·실업자원조등의 진보적내용은 포함되지않았다. 인민전선은 1936.2 총선거에서 승리했다. 

1920년대 오스트리아우익정권은 민중의 경제적부담에 따른 저항을 파시스트무장부대를 통해 파쇼적으로 진압했다. 무장부대는 이탈리아파시즘, 독일나치즘을 지지했고 파시스트들의 오스트리아·독일합병에 동조했다. 탄압이 심화될수록 민중투쟁의 기세도 높아졌다. 1927 산업도시 샤텐도르프에서의 파업투쟁에서 무장하지않은 노동자를 향해 파시스트무장대가 발포해 노동자1명·어린아이1명이 죽고 시위대다수가 부상을 입었다. 이사건에 대해 형사재판소에서는 무죄판결을 했고 이에 분노한 노동자·민중의 시위가 이어졌다. 노동자들의 투쟁열기에 반해 사회당(사회민주노동당)과 노동조합집행부는 24시간총파업을 선언하며 투쟁기한을 제한하려했다. 당·노조에 의해 파업은 중지됐고 결국 패배했다. 기간 노동자85명이 사망하고 1000여명이상이 부상당했다. 이투쟁은 최초의 대중적반파쇼투쟁으로, 공산당과 사회당사이 인민전선의 필요성과 가능성이 확인된 사건으로 평가되고있다. 유럽에서의 첫반파쇼무장투쟁도 오스트리아에서 전개됐다. 의회주의에 매몰돼 사실상 오스트리아파쇼세력에 부역한 사회당지도부와는 달리 파쇼의 직접적공격대상이 된 공산당은 사회당과 반파쇼조직들에 반파쇼공동투쟁을 제안하고 반파쇼위원회를 조직했다. 1934.2 파쇼정부의 사회당에 대한 공안탄압이 본격화되자 공산당은 대중투쟁을 호소했으나 정작 사회당지도부는 호소에 동의하지않았다. 그러나 사회당하층조직은 투쟁을 결행했고 많은 지역·노동조직들에서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1934.2.12밤 수도 빈에서도 전투가 진행됐는데 전투부대의 주축은 공산당과 방위동맹이었다. 전투에서 노동자1200명이 사망하고 5000여명이 부상당했으며 1만명이상이 체포되거나 수용소에 갇혔다. 투쟁패배의 근본원인은 사회당의 분열행위에 있다고 역사는 평가하고있다. 유럽최초의 반파쇼무장투쟁은 비록 패배했지만 이후 오스트리아진보세력은 어려운 조건에서도 통일전선구축에 힘을 썼다. 

국제반파쇼전선을 강화한 코민테른

프랑스·스페인·오스트리아에서의 공산당과 사회당간의 상층통일전선형성을 위한 노력과 인민전선의 구축, 국제적반전·반파쇼대회들은 코민테른7차대회에서의 반파쇼인민전선전술수립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한편 1933.11 코민테른집행위총회에서는 파시즘에 대해 <금융자본의가장반동적이고가장배외주의적이며가장제국주의적인분자의공공연한테러독재>라고 규정했다. 총회는 파시즘이 소부르주아·일부노동자사이에 대중적기반을 만들려한다는데 주목했다. 이양자를 분리하지않으면 소부르주아를 노동계급편으로 견인하는것이 불가능하며 반파쇼전선의 범위가 축소된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러한 문제의식하에 1935.8 7차대회에서 대담한 방침전환을 하게 된다. 7차대회에서 코민테른은 국제정세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소비에트국가에서 사회주의가 최종적, 결정적승리를 거뒀고 자본주의역사상 최대의 경제공황으로 인해 부르주아세력이 수천만실업자를 기아와 사멸의 운명에 밀어넣고 노동자의 생활을 전대미문의 낮은 수준으로 떨어뜨렸다. 파시즘의 공세는 자본주의세계가 제모순의 막다른 길에서 탈출구를 찾는것이며 오스트리아·스페인에서 파시스트에 대한 노동자무장투쟁과 프랑스에서의 강력한 반파시즘운동이 전개됐다. 자본주의세계전체에 걸쳐 근로대중이 혁명화되고있으며 전세계적으로 계급간의 상호관계는 혁명세력이 성장하는 방향으로 점점 변하고있다.

코민테른집행위총비서 게오르기미하일로비치디미트로프는 <파시즘의공세와파시즘을반대하는노동계급의통일을위한투쟁에서의코민테른의과업>을 통해 <근로대중을파시즘과의투쟁에동원함에있어특히중요한임무는노동계급통일전선을기초로광범한반파시즘인민전선을결성하는일>이라고 선언했다. 코민테른은 공산주의자들이 근로농민·도시소부르주아·피억압민족의 투쟁을 노동계급의 지도하에 통합하는데 노력하고 노동계급의 근본적이익과 일치하는 모든 요구를 지지함으로써 노동계급통일전선의 기초위에 광범한 반파쇼인민전선을 창설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공산당·사회당의 통합에 대해 <사회민주당의반동적부분에대한투쟁을강화하는한편,개량주의적정책과싸우고있고공산당과의통일전선을찬성하고있는좌익사회민주주의적노동자·활동가·조직과의사이에가장긴밀한협력관계를세워야한다>고 밝혔다. 식민지·종속국가들에서는 반제통일전선형성을 강조했다. 침략과 제국주의적억압에 맞서 자국의 독립을 지키려고 투쟁하고있는 국가들을 원조하기 위해 모든 힘을 동원하자고 각국민중들에게 호소했다. 

1939.9 2차세계대전이 임박한 시기, 디미트로프는 코민테른집행위입장과 동일한 내용의 논문을 통해 <현재정세하에서노동자계급의통일을실현하는것은노동자대중자신의운동의전개에기초해사회민주당의배반적상층부와의단호한투쟁속에서아래로부터달성할수있으며또달성하지않으면안된다>·<전쟁방화자와반동에반대하는지난수년간의공동투쟁속에서공산당계노동자와사회민주당계노동자의꽤커다란부분사이에수립된동지적관계는이과정을매우용이하게할것>이라며 개량주의세력의 기회주의적책동을 밝히는 한편, 반파쇼전선이 <아래로부터> 달성돼야한다는것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대중의통일투쟁전선은제국주의의사회민주주의적,<민주주의적>,<급진적>하수인들에반대해노동운동내에서이부르주아앞잡이들의영향을일소하기위해,그들을근로대중으로부터고립시키기위해가장단호하게투쟁하지않고서는실현될수없다>고 밝혔다.

2차세계대전의 전세가 소련을 비롯한 반파쇼진영에게로 확고히 기울던 1943 코민테른의 해산이 결정됐다. 코민테른의 해산은 코민테른이 역사적임무를 완수했다는 점, 세계각국의 혁명세력이 강화되며 코민테른이 더이상 필요하지않았다는 점과 함께 국제반파쇼전선강화를 목적으로 하고있다. 

1943.5.15 코민테른해산결정에 따르면 1919 창립된 국제당의 역사적임무와 파시즘의 본색폭로등 자기역할을 했다는 전제하에 <국제적중심의힘으로각국의노동운동의임무를해결하는방식은극복하기어려운장애에부딪칠것이라는점이이미전쟁전부터점차명확해지고있었다>고 진단했다. <반히틀러연합>에 참여하고있는 각나라에는 각기 독특한 과제가 존재한다는것을 전제하며 코민테른을 해산했다. 그러면서 <공산주의국제주의를지지하는모든사람에대해,근로자의철천지원수인독일파시즘과그동맹자및추종자를가능한한빨리분쇄하기위해,전력을다해반히틀러연합에속하는국민들및국가들의해방전쟁을모든수단으로지지하고그투쟁에적극적으로참여할것을호소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코민테른이 국제반파쇼전선강화를 목적으로 해산결정을 했다는것을 보여준다. 코민테른의 해산은 정세발전요구에 전적으로 부합되는 적절한 조치였다.

국제반파쇼전선의 위대한 승리

1933.1 아돌프히틀러가 파쇼정권을 세웠고 무력증강에 착수하며 전쟁준비에 나섰다. 1935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침략했고 1936 독일·이탈리아의 지지·조종하에 스페인의 파쇼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스페인내전이 발발했다. 일본은 동아시아에서의 침략전쟁에 열을 올렸다. 1936 독일·일본이 방공협정을 체결하고 1년뒤 이탈리아도 여기에 참가하며 <파쇼블록>이 형성됐다.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침략자들은 아시아·유럽·아프리카만이 아니라 미국·영국·프랑스등의 같은 제국주의국가를 위협했고 제국주의간 모순이 격화됐다. 

반파쇼전선을 구축해 세계대전을 저지하기 위한 소련의 구체적노력은 1933부터 진행됐다. 12월 소련공산당중앙위원회는 소비에트연방이 국제연맹에 가입하는것과 유럽국가들이 광범하게 참가하는 상호방위협정체결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1933 일본·독일이 탈퇴하며 힘이 약해진 국제연맹에 1934 소련이 가입했다. 소련의 국제연맹가입에 적극적이었던 나라는 영국·프랑스였다. 이는 독일을 저지하기 위한 의도가 컸다. 소련도 1934.1 독일·폴란드간 불가침조약이 체결된것에 위협을 느끼며 연맹가입을 확정한다. 

1934 파쇼의 공격위험에 노출된 소련과 프랑스가 독일까지 포함한 광범위한 <침략에대한집단적반격에관한조약>을 체결하자고 주장했으나 파쇼독일의 거부와 영국·폴란드의 반대로 성사되지못했다. 그러면서 1935 소련은 프랑스·체코슬로바키아와 상호조약을 체결했다. 이조약은 프랑스인민전선정권이 무너지면서 유명무실화됐다. 한편 소련·미국간 수호·불침략·중립조약이 1933.9 체결되며 국교가 수립됐다. 소련공산당은 각국공산당을 중심으로 노동자계급을 통일하고 민주세력을 반파쇼인민전선으로 결집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각국 공산당·공산주의자들은 개량적인 사회당계열에 반파쇼인민전선형성을 끈기있게 제안했다.

1938.3 소련은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자 성명을 통해 다른 강대국들과 국제연맹등에 즉각 적절하고 실제적인 조치마련을 위해 논의할것을 제안했다. 그러면서 <만약모든국가,특히강대국이세계를집단적인힘으로구원하는문제에대해확고하고도명확한입장을취한다면오늘이라도아직늦지않다>고 강조했다.

소련은 파쇼세력의 침략이 심화되고 제국주의세력의 기회주의성으로 전쟁이 임박해질수록 전쟁을 막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1938.5 파쇼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위협하자 조약에 따라 소련·프랑스·체코슬로바키아군사대표자회의를 소집해 방어와 보호를 위한 조치를 하자고 제안했으나 프랑스를 비롯한 서방제국주의세력은 집단안전보장정책을 거절하고 1938.9 배신적인 뮌헨조약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경지구를 독일에 할양했다. 이는 파쇼독일의 침략방향을 소련쪽으로 돌리려는 의도였다. 한편 제국주의세력의 <불간섭정책>은 스페인내전에서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반파쇼세력의 패배와 파쇼세력의 승리를 촉진했다. 1939 스페인공화국은 결국 패배하면서 전체파쇼세력의 힘은 강화됐고 프랑스·영국등의 서방제국주의세력의 입지는 약화됐다. 

소련공산당은 1939.3 18차대회에서 모든나라와평화·실무적관계강화정책실행, 전쟁도발자가소련을분쟁에휩쓸리게하지못하도록할것, 모든수단을동원해전투력강화, 평화와각민중간의우호에관심을갖고있는세계노동자와의국제연대강화를 결정했다.

파쇼독일이 1939.3 체코슬로바키아전역을 점령하고 폴란드침공에 들어서자 영국·프랑스는 폴란드·그리스·터키등의 나라들에 국가적독립을 보장해주겠다는 성명을 냈고 소련과 교섭을 시작했다. 소련은 영국·프랑스의 기회주의적책동을 알고있었으나 상호원조조약체결을 제안했다. 교섭은 8월까지 이어졌으나 결국 영국·프랑스가 소련과의 연합체결의지가 없다는것만 확인된채 무산됐다. 소련은 8월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이는 1941 소·일중립조약과 함께 파쇼세력의 반소침략책동을 지연시키기 위한 전술적조치였다.

한편 영국·프랑스는 소련국경인근나라들을 소련과의 전쟁에 끌어들이려했으나 소련이 인근나라인 라트비아·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와 1939.9~10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며 음모를 분쇄했다. 

1941.6 파쇼독일은 선전포고 없이 소련을 기습했다. 소련은 개전초 독일·핀란드·헝가리·루마니아·이탈리아등 파쇼세력들의 집중공격을 받으며 열세를 면치못했으나 점차 이오시프스탈린최고사령관과 소련공산당의 영도를 받은 붉은군대와 민병대, 민중들의 가열한 영웅적투쟁으로 전세는 점차 소련쪽으로 기울었다. 한편 1941.7 소련의 제안으로 소련·영국간 <독일과의전쟁에서공동행동을취하는문제에대하여>협정이 체결됐다. <반히틀러연합창설>의 시작이 된 이협정에는 쌍방이 서로 원조하며 서로의 동의없이 휴전협정을 맺을수 없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8월초에는 미정부가 소련에 경제적협력을 내용으로 한 통고문을 전달했다. 1941.12 일본이 미진주만을 공격한것을 계기로 미국은 일본, 뒤이어 독일·이탈리아와 전쟁을 시작했고 이는 반파쇼연합형성을 촉진했다. 1942.1 소·미·영·중을 비롯한 26개국이 파쇼블록분쇄를 위한 선언을 체결했고 영·미간엔 1942 유럽에서 2전선을 구축한다는 협정서가 체결됐다.

1941말~1942초 모스크바근교전투에서의 독일군패배와 붉은군대의 동계공세의 성공은 국제적판도에 큰영향을 미쳤다. 영·미를 파쇼세력으로 끌어들이려는 독일의 계략이 분쇄되고 세계민중들의 반파쇼투쟁의지가 더욱 강화됐다. 발칸반도국가들의 반파쇼무장투쟁과 유럽각지에서의 레지스탕스투쟁은 스스로의 독립을 앞당기는 해방투쟁인 동시에 소련에 공격을 집중하고있던 파쇼독일의 후방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1942.11부터 시작된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의 소련승리로 전세는 소련에 유리한 방향으로 근본적으로 뒤집혔다. 파쇼독일내에서조차 전쟁승리의 신념이 무너졌고 파쇼블록국가들의 국내정세가 긴박해졌으며 일본·터키가 독일편에서 소련과 전쟁하려던 시도는 중단됐다. 전세가 반파쇼전선승리로 사실상 확정되고 쿠르스크전투에서도 소련이 대승을 이루자 1943 미·영은 취약해져있던 이탈리아에 쉽게 상륙했고 이탈리아민중들은 총봉기해 무솔리니체제를 무너뜨리면서 파쇼진영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런 전쟁흐름속에서 소련을 중심으로 한 세계공산주의세력은 반파쇼전선에 미·영등을 견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1943.5 코민테른의 해산을 결정했다. 

1943말 테헤란에서 소·미·영간의 정상회의가 개최됐다. 회의에서는 3개강대국의 공동전쟁방침을 만들어 확인하고 전후에도 3개나라가 힘을 모아 협력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채택했다. 특히 선언문에선 유럽지역에 2전선을 구축하는 문제가 검토됐다. 2전선구축은 파쇼독일의 전력을 분산시키며 반파쇼세력의 승리를 앞당기기 위한 중요한 사안이며 1942 이미 약속된것임에도 여전히 실행되지않았다. 이회의에서 영국총리 윈스턴처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4.5.1이전에 유럽에서 2전선을 구축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기한 역시 지켜지지않으면서 제국주의세력은 소련에 대한 배신행위를 계속했다. 한편 1943.12 소련·체코슬로바키아조약이 체결돼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해방을 위한 군사원조를 약속했다. 

1944여름 붉은군대는 파쇼세력이 점령한 지역의 3/4 가까이를 해방했고 독일의 패배가 확정되자 미·영은 전후패권을 목적으로 유럽대륙에 진출하지않을수 없었다. 그러면서 2전선은 예정보다 무려 2년이나 늦은 1944.6 구축됐다. 1945.4.30 독일국회의사당옥상에 소련국기가 휘날리며 파쇼독일은 무너졌다. 이는 소련을 중심으로 영·미·프,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유고슬라비아·알바니아·루마니아·불가리아·헝가리의 군대, 레지스탕스세력의 공동투쟁의 위대한 성과물이었다. 1945.5.8 독일은 무조건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전쟁막바지 미공군은 8.6·9 일히로시마·나가사키에 2개의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이는 이미 극동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세력이 일본군을 격멸하고있는 조건에서 이뤄진 불필요한 행위였다. 군사적필요에 의한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유일하게 핵무기를 가지고있다는 사실을 대외에 과시하고 소련을 압박해 전후문제를 미국중심으로 끌고가려는 제국주의적책략에 의한것이었다. 국제반파쇼전선이 전술이라는것은 전후 냉전체제가 시작되고 국제반파쇼전선의 편에서 무장투쟁을 가열하게 전개해온 코리아와 그리스가 미제패권야욕의 희생양이 됐다는것을 통해 단적으로 드러난다.

2차세계대전에서 국제반파쇼전선의 승리로 사회주의권이 확대되고 각국의 민족해방운동세력이 정권을 장악했으며 공산당세력·노동운동세력이 강화되면서 세계적판도가 혁명적방향으로 완전히 전변됐다. 국제반파쇼전선승리의 역사적경험은 21세기국제반파쇼전선은 반드시 승리한다, 그승리가 결코 머지않았다는것을 밝히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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