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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5 항쟁의기관차〉 우크라이나나치즘의 형성과 러시아반나치군사작전의 전개

파시즘과 나치즘 그리고 우크라이나

파시즘은 독점자본주의·제국주의시대에 등장한 대표적인 반동사조로 제국주의의 전반적위기가 심화되자 등장했다. <파쇼(fascio)>는 나무가지와 도끼의 묶음(fascis), 고대로마사법관이 소유한 장식품에서 비롯된 말이다. 이것이 점차 묶음·단체·결사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됐다. 파시즘은 대내적으로 소수통치세력이 수중에 모든 국가권력을 장악한 후 노동자·민중의 초보적인 민주적권력을 박탈하고 경제적으로 착취·약탈하며 대외적으로는 인종주의·민족배타주의를 고취하고 다른 나라·민족에 대한 침략·학살을 감행한다는 특징이 있다. 대표적인 파쇼세력으로 이탈리아파시즘·독일나치즘·일본군국주의를 들수 있다. 1919 베이토무솔리니는 <이탈리아전투자단>을 조직했고 2년후 <국가파시스트당>을 창당하며 <파시스트강령>을 채택했다. 1920.11 파시스트행동대 <흑셔츠단>은 사회당이 장악하고있던 볼로냐시정부에 대한 공격을 시작으로 공산당·사회당·노동조합·농민조합을 연이어 습격·파괴하고 성원들을 학살했다. 1922.10 무솔리니를 중심으로 한 3만명의 파시스트당원들이 <로마진군>을 감행했고 정권은 무솔리니에게 넘어가며 파쇼체제가 수립됐다.

나치(Nazi)의 이념 나치즘은 <국가사회주의>를 의미하며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의 사상이다. 1차세계대전이후 등장한 이사상은 독일의 복수주의적야망과 파쇼적침략사상이 결합돼 형성됐다. 사회계급적기초는 독점자본가·파쇼장교·소부르주아·민족배타주의자들이다. 나치즘은 독일의 세계지배와 극단적인종주의·민족배타주의를 내세웠다. 아돌프히틀러는 게르만민족우월주의를 바탕으로 다른 민족·종족의 멸살이라는 위험천만한 이념을 설파했다. 

1919 독일에 등장한 사민주의정권 에버트정권은 공산주의세력을 야수적으로 탄압했다. 1919 칼리프크네히트·로자룩셈부르크가 학살됐다. 그결과 독일사회주의혁명이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1차세계대전패전의 후과와 노동자·민중의 반역권력에 대한 분노가 사라질수는 없다. 미국의 금융자본을 중심으로 한 초국적자본·제국주의세력은 <도스플랜>·<영플랜>을 통해 배상금을 축소하고 독일경제예속화를 심화시키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급부상하던 극우당을 전폭적으로 밀어주며 독일을 소련침략의 교두보로 삼았다. 1920 뮌헨에서 독일노동자당은 나치당(Nazi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으로 개칭하고 25개조강령을 발표했다. <대독일>창설·식민지획득·국민평등·공산주의와의투쟁·의회정치개혁등의 강령은 말그대로 독점자본주의·제국주의실현의 야심을 담고있었다. 나치당은 인종주의·반유대인 선전·정적제거를 감행하며 민심을 호도했고 초국적자본이 찔러준 정보를 이용해 1929 경제공황을 예견하며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한편 미은행가들은 히틀러에게 1500만달러를 제공해 합법적집권을 지원했고 이후에도 여러차례 자금지원으로 히틀러의 권력을 뒷받침했다. 1932 미의회기록에 따르면 1932.4.27 미연준(Fed)은 75만달러상당의, 5월중순 1200만달러상당의 미국인소유의 황금을 독일에 보냈다. 독일군수생산체계는 미기업 제너럴모터스·포드·제너럴일렉트릭·듀폰등과 유착했고 이들배후에는 미금융자본이 있었다. 

1930년대 일본은 <국가개조>를 표방하며 사회주의세력·민주주의진영을 탄압하고 침략전쟁수행을 위해 일본민을 강제동원하며 전체주의적질서를 형성했다. 특히 1938.11 고노에내각은 <동아신질서>를 발표하고 2년후 외무대신 요스케가 <황도의대정신에근거해우선일본·만주·중국을하나로하는대동아공영권의확립도모>를 당면외교방침으로 공개하며 제국주의침략성을 더욱 심화시켰다. <대동아공영권창설>은 3단계에 걸쳐 아시아·태평양지역을 식민지배하겠다는것으로, 파시즘의 또다른 형태다.

한편 미역사학자 티모시스나이더는 1930~40년대전반 동유럽·유럽러시아지역에서의 대량학살을 두고 <피로물든땅>이라고 명명했다. 그중 많은 민간인이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학살된 지역이 2차세계대전당시 우크라이나다. 우크라이나는 히틀러가 주창한 독일3제국의 <영생>을 위해 기획된, 나치침략을 정당화한 정책 <레벤스라움(생활권)>의 동구권정중앙에 자리해 가장 가혹한 수준의 착취·약탈, 파괴·학살을 당했다. 뿐만아니라 나치독일군과 소련붉은군대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 동부전선의 정중앙에 있었다. 무엇보다 전쟁희생자중 절대다수가 민간인이었으며 우크라이나인으로 구성된 나치세력에 의해 나치독일을 능가하는 잔혹한 방식으로 대량학살됐다는데서 그잔학상이 뚜렷이 드러난다.

 

우크라이나나치세력의 등장과 대량학살

우크라이나나치세력의 조직적기원은 1920경 체코 프라하에서 출범한, 갈리치아출신 망명우크라이나독립운동가들로 구성된 SVO(우크라이나무장전투단)다. SVO는 폴란드·소련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무장투쟁을 목적으로 하는 일종의 비밀결사단체였다. SVO의 핵심이자 후에 OUN(우크라이나국수주의자단)의 초대수장이었던 예브헨코노발레츠에 따르면 소수정예로 구성된 비밀테러조직의 필요성에 의해 조직됐다. 독일바이마르시기군부는 폴란드를 약화시킬 의도로 SVO의 테러행위를 적극 지원했고 그래서 SVO의 테러활동주대상은 폴란드였다. 이때부터 시작된 독일과의 유착은 히틀러시기에 들어 더욱 강화된다. 물론 SVO조직원 대다수가 2차세계대전발발전까지 폴란드가 지배한 갈리치아출신이라는것도 주요하게 작용했다. 

1929 SVO에 뒤를 이어 OUN이 창설됐다. OUN은 SVO의 인적구성을 흡수했지만 그투쟁양상은 더욱 과격해지고 테러대상도 광범위해졌다. 동족인 우크라이나지식인·민간인까지 포괄해 전방위적, 전면적 테러로 급격히 극단화됐는데 일례로 1934.7 우크라이나민족운동진영의 온건파지도자 이반바비의 암살을 들수 있다. 이는 SVO와 OUN간의 노선상 근본적차이를 보여주는 상징적사건으로, OUN이 주창하는 노선에 동의하지않는 사람이라면 설사 우크라이나내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라도 누구든 테러할수 있다는것을 보여준다.

SVO와 달리 OUN의 극단적과격성은 사상적차이에서 확인할수 있다. 보수적인 부르주아민족주의운동계열인 SVO와 달리 OUN은 파시즘을 이념으로 채택했다. 드미트로돈초프는 OUN계열의 우크라이나국수주의자들에게 <우크라이나파시즘의아버지>라 불린다. 돈초프는 1917 우크라이나혁명이 실패하자 <민족주의>로 무장한 소수의 지도자·엘리트가 민중을 각성·고무시키고 <올바른방향>으로 일사불란하게 이끄는 <민족혁명>만이 우크라이나독립국가수립의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창했다. 그러면서 이탈리아파시즘과 독일나치즘에 열광하며 번역·저술활동을 통해 유럽파시즘의 이념을 서부우크라이나 특히, 갈리치아지역에 보급하는 활동에 매진했다. 돈초프는 1차적으로 파시즘핵심고전을 번역해 학생층에 주로 소개했는데 이는 이후 OUN내 스테판반데라를 비롯한 극악한 파시스트들이 양산되는 원천이 됐다. 더해 돈초프는 SVO의 재정지원하에 르보프의 월간지<문학·학술통보>를 발행했으며 이는 서유럽·중부유럽의 파시즘이 우크라이나로 전파되는 통로역할을 했다. 돈초프는 스스로 <통보를통해보급하고자하는것은정확히히틀러주의>라고 말했다. 돈초프는 1920~30년대 당대 서부우크라이나에서 가장 많은 저작을 남긴 극우이론가로 꼽힐 정도로 여러저작물을 남겼는데 그중 <국수주의(Natsionalizm)>는 극단적민족지상주의와 세계를 <아(我)·비아(非我)의투쟁>으로 보는 2분법적세계관, 인종주의적역사관을 주요특징으로 하는 전형적인 파시즘저작물로 파시즘이 우크라이나에 정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책에서 돈초프는 <우리와함께하지않는이들은누구든모두가우리의적이다>라고 단언하고있다. 더해 <강한인종은약한인종의희생하에자유를되찾게>된다, <야수와같이폭력적인방식>을 주창했다. 이는 향후 유대인에 대한 학살만이 아니라 폴란드인을 겨냥한 대량학살로 이어지는 이념적바탕이 된다. OUN은 <민족적대의를고취하고유포하는적극적인소수그룹>이자 <무지몽매한대중들에게민족적대의를가르치고대중을투쟁을위해동원할수있는그룹>으로 돈초프가 이상으로 내세운 <엘리트>집단이었다.

OUN은 1929.1.28 오스트리아 빈에서 망명우크라이나인독립운동가들과 갈리치아지역국수주의자들이 참가한 <1차우크라이나민족주의자대회>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했다. 범민족적대의를 내세우며 출범했으나 SVO에 몇몇 우파학생운동단체만 OUN에 결합한, 나날이 과격해지는 극우민족주의단체들만이 SVO를 중심으로 결집했다고 보는 편이 맞다. 당시 사회주의성향그룹과 보수민족주의진영·온건민족주의진영은 OUN에 결코 동조하지않았다. SVO지도부가 OUN의 지도부를 구성했지만 사상적차이로 인해 SVO와 OUN의 차별성은 갈수록 심화됐다. OUN의 기치는 <우리와함께하지않는자들은모두가우리의적>·<민족은모든것에우선한다>는 국수주의였다. OUN의 활동가 야로슬라브오르샨은 인종주의에 대해 <세계역사의열쇠>라고 했으며 <파시즘,나치즘,우크라이나국수주의는같은정신이민족에따라다르게나타나는표현이다>고 했다. OUN은 폴란드인과 소련민중들을 <정복자>로 규정하고 물리적으로 완전히 제거해야한다고 내세우는 한편, 유대인을 또다른 제거대상으로 규정했다. OUN지도부는 1930년대 나치독일·파쇼이탈리아와 같은 국가성격·형태를 우크라이나에 재현할것을 망상했다. 한편 OUN출범후 각종테러활동을 감행하며 조직을 장악한 <신세대청년파시스트>의 등장은 SVO와의 결정적차이를 만들어냈다. 애초 OUN의 주역은 SVO의 지도자들이었으나 1930년대 폴란드령 갈리치아조직에서 OUN의 주축을 이룬 이들은 1920년대초반 대학·김나지움에 입학한 청년들로 절대다수가 극우학생운동클럽에서 파시즘활동을 통해 OUN에 뛰어들었다. <돈초프키즈(Dontsov Kids)>인 이들은 이전세대보다 훨씬 과격했고 파시즘으로 중무장됐다. 1930년대후반부터 <돈초프키즈>는 중견간부의 역할을 맡으며 급속도로 OUN을 장악했다. 이들 청년파시스트들중 학생운동권세대의 대표로 떠오른 자가 반데라다. 반데라는 청소년기부터 SVO활동을 했고 24세때 OUN의 현지조직수장으로 등극했다. 1938 OUN창설주역이자 구심이었던 에브헨코노발레츠가 소련의 작전에 의해 암살되자 OUN은 SVO세대를 중심으로 한 OUN-M과 반데라를 중심으로 한 OUN-B로 갈라졌다. 

OUN-B의 로만슈헤비치아는 OUN의 무장조직 UPA(우크라이나봉기군)최고사령관으로서 수많은 유대인·폴란드인을 학살한 자이며 미콜라레베드는 1941 나치점령하에 르보프시의 치안책임자일뿐아니라 독일 게쉬타포에서 방첩전문가로 전문적훈련을 받은 후 1943~44 UPA방첩부대지휘관으로 보윈지역의 폴란드대학살을 진두지휘했다. OUN-B는 1941.6.30 <우크라이나민족혁명>을 선포하고 나치치하에 부역한 소속조직원을 중심으로 나치독일과 협의없이 UPA를 조직하며 기성세대보다 더욱 과격한 행보를 걸었다. 이는 UPA가 저지른 2차세계대전의 최악의 전쟁범죄중 하나인 보윈지역의 폴란드인대학살을 통해 단적으로 드러난다. 보윈대학살은 독일측과의 사전조율없이 OUN-B가 독자적이며 의도적으로 감행한 전쟁범죄다. 

그럼에도 OUN-B의 친독노선은 확고했는데 1941.6 나치독일의 소련침공당시 독일군의 일원으로 바르바로사작전을 수행한  나이팅게일대대·롤랑드대대는 OUN-B를 핵심으로 한 우크라이나인으로만 구성된 부대였다. 

OUN·UPA가 감행한 대량학살은 유대인·폴란드인에 집중됐다. 우크라이나는 2차세계대전전까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유대인이 거주하던 유대인밀집지역이며 폴란드와 더불어 아슈케나지유대인의 본향이다. 그러면서도 역사적으로 서부우크라이나지역은 뿌리깊은 반유대주의정서가 있었는데 전통적인 반유대주의가 종교적성격이었다면 OUN의 반유대주의는 인종주의에 기반한 근대적이데올로기였다. 예컨대 전통적인 반유대주의의 유대인에 대한 폭력행위는 기독교로 개종할경우 교회의 보호를 받을수 있었으나 1930년대 서우크라이나지역과 1940년대 나치치하에서의 우크라이나에서는 유대인의 생존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나치독일의 유대인규정을 그대로 수용한 OUN은 유대인을 <우크라이나인의인종적순수성을더럽히는주범>으로 <물리적제거>대상으로 규정했다.

한편 서부우크라이나에서 유대인학살이 특히 심했던것에는 2가지요인이 있다. 먼저, 소·독국경에 가까운 지리적특성으로 서부우크라이나지역의 유대인은 독일군을 피해 도망갈 시간적여유가 없었던 반면 중부·동부우크라이나는 전선후방에 위치해있기에 상당수 유대인들이 소련군의 보호하에 소개될수 있었다. 또 서부지역은 우크라이나나치민병대 UPA의 근거지였다. 학살을 피해 산으로 도망가도 UPA에게 붙잡혔다. 나치독일의 합작으로 유대인은 우크라이나에서 거의 대부분 절멸됐다. 

1941가을 우크라이나전국토가 나치지배하에 들어가자 우크라이나점령지에선 나치독일의 대량학살을 방조할 우크라이나인보조경찰부대를 조직했다. OUN측은 <모스크바를가장중요한결정적인적으로간주하지만우크라이나를노예화하도록모스크바를돕고있는유대인들의유해하고적대적인역할을심각하게생각한다>·<독일식학살방식의시급성을전적으로지지한다>며 경찰부대에 대거 진입했다. 나치독일의 유대인도살전문특수부대<아인자츠그루페>의 명령을 집행하며 1941~42 우크라이나에서 <가스>가 아닌 <총탄>에 의한 야수적대량학살을 감행했다. 특히 OUN은 나치추종자들조차 고통스러워하던 영·유아살해임무를 전적으로 맡아서 감행했는데 1941.8 키예프인근도시 빌라체르크바교외에서 발생한 90여명의 영·유아학살의 집행자도 OUN을 핵심으로 한 우크라이나인민병대였다. OUN은 나치독일의 잔학한 학살을 전적으로 방조하며 나치독일의 무기로 무장했다. 1943 나치독일에 의해 우크라이나청년들의 무장과 훈련이 실시됐다. 

OUN은 나치독일에 부역하는것에서 그치지않고 독자적으로 유대인·폴란드인학살을 감행하며 <(우크라이나)노동자들이여,여러분사이의적들,유대인들과(소련의)비밀요원들을살해하시오!>·<모스크바와폴란드,마자르인,유대인들은모두당신들의적>이라고 우크라이나민중들을 선동했다.

악의적선동의 결과 소련군철수직후 서부우크라이나전역은 폭력·성폭행·도살이 자행됐다. 폴란드인에 대해서도 <물리적절멸>을 강변하며 <나이·성별관계없이제거>를 내세웠고 그 참혹한 학살의 대표적사례가 1943.6 보윈학살이다. UPA북부지휘관은 서부우크라이나에 거주하는 폴란드인전체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후 수년간 약1만5000명이상의 폴란드인을 살해했다. OUN은 폴란드인에 대한 학살을 나치독일의 방조없이 독자적으로 감행했는데 그러다보니 유대인대량학살만큼 살육하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극도의 잔학행위, 무차별폭력을 감행하며 공포심을 유발함으로써 폴란드인집단전체가 알아서 도주하는 식의 <인종청소>를 자행했다. 이런 의도하에 1943 보윈전지역·갈리치아일부지역에서의 폴란드인에 대한 인종청소는 가장 악랄하고 끔찍하게 감행됐다. UPA의 인종청소로 폴란드인사망자 총6만~8만명을 낳았고 학살은 보윈전역이 소련붉은군대에 의해 완전히 해방될때까지 계속됐다. UPA와 싸우던 친소비에트빨치산부대는 <우크라이나민족주의자들은폴란드주민을칼과도끼를사용해나이와성별에관계없이살해하고있다>고 보고했다. 1946에 가서야 소련군에 의해 UPA의 대량학살·인종청소가 완전히 중단될수 있었다. 한편 UPA의 반소게릴라활동은 1950년대까지 계속됐는데, 이는 그배후에 UPA를 반소침략정책의 도구로 이용한 미국·영국이 있어서다.

 

딥스에 의해 키워진 우크라이나신나치세력

미국은 OUN을 반소정책에 활용하기 용이하다는 이유로 OUN을 구제한다. 미국의 판단에는 우크라이나가 소련을 이룬 15개공화국중 하나이자 러시아와 인접한 지리적조건도 고려했다. 일례로 1949 <베를린위기>당시 OUN은 미국측에 소련의 군사정보를 빼돌리며 스파이노릇을 했다. 2차대전이후 베를린은 표면적으로 소·미·영·프에 의해 분할됐지만 실질적으로 소·미간의 갈등지역이었다. 미국이 베를린에서 통용되던 화폐가 아닌 새화폐를 미·영·프장악지역에 통용하며 경제적침투·지배를 시도하자 소련이 이에 반발하며 베를린봉쇄를 단행했다. 이사건당시 OUN성원들은 우크라이나지역소련군배치도와 준비태세와 같은 군사정보를 미측에 넘기며 미국이 소련의 군사적역량을 파악하는데 결정적으로 부역한다. 

미국은 1947 그리스내전을 시작으로 <트루먼독트린>을 선포하며 반소정책을 추진했다. 12월 당시 미대통령 해리트루먼은 NSC(국가안전보장회의)보고서4-A호건의안을 재가하며 CIA(중앙정보국)에 비밀공작을 수행할 권한을 부여했다. 1948여름 트루먼은 <선전선동·경제전·시설폭파·사보타지방지·<예방>차원의직접공작,지하<저항>조직·게릴라와난민해방그룹에대한지원,자유세계의위협받는국가내토착반공세력에대한지원등을포함한적성국들에대한전복공작>을 내용으로 하는 NSC보고서10/2호와 소련·동유럽에서 게릴라작전을 수행한다는 내용의 20호를 승인했다. <서유럽재건>의 목적이라던 마샬계획의 자금중 일부도 반미정권전복을 위한 공작에 쓰였다. 전체예산중 관리비로 책정된 10%의 절반이 CIA정책조정실을 통해 비밀첩보활동자금으로 투입되며 <조직적정치전>이 본격적으로 개시됐다. 그자금중 일부가 OUN-B에 의해 창설된 무장테러단체 <나이팅게일> 지원에 투입됐다.

미국은 특히 UPA방첩부대지휘관 레베드에 주목했다. 레베드는 1942 반데라가 <우크라이나독립국가>를 선언하며 나치독일의 의도와 달리 행동해 작센강제수용소에 수감되자 반데라를 대신해 OUN과 UPA를 이끈 사실상의 우두머리였다. 레베드는 OUN-B산하 정치조직 UHVR(최고우크라이나해방위원회)결성에 깊이 관여하기도 했다. CIA는 UHVR외무장관이었던 레베드가 반데라에 비해 영향력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레베드는 1947 미군방첩대의 방조로 우크라이나에서 뮌헨으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CIA에 협력하다가 1949.6 미국에 정착했고 1957 미국시민권을 얻었다. 미국의 레베드에 대한 비호는 미법무부가 그를 추방하려고 할때 미CIA요원 앨렌덜레스가 <CIA에서엄청난가치가있는인물>·<핵심적인작전>을 돕고있다고 한것으로도 드러난다. 레베드가 미국내에서 한 주된 일은 반소련·반사회주의선전물의 출판·유포였다. CIA의 지원하에 미국내에서만이 아니라 해외에서도 감행된 이사업은 1990 공식적으로 종료됐다. 레베드는 1998 미국에서 사망했다. 

OUN수장이자 마찬가지로 대량학살의 수괴인 반데라도 2차대전후 뮌헨에서 활동하며 CIA에 협력했다. 반데라가 1959 소련KGB(국가보안위원회)에 의해 독극물암살을 당한 사실은 나치세력의 배후와 반나치투쟁세력이 누구인지 확인시켜준다.

UPA는 우크라이나내에서 미지원하에 1946~47 벨라도나작전·스라소니작전·삼지창작전등을 전개했다. 한편 CIA요원 스티브태너는 1948 UHVR과 함께 공모해 1949.9.5 우크라이나인스파이를 소련-우크라이나지역에 투입했다. 이런 공작은 5년간 계속됐으나 소련의 신속한 처리로 별효과는 없었다. OUN이 뉘른베르크전범재판에서 제외된것은 물론이다. 

CIA에 의해 키워진, OUN의 계승자가 바로 오늘날의 아조프대대를 비롯한 우크라이나신나치세력이다. 민병대로 시작된 아조프대대의 물주는 유대계재벌 이호르콜로모이스키다. 콜로모이스키는 1990 우크라이나 드니프로에서 다국적기업 프리바트그룹을 공동설립한 자본가이자 올리가르히(신흥재벌)다. 콜로모이스키가 1992 최대상업은행 프리바트반크를 설립한 후 1997 이사회의장으로 선임된 사실은 그가 금융자본세력이라는것을 보여준다. 그외 합금철·금융·석유제품·대중매체·금속석유산업을 장악하며 우크라이나최대거부가 됐다. 올리가르히들은 소련시기 불법적지하경제를 장악하고 관료들에게 뇌물을 먹였으며 반소·반사회주의운동을 이끌며 소련붕괴를 주도했다. 소련붕괴후에는 경제적이권을 독점하고 금융자본세력의 구소련지역진출에 부역하며 경제위기·민생파탄을 심화시켰다. 콜로모이스키는 2004 <오렌지혁명>의 핵심이자 우크라이나총리출신인 율리아티모셴코와 함께 그그룹의 지원자다. 특히 우크라이나최대미디어대기업중 하나인 <1+1미디어그룹>지분70%를 소유하고있는데 여기서 방송한 시트콤<인민의종>의 우크라이나대통령역할을 맡았던 인물이 현우크라이나대통령 볼로디미르젤렌스키다. 젤렌스키를 만든 인물이 콜로모이스키라는 의미다. 콜로모이스키의 극단적인 반러성향은 2014 돈바스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분리·독립세력의 <퇴치>를 공공연히 표명했다는데서도 드러난다. 2014.4 돈바스전쟁에서 친러무장세력의 체포에 대한 보상금과 무기반입을 위한 성과금을 지원했고 극악한 신나치부대인 아조프대대·아아다르대대·드니프로1대대·드니프로2대대·돈바스대대창설의 자금을 지원했다. 젤렌스키가 스스로를 <유대인>이라고 하며 나치와 무관하다고 한 말이 궤변인 이유다. 신나치부대의 뿌리인 OUN·UPA를 미국내 딥스(딥스테이트 deep state)가 좌우하는 CIA가 구제하고 우크라이나에 진입시켰으며 콜로모이스키가 신나치부대의 자금줄노릇을 한 2가지사실만으로도 콜로모이스키가 제국주의·딥스측일원이라는것이 확인된다. 

2004 <오렌지혁명>은 미국과 신나치세력이 합작해 우크라이나를 오랜기간 공작해온 결과물중 하나다. 11월 빅토르유셴코의 지지자들이 중심이 돼 시위가 전개됐다. 유셴코는 1993~99 우크라이나국립은행총재를 역임한 대표적인 금융자본세력이다. 부인인 카테리나유셴코는 우크라이나계미국인으로 레이건미정부·부시미정부에서 일한 경력이 있다. 미국무부의 인도주의·인권담당출신으로 민주주의·인권을 명분삼아 반미국가의 체제전복추진을 주업무로 했다. 카테리나는 우크라이나독립후 미국에서 미국·우크라이나친선재단을 설립해 유셴코를 비롯한 은행가들을 <훈련>시켰다. 2004 유셴코가 대통령에 당선될때까지 미시민권을 유지하고있었다. 친러세력은 카테리나가 유셴코를 배후조종하는 미국의 고위스파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한편 유셴코는 2004.9 대선을 앞두고 다이옥신중독에 의한 안면손상이 드러났는데 이를 반대파에 의한 독극물주입때문이라고 선전하며 민심을 호도했다. 

우크라이나는 서부와 동부로 갈려 각각 유셴코와 빅토르야누코비치를 지지했다. 유셴코가 적은 표차로 패배하자 11.22 선거불복종시위가 대대적으로 벌어지며 <오렌지혁명>이 시작됐다.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야누코비치의 당선을 선언했으나 나토사무총장출신의 EU이사회·서유럽연합사무총장 하비에르솔라나등은 우크라이나에 내정간섭을 하며 이결과를 뒤집으려했다. 결국 선거는 다시 치러지고 유셴코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유셴코는 임기내내 실정을 거듭하며 결국 재선에 실패했는데 임기말 반데라에게 영웅칭호를 수여하면서 자기스스로 우크라이나친미세력이자 신나치세력이고 미국·나토의 조종하에 움직인다는것을 확인시켜줬다. 

2014 유로마이단쿠데타는 <오렌지혁명>보다 더욱 폭력적이며 불법적으로 감행됐다. 2010 대선결과 수립된 야누코비치친러정권은 반데라의 영웅칭호를 박탈하고 러시아와의 협력을 강화하는 여러정책들로 친미·신나치세력과 배치됐다. 야누코비치는 우크라이나의 극심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IMF(국제통화기금)와 우선 접촉했는데 IMF측이 공공재가격의 급격한 상승을 비롯해 결코 받아들일수 없는 조건을 제시했고 이를 거부하자 IMF가 우크라이나에 <지원>을 먼저 거절했다고 증언했다. 뿐만아니라 EU와의 협상도 성공적이지않았고 남은 쪽은 러시아뿐이었다고 덧붙였다. 야누코비치의 친러시아행보를 빌미삼아 마이단시위가 확산됐는데 그핵심세력들은 사실상 미CIA산하조직인 NED(전미민주주의기금)등으로부터 재정·물자지원과 훈련을 받고있었다. 한편 2013.11 마이단운동이 시작되자 우크라이나의 신생뉴스매체들이 반정부선전을 강화하며 대대적으로 성장했는데 이들은 미대사관·네덜란드대사관과 조지소로스가 설립한 르네상스재단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으며 친미·반정부여론을 조작했다. 평화롭던 시위대속에는 극우정당·신나치조직의 성원들이 있었다. 신나치세력들은 OUN의 깃발과 휘장을 공공연히 사용하며 과거파쇼세력을 계승한 세력임을 드러냈다. 이들은 11.24부터 경찰·보안요원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11.30에는 우크라이나보안국의 방조하에 신나치민병대들의 경찰에 대한 무력공격이 대대적으로 벌어지며 마이단운동은 쿠데타로 전변됐다. 이시기 신나치중심의 쿠데타를 지지하기 위해 미핵심정치인들이 우크라이나에 연속적으로 방문하기도 했다. 당시 누출된 미국무부유럽담당차관보와 우크라이나미대사간의 우크라이나차기정부수립에 대한 통화는 쿠데타의 배후에 미정가가 있다는것을 확인시켜준다. 2014.2.20 키예프도심에선 전쟁을 방불케하는 충돌이 발생해 경찰 20명이 사망하고 150명이상이 부상을 입으며 정부측이 일방적으로 당했다. 정부와 극우간의 협상은 결렬됐고 야누코비치가 러시아로 망명하면서 2.24 상황은 어느정도 종결됐다. 국회에서는 대통령해임에 대한 탄핵이 이뤄졌는데 이또한 불법적으로 감행됐다. 국회의원 450명중 3/4인 338명이 찬성해야 탄핵이 되는데 328명만이 찬성표를 던지며 탄핵은 공식적으로 부결됐다. 그럼에도 야누코비치는 대통령직을 박탈당했다. 에드워드로잔스키모스크바아메리칸대학총장은 오바마미행정부가 2014.2 빅토리아눌런드유라시아담당정무장관과 당시 미부통령 조바이든이 함께 민주적으로 선출된 야누코비치를 축출한 <색깔혁명>을 추진하면서 마이단쿠데타를 촉진했는데 이것이 나토가입을 위한 빠른 길이어서라고 폭로하기도 했다. 더해 미대통령이 러시아·우크라이나, 미국을 위한 항구적평화·번영을 보장하기 위한 명확하고 확실한 길을 구축하는 대신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수 있는 위험한 대결정책을 선택했다고 분석했다.

신나치세력은 돈바스에서 벌인 극악한 민간인학살로도 악명높다. 우크라이나동부에 위치한 돈바스지역은 러시아계주민이 상당수를 차지하는 친러지역이다. 이지역을 대상으로 한 우크라이나반러정권의 집단학살로 인해 8년간 무려 1만4000명이 사망했다. 신나치세력이 여러해에 걸쳐 돈바스의 학교를 비롯한 공공시설에 대한 폭격을 가해온 사실은 2차세계대전당시 어린아이들까지 학살대상으로 삼은 OUN을 연상시킨다. 2014.9 러시아·우크라이나·도네츠크인민공화국·루간스크인민공화국이 정전협정인 민스크협정을 체결했음에도 우크라이나반러정권의 돈바스공격은 계속됐다. 

또다른 사례로는 오데사에서의 학살을 들수 있다. 2014.5 신나치세력은 친러시아민중들의 평화로운 반마이단시위를 폭력적으로 공격했다. 노동조합건물앞에서 천막농성중이던 민중들은 노조건물로 피신했는데 신나치세력은 이건물을 불태우고 뛰쳐나온 사람들을 살해하는 극악무도한 만행을 저질렀다. 이결과 공식적으로 46명, 비공식적으로 116명이 학살됐다. 당시 오데사주지사는 전그루지야대통령 미헤일사카슈빌리로, 그루지야내 <색깔혁명>의 힘으로 대통령직에 올라 나토가입·나토군사기지제공등을 추진했고 남오세티야를 침공한 대표적인 친미호전세력이다. 사카슈빌리는 오데사주지사재직중 미국으로부터 계속 자금을 받으며 미국의 우크라이나지배정책실현에 철저히 복무했다. 오데사에서의 학살은 신나치세력이 독자적으로 일으킨 우발적사건이 아니라 이러한 배경하에 철저히 계산된 사건이다. 신나치세력이 학살일인 5.2에 맞춰 나치문양인 볼프산겔휘장을 휘날리며 오데사시가지를 행진한 이날을 <기념>한 사실은 신나치세력의 잔인무도한 성격을 더욱 잘 보여준다. 

우크라이나신나치의 대두와 민간인학살, 권력장악의 과정은 우크라이나를 배경으로 친미신나치와 친러반나치간의 투쟁, 근본적으로는 미국·나토를 장악하고있는 딥스의 우크라이나를 발판으로 한 반러시아침략책동이 계속 심화돼왔다는것을 보여준다.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과 반나치화의 중요과제

우크라이나내에서의 신나치세력의 준동과 그로인한 러시아계민중의 학살과 고통은 오랜기간 미국·나토로부터 침략위협을 당해온 러시아가 <반나치화(de-nazification)>를 목적으로 특수군사작전을 선택하게 된 주원인중 하나다. 블라지미르푸틴러대통령은 우크라이나전개전 3일전인 2022.2.21 연설을 통해 특수군사작전을 실시하게 된 배경과 목적을 세상에 알렸다. 푸틴은 우크라이나사회가 극단적민족주의의 확산에 부딪치고 그것이 급격하게 폭력적인 루소포비아(러시아공포증)와 신나치즘의 형태를 띠게 된것은 놀랍지않다고 지적했다. 우크라이나는 진정한 국가성이라는 안정적전통을 가져본적이 없다며 우크라이나올리가르히의 <친서방문명화선택>이란 러시아의 지정학적경쟁자들에게 비굴하게 봉사하며 올리가르히들이 우크라이나인들에게서 훔쳐서 서양의 은행계좌에 숨겨둔 수십억달러를 지키는것이라고 폭로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이들이 처음부터 국수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에게 의존해 권력을 장악한 후 2개국어병용과 러시아와의 협력을 지지했던 사회적조직들을 탄압하는 파쇼적책동을 벌인 사실을 고발했다. 특히 마이단쿠데타당시 미대사관으로부터 받은 물질적지원이 하루100만달러로, 그액수가 수천만달러에 이른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정부가 국제기구대표들에게 사법권한과 정치적권한을 넘긴 사실을 폭로하며 친미정부가 미정가의 꼭두각시라는것을 밝혔다. 2021.3 우크라이나가 새군사전략으로 러시아와의 대치·갈등에 외세를 끌어들이고 크림반도·돈바스지역에 지하테러집단의 조직을 제안했으며 미국은 우크라이나정권에 2014부터 수십억달러의 무기·장비공급, 전문가훈련비용을 쏟아부으며 반러시아침략을 본격화했다는것을 드러냈다. 

푸틴은 또 연설을 통해 우크라이나정부가 대규모부대를 편성하고 공격무인기·중화기·미사일·대포·다연장로켓을 사용해 돈바스거주지들을 연일 포격하며 민간인학살·봉쇄, 아이·여성·노인등에 대한 학대가 끊이지않고있다는 사실을 공개하며 이곳 400만명주민들이 2014 쿠데타에 동조하지않았고 국가차원의 야만적이고 난폭한 국수주의와 신나치즘경향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우크라이나정부의 폭력이 집중되고있다고 폭로했다. 

미국·우크라이나의 신나치에 대한 입장은 2021.11 76차유엔총회때 러시아가 발의한 <나치즘미화,신나치즘,불관용과관련한인종주의,인종차별,외국인혐오증의형태로나타나는데기여하는모든현대적인관행들을방지할것>결의안을 반대한 두나라가 미국·우크라이나라는것을 통해 단적으로 드러난다.

2022.2.24 우크라이나특수군사작전이 개시됐다. 전쟁전부터 우크라이나와 그주변에서 대러침략전쟁연습을 벌인 미국·나토는 전쟁시작과 동시에 주변나라들을 동원해 대대적으로 전쟁물자를 우크라이나에 쏟아부었다. 4월초기준 우크라이나에 5000개이상의 재블린대전차미사일, 1400개이상의 스팅어지대공미사일등 17억달러상당의 무기를 지원한 미바이든<정부>는 급기야 4.6 우크라이나에 무기등 군수물자를 사실상 무제한으로 지원할수 있는 <무기대여법>을 통과시켰다. 이는 1941 2차세계대전당시 미국이 연합군에 대규모군수물자를 투입하기 위해 만든 법을 81년만에 다시 발동한것으로 미국이 현정세를 2차세계대전을 능가한 3차세계대전국면으로 보고있다는것이 드러난다. 

미국·나토의 반러침략책동이 무기지원에 더해 전면적인 정치·경제적 고립·압박, 미디어를 동원한 반러시아선무공작등이 결합된 하이브리드전(hybrid warfare)으로 진행되고있다면 우크라이나신나치군대는 우크라이나민중을 인질로 삼고 심지어는 학살을 하며 반러침략책동을 악랄하게 전개하고있다. 신나치세력이 우크라이나민중을 <인간방패>로 삼으며 <주민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러시아군의 군사작전을 지연시키려한 정황은 곳곳에서 포착된다. 우크라이나올리가르히와 유력정치인들이 전쟁초기 우크라이나를 빠져나간 반면, 젤렌스키는 2.24 국가총동원령을 내려 18~60세우크라이나남성의 출국을 금지시켰다. 반면 푸틴은 3.8국제여성의날을 맞아 징집병은 전투작전에 동원되지않으며 앞으로도 징집병과 예비역은 보내지않을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파시스트를 상징하는 휘장을 한 신나치군인들이 우크라이나민간인을 직접 군사훈련을 시키고있으며 <국제의용군>을 모집해 <인간방패>로 악용하고있다. 반면 인도유학생들이 하리코프에서 우크라이나신나치세력에 인질로 잡혀 <인간방패>로 악용된다는 소식에 러국방부는 폭격을 중단하고 인도유학생들을 탈출시켰다. 

우크라이나신나치권력이 오히려 러시아를 침략자·파시스트로 왜곡하기 위한 시도는 시종일관 계속됐다. 3월중순 러군이 마리우폴에 대한 무차별공격으로 임산부까지 있는 병원을 폭격했다고 우크라이나당국은 주장했다. 세르게이라브로프러외무장관은 해당병원은 오래전부터 비워진 상태로 공습직후 우크라이나가 배우들을 동원해 연출했다고 폭로했다. 3.16에는 마리우폴극장건물을 러군이 무차별공습했다고 대대적으로 비난했다. 전세계미디어들은 어린이를 포함한 민간인수백명이 극장에 대피해있었음에도 러시아가 비인도적공습을 가했다고 공세했고 젤렌스키는 러군이 민간인대피건물인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조준폭격을 했다며 러시아를 <전범국>이라 몰아세웠다. 이에 캐나다 인도인커뮤니티매체 CANINDIA는 마리우폴의 극장건물을 공습한적이 없다, 아조프대대가 <인간방패>로 잡고있던 민간인들을 살해한것이라는 러국방부의 입장을 보도했다. 이고르코나셴코프러국방부대변인은 아조프대대가 건물위층에 미리 설치한 폭탄을 터뜨려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폭로했다. 러RT뉴스는 아조프대대의 <인간방패>살해는 3.9 마리우폴의 3호병원에서도 자행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한편 반러국가인 영국의 국방부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상공의 제공권을 장악하지못했다고 밝혔는데 영국의 분석으로도 러가 전폭기를 사용해 조준폭격을 했다는것은 거짓이다. 

전쟁기간 최악의 반러선동으로 부차학살을 들수 있다. 4.3 키예프인근 부차지역에서 우크라이나민간인이 대량으로 학살됐다는 내용이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젤렌스키는 4일 부차현장을 방문해 <러시아군이저지른잔혹행위로러시아와의협상은더어려워졌다>·<전쟁범죄며국제사회에서집단학살로인정될것>이라고 규탄했다. 바실리네벤쟈주유엔러대사는 <러시아군이학살을저지르지않았음을입증할수있는증거가있다>·<우리는이것이우크라이나의선전전기구가사전에계획한것이라는증거를갖고있다>고 반박했다. 러국방부는 3.30 부차를 완전히 떠났고 이후 우크라이나군이 도시를 24시간 포격했으며 4일이 지나 우크라이나군이 도시에 진입했을때 학살증거를 내놓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마리야자하로바러외무부대변인도 <우크라이나군과그도시의급진주의자들이벌인범죄>라고 피력했고 러시아외무부도 러군이 부차에 주둔한 동안 민간인에게 452t의 구호물자를 제공했다고 밝혔다. 러시아측은 유엔안보리긴급회의소집을 요구하며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했으나 오히려 친우크라이나세력인 영국의 반대에 의해 무산됐다. 

부차학살의 진상은 곳곳에서 드러났다. 남미방송사<텔레수르>는 한인권전문가와의 인터뷰에서 부차의 시신은 4일이 지난 상태가 아니며 민간인들이 우크라이나군에 의해 살해된것이 분명하다고 폭로했다. 우크라이나야당지도자 일리야키바도도 부차학살은 우크라이나정보국에서 준비했고 영국정보부MI6가 관여했다고 밝혔다. 미탐사보도기자 엘리어슨은 부차시의회측이 <아조프대대가러시아의영향을받는부차를청소할것이기때문에집안에머물라>고 경고했다며 러군이 제공한 식량을 받거나 항복을 의미하는 흰색완장을 찬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고 고발했다.

마리우폴의 철강공업단지 아조프스탈을 둘러싸고 러군과 우크라이나군간의 장기간 대치상태가 발생했다. 러군이 아조프스탈을 포위하고있었음에도 초반에 빠르게 진입하지못한 이유는 신나치군대가 민간인을 <인간방패>로 삼고있었던 이유가 크다. 아조프스탈내에는 아조프대대와 우크라이나군 수천명이 있는것으로 파악됐다. 서방미디어에서는 마리우폴의 여성·어린이·노인등의 민간인 수만명이 러군에 의해 목숨을 위협받고있다고 호도했지만 실상은 그렇지않다는것을 아조프대대의 파쇼적성격과 그동안의 행적을 통해 합리적으로 유추할수 있다. 상식적으로도 러군의 공습대상이 되는 아조프스탈에 무고한 민간인을 대피시켰다는것은 말이 안된다. 러국방부는 긴급성명으로 4.19 12시부터 러군의 군사행동을 멈출것이라며 무기를 버리고 밖으로 나오라고 발표했다. 인도적통로까지 마련해주겠다며 투항을 권고했다. 러군이 여러차례 민간인대피를 촉구했음에도 <보호>목적이라며 민간인을 붙잡고있던것은 아조프대대였다. 4.25 러시아는 <오후2시부터모든적대행위를일방적으로중단>하며 민간인의 안전한 철수를 보장했고 5.7 아조프스탈내 민간인들에 대한 구조가 완료됐다. 

아조프스탈내 신나치부대가 <결사항전>을 말하는것처럼 보도되는것과는 달리 러시아국방부가 공개한 영상에서는 대거 항복하는 우크라이나군·아조프대원들이 등장하고있다. 그럼에도 아조프스탈을 둘러싼 전투가 장기화된 이유는 그내부가 견고한 지하벙커와 지하터널로 이뤄진 철저히 요새화된 군사거점으로 터널길이가 총연장 24km에 달한다는 구조적특징과 함께 이곳에 나토군소속 미군3성장군·캐나다군장성·프랑스장교50명을 포함해 수백명의 외국군사고문단과 미군생물실험실직원 수백명이 있어서 러군이 생포작전을 벌이고있다고 일각에선 보도하고있다. 이고르코나셴코프러국방부대변인은 아조프스탈내 400명의 외국인용병이 있다고 언급했다. 

한편 아조프스탈포위작전기간내 토니블링컨미국무장관·로이드오스틴국방장관이 우크라이나에 전격 방문하며 우크라이나전의 확전을 공개적으로 드러냈고 4.28 구테흐스유엔사무총장, 4.30 낸시펠로시미하원의장에 이어 5.8 바이든부인 질바이든이 연달아 방문하는 전례없는 상황이 연출됐다. 젤렌스키가 푸틴에게 조건없는 대화를 촉구하는 의도와 아조프스탈내 신나치세력과 외국인장성들이 패배가 확정됐음에도 아조프스탈내에 왜 있는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고있다. 그런 가운데 우크라이나내 미국생물연구소·천연가스회사<부리스마홀딩스>등 각종이권에 깊게 개입된 미<대통령> 조바이든의 아들 헌터바이든이 아조프스탈과 관련이 있다는 가설까지 나오고있다. 

4.28 러국방부는 우크라이나군이 헤르손중부거주지역의 유치원·학교·사회시설을 겨냥해 토츠카탄도미사일과 다연장로켓을 이용한 대규모미사일공격을 감행했다고 밝혔다. 특히 신나치대대출신의 군인들이 잔인하고 정교하게 지난세기의 나치방법을 계속 실행하고있으며 하리코프·오데사에서 신나치는 민간인을 <인간방패>로 사용해 발사위치를 갖추고있다고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5.6에는 우크라이나군대·국수주의부대가 미·영의 명령에 따라 화학산업을 포함한 대기업에 강력한 요새를 구축하고있다고 밝히며 루간스크인민공화국 세베도네츠크의 Azot회사에 중화기를 배치하고 1000명이상의 공장노동자·지역주민들을 지하시설에 <인간방패>로 잡고있다고 폭로했다. 

우크라이나전이 계속될수록 젤렌스키와 우크라이나신나치세력, 그배후에 있는 미딥스의 본색이 계속 폭로되고있다. 라라로건종군기자는 한미국매체에 출연해 젤렌스키가 빅텍과 선거사기로 선발된 지도자들처럼 꼭두각시라고 폭로했다. 빅텍은 미국내 금융자본·산군복합체등을 일컫는 말로 미정·재계를 사실상 주무르고있으며 선발된 지도자들은 바이든<정부>와 같이 부정선거로 당선된 세력을 말한다. 희극배우출신 젤렌스키가 갑자기 정계에 등장하고 최약체국대통령답지않게 각나라들의 의회에서 연설하며 대놓고 무기지원을 강요하는것은 전례없는 일로, 결코 개인의 힘으로 불가능하다.

한편 아조프대대·신나치세력을 막후에서 좌지우지하는 인물로 아조프국제부장 올레나세메냐카라는 여성이 등장하고있다. 세메냐카는 신나치의 국제적네트워크를 장악한채 우크라이나<아조프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끌고있다고 평가받고있다. 세메냐카는 철학전공의 범슬라브우월주의이론으로 무장한 인물로 2014 마이단쿠데타이후 우크라이나나치즘의 최고위급이 됐다고 밝혀졌다. 우크라이나신나치의 핵심인 <아조프>는 약1만당원으로 구성된 <아조프민족군단>정당으로도 존재하며 국민방위군산하 군대조직 아조프대대는 핵심인원이 2000명, 보조민병·협력자를 포함해 2만명정도로 추정된다. <아조프민족군단>의 수장으로 알려져있는 세메냐카는 아조프의 사명을 <유럽과서방제국의정신적부흥>이라며 사실상 파시즘의 발호와 백인우월주의적제국을 주창하고있다. 동서로 독일에서 러시아국경, 남북으로 라트비아에서 이탈리아시칠리아까지 걸쳐 만들겠다는 <제국구상>은 히틀러의 레벤스라움을 본딴것으로 보인다. 인종주의적출판물제작을 비롯해 신나치선전·선동에 능하다고 한다. <아조프민족군단>은 독일<네오나치>·프랑스<신우파>·세르비아<사탄주의자>·에스토니아<인민보수당>·라트비아<민족연대운동>·폴란드<청년전통주의자들>·스웨덴<대안>·핀란드<신이교도>·미국<백인우월주의자>등과 연대하는것으로 알려진다. 

신나치가 곳곳으로 확산돼있다는것은 3.8국제여성의날에 나토가 포스팅한 사진이 나치독일의 검은태양기장을 한 우크라이나여군이라는것으로도 드러난다. 미국내딥스와 우크라이나신나치세력의 꼭두각시노릇을 하는 젤렌스키에 대해 일리야키바우크라이나라다의원은 젤렌스키가 코카인중독에 빠져 현실을 제대로 보지못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젤렌스키와 우크라이나당국이 스스로 신나치세력임을 부정하는것에 대해 러외무장관 라브로프의 <히틀러도유대인혈통>·<우리는현명한유대인들이<가장큰반유대주의자들은유대인자신들>이라고말하는것을오랫동안들어왔다>는 폭로는 사실 공공연한 비밀이다.

한편 푸틴은 2차세계대전승전77주년을 앞둔 8일 외국지도자·민중들에게 축전을 보내 <나치주의척결>을 강조했다.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벨라루스·카자흐스탄등 구소련국가, 도네츠크인민공화국·루간스크인민공화국에 보낸 축전에서 푸틴은 <오늘날우리의공동의무는여러나라국민에엄청난고통을안겨준나치주의의부활을막는것>이라고 강조했다. 도네츠크·루간스크측에는 <현재우리군인들은선조들과마찬가지로어깨를맞대고나치쓰레기로부터조국땅을해방하기위해싸우고있다>고 긍지높게 평가했다. 우크라이나참전용사·우크라이나민중에게는 <우리의신성한의무는대조국전쟁에서패배한자들의이념적후계자들이보복하는것을막는것>이라고 선언했다.

일련의 진실은 러시아가 전개하는 특수군사작전이 국제적인 반제반딥스투쟁의 일환이며 21세기나치세력은 우크라이나신나치세력과 이들의 배후조종자 딥스라는것을 확인시켜준다. 천문학적규모의 무기투입과 SNS등을 이용한 각종선무공작에도 결국 러시아등 반제반딥스전선이 반드시 승리하리라는것은 2차세계대전의 역사적경험이 입증해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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