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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 항쟁의기관차〉 러시아의 역사적변화와 강화되는 반제반딥스전선

<러시아인과우크라이나인의역사적통합에대해>

블라지미르푸틴러대통령은 2021.7.12 <러시아인과우크라이나인의역사적통합에대해>라는 논고를 발표했다. 푸틴은 논고를 통해 <러시아와우크라이나는하나의민족,단일의통합체>·<어떤국면이나현재의정치적상황에대한찬사가아니다.이것은나의확신이다.>라고 단언했다. 푸틴은 <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벨라루스인은모두유럽에서가장큰국가였던고대루시의후예다>라며 역사적뿌리를 강조했다. 특히 우크라이나·우크라이나인이라는 말은 각각 외부국경지역, 그국경을 지키는 군인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크림반도에 대해서도 18세기후반 오스만제국과의 전쟁후 러시아의 일부가 됐다며 크림반도합병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현대 우크라이나는 <전적으로소비에트의발명품>이라고 짚었다.

현재 우크라이나에 대해 <위험한지정학적게임>에 빠졌다고 분석하며 그저의는 <우크라이나를유럽과러시아사이의장벽으로,러시아와의교두보로만드는것>이라고 비난했다. 마지막으로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진정한 주권이 러시아와 협력해야만 가능하다고 확신하며 <우리의관계는대대로이어진다>·<결국우리는하나의민족이다>라고 표명했다. 더해 <러시아는<반우크라이나>가된적도없고앞으로도없을것이다.그리고우크라이나가어떠해야하는지결정하는것은시민들의몫이다.>라고 역설했다.

 

키예프루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뿌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882경에 형성된 키예프루시공국(Kievan Rus)에 기원을 두고있다. 키예프국은 대략 3시기로 구분된다. 첫번째시기는 역사가 불분명해 반전설적으로 내려온 시기로 스칸디나비아출신·노브고로드공국대공 올레크베시가 드네프르강가에 있는 키예프를 점령했던 882부터 972~980까지다. 이시기 키예프공들은 삼림과 스텝지대양쪽, 스칸디나비아와 발트지역, 러시아와 콘스탄티노플등 중요교역로에 키예프가 위치한것을 이용해 다른 동슬라브인들을 지배하에 뒀다. 두번째시기는 대략 980~1054까지로 블라지미르대공·야로슬라프현공의 통치기로 키예프가 가장 번성한 시기다. 세번째시기는 쇠퇴·몰락의 시기로 학자마다 의견은 다르지만 몽골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 1240으로 보고있다.

1113경 편찬된 <원초연대기>에 따르면 바랑기아인(북게르만일파)인 올레크가 키예프를 점령해 새수도로 삼았다. <위대한모험>이라 불리는 962~972 10년간은 스뱌토슬라프의 통치기다. 스뱌토슬라프는 964 대규모동방원정을 시작해 다양한 슬라브족·핀족·투르크족을 정복하고 하자르국을 공격했다. 하자르국은 스텝지대에 위치한 국가들중 키예프국에 가장 위협적인 국가였다. 스뱌토슬라프를 중심으로 한 루시인들은 하자르군대를 격파하고 하자르수도 이틸을 장악·약탈했다. 하자르국은 이후 반세기동안 계속 쇠퇴하다가 멸망했다.

하자르국은 투르크계유목민이 세운 나라였으나 9세기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믿는 주변국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두종교의 공통분모인 유대교를 국교로 선택했다. 그러나 비잔틴제국과 조약을 통해 동맹을 맺은 키예프국은 하자르가 <버림받은자들의종교>인 유대교로 개종했고 무슬림이 증가하고있다는 이유로 하자르를 공격했다. 일각에서는 하자르의 후손이 아슈케나지유대인으로 전체 유대인의 80%를 차지하고있다고 주장한다.

스뱌토슬라프는 동방원정을 통해 키예프국의 통치하에 동슬라브족이 통일되는 작업을 완성했고 서쪽으로 진군했다. 볼가강에서 다뉴브평원에 이르는 영토를 통치하게 된 스뱌토슬라프는 다뉴브강을 통치중심으로 하는 루시연합국을 구상했으나 발칸반도를 중심으로 강대한 왕국을 형성하고있던 비잔티움에 가로막혀 좌절됐다. 스뱌토슬라프사망후 형제들사이에 내전이 발생했고 그내전을 정리하며 980경에 키예프국의 통치자가 되고 키예프국은 전성기를 맞이한다. 블라지미르는 서쪽으로는 폴란드에게 빼앗긴 우크라이나서부·폴란드남부에 이르는 갈리치아의 도시들을 되찾고 북쪽으로는 발트해까지 확대했으며 주변의 민족들을 굴복시키고 국경지역으로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역사학자 마르틴은 <블라지미르의정책은각각별도로공물을바치던종족들의집합체에불과하던자신의영토를,단일한지배가문을가진정치구조만이아니라공통의종교와문화적연결고리로결합된통합적인영역으로변모시키기위한초석을놓았다>고 평가했다. 블라지미르시대에 와서 키예프국은 정치·경제·종교·문화적으로 통일된 중앙집권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1019부터 시작된 야로슬라프통치기에 키예프국의 위세가 절정에 달한다. 영토는 발트해로부터 흑해, 오카강입구에서 카르파티아산맥까지 이어졌고 키예프의 지배가문은 유럽의 지배가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 국내적으로도 종교·법·교육·건축·예술에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야로슬라프사후 5명의 아들들이 키예프를 분할통치하며 쇠퇴에 접어든다. 계속되는 내전으로 키예프는 거듭 분열되더니 1240 몽골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몽골에 의해 지배되는 암흑기가 시작된다. 몽골에 의한 지배와 분할로 인해 분령시기가 시작됐다. 몽골지배로 인해 초기100년간 종말·분열이 심화됐으나 키예프시대 형성된 제도·문화로 인해 극복이 가능했다. 종교적으로 키예프의 수좌대주교는 키예프영토의 전체교회의 우두머리였으며 키예프에 있던 대공은 세속권력자의 자리를 차지하고있었다. 이와 함께 <러시아땅>이라는 개념도 러시아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있다. 키예프의 유산이 러시아인들의 민족적공통성을 형성한 점이다. 이후 등장하는 모스크바국이 키예프국과 다른 측면이 있다고 해도 러시아·우크라이나가 키예프국이라는 한뿌리를 공유하고있다는것은 부정할수 없다.

몽골에 의해 키예프와 남부러시아가 파괴되면서 사람들은 유럽러시아의 북부·북동부의 광대한 영토로 이주했다. 그러면서 키예프루시인들이 언어적, 민족적으로 대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벨라루스인으로 나뉘어지게 된다. 특히 우크라이나·벨라루스민족의 무대였던 남서부·서부러시아가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의 지배와 영향을 받는 반면 대러시아인들의 전체영토는 그외로 있었다. 러시아는 분령시기에 몽골만이 아니라 수많은 다른 지역으로부터의 침공과 점령으로 국제적지위를 상실했다. 리투아니아와 폴란드가 차지한 러시아서부지역을 제외하고 나머지지역에서 많은 공국들간 각축전이 벌어지다가 모스크바공국에 의해 재통합이 되면서 분령시기가 종결된다.

 

모스크바공국의 중앙집권화와 근대러시아의 시작

대러시아는 지방의 독립적정치세력들을 제거하고 대공의 단일한 권위를 수립하면서 통합됐다. 14~15세기 모스크바는 중앙집권화된 정치권력, 몽골칸국·경쟁국에 대한 군사적승리, 세속·종교적개념에 근거한 통치이념을 바탕으로 <러시아땅모으기(sobiranie russkikh zemel)>를

<민족적운명>이자 전통으로 여겼다. 특히 1462~1505 재위한 이반3세때 <러시아땅모으기>가 급속도로 진행돼 러시아분령지를 통합했고 스스로를 이전 키예프국에 속한 모든 땅의 합법적세습자로 간주했다. 이는 상당부분 키예프국을 계승해 성장해오며 러시아서부·남서부의 방대한 영토를 지배하고있던 리투아니아에 대한 도전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반3세의 정치력이 강화되면서 모스크바·리투아니아경계지대의 많은 분령지들이 리투아니아종주에서 이반3세로 넘어갔다. 이후 남쪽의 공들이 모스크바로 넘어가려하자 전쟁이 발발했고 모스크바가 승리했다. 이후 이반3세는 남부·중부유럽러시아에 있는 거대한 땅 체르니고프·세베르스크의 많은 부분을 획득했고 전쟁승리를 거듭하며 영토를 재건·확장했다. 그러면서 몽골로부터 최종적으로 벗어나게 되고 비잔티움과 혼맥으로 연결하면서 비잔티움의 문장인 쌍두독수리를 사용하게 됐는데 이는 지금까지 이어져오고있다. 이시기부터 짜르(tsar)·사모데르제츠(samoderzhets)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대관식을 제도화했다. 이반3세는 최초의 민족적인 러시아군주로 불렸다.

이반4세기에 들어 모스크바공국은 타타르인들이 세운 카잔칸국과 아스타한칸국을 점령하면서 볼가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고 시베리아쪽으로 영토확장이 이뤄졌다. 그러면서 러시아는 다민족국가·러시아정교국가의 틀속에 비슬라브계통·비기독교계통이 포함되면서 민족·문화적으로 더욱 확대됐다. 한편 통치후반부 발생한 기근사태는 1601~03동안 반복됐고 봉건제가 고착화되면서 농민들은 경제적으로 피폐해지고 권리를 박탈당한채 온갖 금지조치에도 불구하고 국경쪽으로 도망쳤다. 도주한 농민들중 일부는 군사조직인 카자크가 되기도 했다. 카자크들은 정치·사회체제에 대한 증오심으로 그뒤 동란의 시대에 사회를 혼란시킨 주요세력이 됐다. 모스크바공국은 17세기초 극히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동란의 시대를 거쳤다. 이시기 표도르짜르가 사망하고 모스크바국의 통치가문이 단절됐다. 계승법이 존재하지않은 상황에서 제위계승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다수 등장했고 러시아인들은 서로 새통치자를 찾았다.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농민·민중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면서 수도에서만 10만명이상의 사람들이 사망했다. 이같은 현실로 인해 농민봉기가 발생하며 사회·계급적갈등이 폭발했다.

1624~38 우크라이나를 휩쓴 카자크·농민들의 반란은 러시아·우크라이나관계를 전환시켰다. 폴란드의 지배하에 있었던 우크라이나는 1648 보단흐멜니츠키의 지휘하에 우크라이나해방전쟁을 시작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크림반도 타타르인들의 도움으로 몇번의 승리를 거뒀으나 폴란드와 협상이 결렬되자 모스크바의 도움에 기댔다. 모스크바공국은 일찍이 여러차례 우크라이나의 요청을 받았으나 폴란드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요청을 받아들이지않았다. 모스크바는 폴란드가 카자크들에 의해 약화됐고 과거 리투아니아가 빼앗아간 러시아땅을 수복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요청을 수락했다. 1654.1 페레야슬라브에서 조약을 체결하며 우크라이나의 카자크와 그들의 땅이 모스크바와 통합됐다. 그결과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러시아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며 <13년전쟁>이 시작됐고 1667 안드루소보조약을 체결하며 종전했다. 종전결과 모스크바국은 영토가 더욱 확대돼 드네프르강우측 우크라이나는 모스크바에 양도되고 좌측은 폴란드지배하에 남으면서 드네프르강은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모스크바국사이의 새로운 국경이 됐다.

 

근대국가로의 탈바꿈과 영토확장

17세기 러시아는 서쪽으로는 오늘날의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남쪽으로는 카스피해에 이르는 스텝지대, 동쪽으로 광활한 시베리아지역을 포괄할 정도로 영토가 확장됐고 근대국가이자 다민족제국이 됐다.

1682등극한 표트르1세는 러시아역사에서 새시대를 연 왕으로 평가된다. 통치자·영토에 대한 새로운 명칭때문에 상트뻬쩨르부르크시대, 혹은 대러시아인들과는 다른 민족들이 점점 더 많이 포함되면서 전러시아시대라고도 불렸다. 러시아의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절대주의통치도 강화됐다. 러시아를 열강에 들어가도록 만들었으며 비러시아인들에 대한 예속을 심화시킨 팽창주의전쟁의 시기이기도 하다. 표트르1세는 1695 투르크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투르크는 크림반도타타르인들의 보호세력이자 흑해·남부러시아해안을 통제하던 강국이었다. 돈강유역에 위치한 아조프를 중심으로 육로와 해로를 봉쇄하자 투르크인은 아조프를 포기하고 물러서면서 이지역에서 러시아의 위상이 높아졌다. 표트르1세는 투르크와 평화협상을 하는 한편 작센·폴란드통치자 아우구스투스2세가 조직한 대스웨덴군사동맹에 합류하며 대북방전쟁을 시작했다. 표트르1세는 핀란드남쪽에 위치한 리보니아·에스토니아쪽을 조직적으로 진격했고 핀란드만을 장악했으며 1703에는 네바강입구에 스웨덴과 싸우기 위한 전초기지로 상트뻬쩨르부르크를 건설했다. 스웨덴왕 칼12세는 우크라이나지방으로 진격했으나 2000여명의 카자크인들만 스웨덴편으로 돌려세웠을뿐, 우크라이나의 표트르(1세)에 대한 충성은 확고했다. 칼12세는 고립됐고 러시아의 주력군은 1709.7 폴타바전투에서 스웨덴군을 궤멸하며 승리했다.

이후 표트르1세는 발트해남쪽해안에서 작전하던 동맹국을 도와주는 한편 다른 부대는 발트해동쪽지역으로 계속 진격하며 1713 핀란드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1714에는 스웨덴함대에 맞서 승리를 거뒀다. 1721 스웨덴은 러시아와 니슈타트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의 결과 러시아는 발트지역에 확고히 자리잡게 됐고 <유럽을향한창>을 획득했으며 스웨덴을 대신해 대륙북부의 지배강국이 됐다. 이후 인도·중국과의 관계와 교역을 확대하기 위해 중앙아시아에 관심을 돌렸다.

예카테리나2세통치기 러시아는 흑해인근과 키예프국의 일부였던 동쪽지역과 남부지역을 획득하기 위해 투르크와의 싸움을 시작했다. 크림반도타타르인들은 킵차크칸국을 계승했고 투르크술탄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러시아는

1차투르크전쟁을 통해 1770.7 투르크해역에서 오스만제국의 해군을 격침시켰다. 1774 체결된 쿠축카이나르지조약에 의해 러시아는 크림반도의 항구를 비롯한 흑해와 다른 전략적요충지로 접근할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1783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병합했으며 1785무렵 흑해에 상당한 규모의 함대를 건설하고 세바스토폴을 주요기지로 삼았다. 1787 투르크가 선전포고를 하며 2차투르크전쟁이 발발했다. 러시아군대는 투르크가 난공불락이라 여겼던 이스마일요새에서 승리했고 콘스탄티노플까지 진격했다. 1792.1 야시조약을 통해 러시아의 흑해연안에서의 영토는 더욱 확대됐고 투르크는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한것을 인정했다.

1801부터 시작된 알렉산드르1세통치기에도 대외확장은 계속됐다. 1801 그루지야의 동쪽지역이 합병됐고 1803~10 러시아지배권이 그루지야서부까지 확대됐다. 그루지야는 자발적으로 러시아제국에 편입됐고 그결과 러시아는 대캅카스산맥을 가로질러 영향력이 확장됐다.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를 식민지경쟁의 적수로 봤다. 러시아의 그루지야병합으로 1804~13까지 러시아·페르시아전쟁이 발발했다. 러시아가 승리하면서 굴리스탄조약에 의해 페르시아는 그루지야에서의 러시아지배를 인정하고 아시아서북부흑해와 카스피해사이에 위치한 산악지역인 캅카스의 일부지역을 러시아에 양도했다. 그루지야합병은 1806~12 러시아·투르크전쟁의 원인중 하나이기도 했다. 한편 프랑스의 나폴레옹보나파르트에 대항해 3차대프랑스동맹전쟁이 발발했다. 오스트리아·러시아연합군은 1805.12 나폴레옹에게 참패했다. 1807.7 프랑스·러시아, 프랑스·프로이센사이에 틸지트조약이 체결되며 임시적으로 화의가 체결됐다. 알렉산드르1세는 1808~09 스웨덴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하며 프레데릭샴강화회의를 통해 핀란드를 획득했다.

1812 나폴레옹이 러시아에 침입했으나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1814 파리로 진격하며 전쟁은 종식된다. 이역사적사실은 러시아가 유럽강국이 됐다는것을 상징했다.

1853 러시아·투르크간 오랜 갈등에 더해 러시아를 견제하던 주변국들의 참전으로 크림전쟁이 발발했다. 1853.10 러시아·오스만투르크사이 전투가 시작돼 러시아인들이 투르크함대·수송선을 격침시킨 후 영국·프랑스가 1854.3 트루크에 합세했고 이탈리아반도서쪽에 위치한 사르데냐가 1855 개입했다. 오스트리아도 러시아의 반대편에서 외교적압력을 행사했다. 크림전쟁의 결정적인 전선은 1894.9에 형성된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해군기지였다. 연합군은 기지장악에 집중했고 러시아는 11개월반을 방어했으나 지휘부의 무능으로 결국 기지는 연합군이 점령했다. 러시아는 1855.9 세바스토폴을 포기했고 니콜라이1세계승자 알렉산드르2세와 동맹국은 1856 파리조약을 통해 강화했다. 러시아는 투르크에 다뉴브강입구·베사라비아일부를 양도하고 흑해의 중립화를 받아들였다. 파리조약을 통해 러시아의 입지는 매우 좁아졌고 군사력·안보의 약화로 인해 이후 전제정치가 약화됐다.

 

자본주의화와 사회주의혁명

1855부터의 알렉산드르2세시기, 러시아는 농민봉기가 만연한 한편, 화폐경제가 발달하고 시장경쟁이 치열해졌다. 중소지주들은 자신의 농노들을 제대로 부양할수 없었고 귀족들은 엄청난 빚을 지고있었다. 19세기전반 러시아경제전체에 자유노동은 흔한 일이 됐고 농노제는 시대착오적인 제도로 전락했다. 전반적인 상황은 봉건제의 해체와 자본주의화를 가속화했다. 1860년대 들어 농민봉기·대학생봉기·폴란드반란·황제암살시도등 저항운동이 거듭되면서 지배계급의 <대개혁>을 앞당겼고 사회적으로는 <인민주의>가 등장했다. 알렉산드르2세는 크림전쟁패배후 등장하면서 러시아의 위신을 회복하는데 집중했다. 재임기간 캅카스·중앙아시아·극동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1870년대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이 중심이 돼 형성된 국제적위기는 러시아·오스만제국사이의 전쟁으로 연결됐다. 1875.7 헤르체고비나와 보스니아에 대한 투르크의 지배를 반대하는 봉기를 시작으로 반란이 발칸반도를 휩쓸었다. 1876 불가리아의 봉기를 투르크가 진압했고 발칸반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전투·대량학살이 벌어졌으며 세르비아·몬테네그로는 오스만제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러시아민중들사이에 범슬라브주의가 확산되면서 전쟁은 격렬해졌고 많은 희생을 불러왔으나 1878 결정적으로 승리하면서 캅카스와 남베사라비아의 중요한 국경지역을 획득했다. 발칸반도에 거대한 슬라브국가가 성립되는 상황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반발로 좌절되면서 재조정된다. 불가리아는 분열되고 세르비아·몬테네그로·루마니아는 독립을 유지했으며 러시아는 캅카스지역을 보유하게 됐다. 알렉산드르2세는 중앙아시아로의 팽창을 위한 군사원정을 단행하면서 동북아시아까지 진출했다. 1689 체결된 중국과의 네르친스크조약이후 알렉산드르2세 통치기까지 극동러시아의 국경은 변함이 없었다. 1847 러시아는 아무르지역까지 팽창했다. 중국이 영국·프랑스와의 전쟁을 벌이고 반란으로 분열된 상황을 이용해 1858 아이훈조약, 1860 베이징조약을 체결하고 아무르강좌안과 우수리지역을 차지했다. 1860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톡을 신도시로 건설했는데 이는 <동방의지배>를 뜻했다.

러시아의 동방으로의 팽창주의는 1904~05 러일전쟁에서 절정에 달했다. 러시아는 1891~1903사이 시베리아횡단철도를 부설하며 만주·중국·코리아를 연결했다. 일본은 1894~95 청·일전쟁에서 승리했고 시모노세키조약을 통해 중국의 일부영토를 획득했고 조선의 식민지화를 심화시켰다. 러시아는 중국과의 조약으로 만주를 통해 연해에 이르는 철도부설권을 얻었다. 이는 북만주에서 러시아세력권이 확립되는것을 의미했다. 가열화되는 영토확장·식민지화로 인해 러시아와 일본의 충돌은 필연이었다. 일본이 1904.2 뤼순항구의 외항에 정박해있던 러시아함대를 기습하며 러·일전쟁이 시작됐다. 러시아는 패전을 거듭했다. 일본은 선양인근, 다른 지역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이면서 러시아의 주력군을 만주북쪽으로 밀어냈다. 1905.5 쓰시마해전직후 휴전이 성립됐고 1905.9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하며 마무리됐다.

니콜라이2세통치후기인 1905 러시아의 사회적모순이 폭발하며 혁명이 발생했고 1914 1차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전쟁개시 5개월만에 40만러시아군인이 사망했고 100만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1915중반에는 25%의 러시아군인이 무기도 없이 전선으로 파견됐다. 정치적으로 니콜라이2세가 전선에 나가있는 동안 실권을 잡고있던 알렉산드라황후는 그의 자문관인 그리고리라스푸틴의 조종하에 국정을 파탄으로 몰고갔다. 정치적위기와 국제정세에 더해 경제·민생문제가 심화된 조건에서 러시아혁명세력은 레닌의 지도하에 1917 10월혁명에 승리했다.

 

통합과 초강대국으로의 변화

10월혁명승리후 11월 <러시아각민족의권리선언>을 선포한 러시아는 12월 전제권력하에 통합됐던 우크라이나와 핀란드의 국가적독립을 승인했다. 같은달 하리코프 1차우크라이나소비에트대회에서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공화국이라 선언하고 러시아와의 긴밀한 동맹수립을 선언하면서 최초의 소비에트민족공화국이 됐다. 1918.3까지 벨라루스·에스토니아·크림반도·볼가강연안지역등 러시아주변나라·지역은 소비에트로 권력이 넘어왔다.

1918 러시아붕괴를 목적으로 제국주의세력들의 침공이 감행됐다. 독일정부는 러시아와 체결한 브레스트·리토프스크휴전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2월 모든 전선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독일은 며칠만에 우크라이나대부분지역을 비롯해 러시아서·북쪽국경주변도시들을 점령하고 뻬쩨르부르크를 위협했다. 신생국이었던 러시아의 중앙위원회는 강화조약체결을 결정하고 1918.2.18 독일정부에 전보를 보냈다. 독일은 라트비아·에스토니아의 전영토를 요구했으며 우크라이나는 독일에 종속시킬것을 요구했다. 3월 독일과의 강화조약이 체결됐고 소비에트우크라이나중앙집행위원회대표단도 이를 비준하는데 찬성하면서 비로소 제국주의와의 전쟁에서 일시적으로나마 벗어날수 있었다.

우크라이나는 독일에 의해 종속됐음에도 1918.7 우크라이나공산당1차대회를 개최했다. 대회에서 우크라이나공산당은 단일한 러시아공산당에 가맹돼있다는 점을 밝혔다.

1917.12 비밀협정을 통해 러시아침략을 노리고있던 제국주의세력들은 1918봄 무르만스크·블라디보스톡에 부대를 상륙시켰다. 독일도 또다시 강화조약을 위반하고 핀란드·벨라루스·우크라이나를 비롯한 광범위한 지역을 점령했다. 독일을 비롯한 제국주의세력은 초반 러시아가 신생사회주의국가라는 불리한 조건을 이용해 침략속도를 높였으나 결국 각국의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민중의 저항과 붉은군대·민병대의 반격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1919.12 8차당협의회에서는 <우크라이나에대한소비에트정책에대해>·<우크라이나소비에트권력에대해>결정이 채택됐다. 결정에서는 소비에트와 우크라이나사회주의소비에트공화국의 관계는 연방의 관계라고 규정했다.

제국주의의 러시아침략전쟁을 승리로 결속한 후 1922.10 러시아공산당위원회총회에서는 소련형성을 위한 결정이 채택됐다.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우크라이나·벨라루스·캅카스공화국연방을 소련(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으로 통합하고 각각의 공화국에게 연방에서 자유롭게 탈퇴할수 있는 권리를 포함하는 조약을 체결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했다. 10~12월에 걸쳐 우크라이나·벨라루스·아제르바이잔·그루지야·아르메니아의 공산당은 중앙위총회에서 소련으로 통합을 찬성했다.

1929 대공황으로 인해 세계경제가 파탄에 이르렀어도 소련은 신경제정책을 종식하고 사회주의계획경제체제를 강화하며 소련경제성장을 가속화했다.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흑토지대·농경지대에서는 농업협동화가 급속도로 단행됐다.

대공황의 여파로 파시즘이 대두되며 2차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전쟁직전인 8월 소독불가침조약을 체결했으나 독일은 공공연히 우크라이나등 소비에트영토탈취를 위한 전쟁준비를 감행했다. 소련은 독일군이 소련국경으로의 진출을 막고 주변지역을 파쇼독일의 압제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1939.9 서우크라이나·벨라루스서부에 붉은군대를 진출시켰다. 이두지역은 소비에트령 우크라이나, 소비에트령 벨라루스로 재통합돼 각각 우크라이나민족, 벨라루스민족의 단일국가가 형성됐고 이후 조직된 공산당은 전연방공산당에 편입됐다.

1941.6 파쇼독일은 소·독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며 소련을 침략했다. 7월 파쇼독일은 리투아니아전역·몰다비아·라트비아일부·서부벨라루스·서부우크라이나를 점령했다. 소련수호를 위해 러시아인뿐만아니라 주변지역나라의 민중들까지 투쟁에 나섰다. 소련은 비상전권최고기관인 국가방위위원회와 최고사령부를 창설하고 최고사령관으로 이오시프스탈린을 임명했다. 소련은 최고사령부를 중심으로 정규군인 붉은군대와 각지역 민병대의 가열한 전투속에 점차 초반의 열세를 딛고 승기를 잡았다. 1942.5 전연방공산당중앙위원회결정에 따라 파르티잔운동중앙사령부가 창설됐다. 1944중반부터 소련과 주변국의 반파쇼군대들이 서진하며 동부유럽을 차례로 해방시켰고 1945.5 베를린을 함락하며 결정적으로 승리했다. 소련은 2차세계대전을 거치며 15개공화국으로 구성된 세계최대연방국가로 변모했으며 전후 동프로이센일부·서부우크라이나·파르파티아우크라이나지방·극동일부지역을 소련영토로 편입하며 세계초강대국으로 전환됐다.

 

기회주의적변질과 해체

1953 스탈린사후 벌어진 권력암투끝에 관료주의·수정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했다. 1954 니키타흐루시쵸프는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게 넘겨줬다. 영토문제는 소련정부의 최고회의의 동의와 국민투표를 거쳐야하는 사안인데 흐루시쵸프는 기본적인 절차를 완전히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 넘겨줬다. 그배경에는 흐루시쵸프가 러시아·우크라이나국경마을 칼리노프카출신으로 유년시절을 우크라이나에서 보냈으며 1·2번째부인들이 우크라이나출신이고 정치적으로 우크라이나공산당1서기출신으로서 1949 공산당중앙위서기국원이 된 점을 들고있다. 당시는 연방으로 통합돼있었기에 반발이 없었으나 1991 소련해체후 크림반도를 둘러싼 갈등의 근원이 됐다.

1956.2 소련공산당20차대회에서 흐루시쵸프가 한 배신적인 반스탈린연설은 관료주의자들이 정치적수정주의의 시작을 알린 연설이었다. 제국주의와의 <평화공존>을 외교노선으로 채택하고 연방내 민족의 자주성을 수호하지못한 소련정부의 기회주의성은 동유럽사회주의의 동요를 불러왔다. 동유럽에서의 반사회주의운동은 1968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의봄>으로 절정에 달했다. 레오니트브레즈네프는 <브레즈네프독트린>에 의거해 체코슬로바키아에 병력을 투입했다.

1959 리처드닉슨미부통령이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1961.6 흐루시쵸프와 존F케네디와의 정상회담이 이뤄졌으나 <외교참사>라 불릴 정도로 그어떤 성과를 낳지못하면서 <평화공존전략>의 오류가 드러났다. 수정주의적대외정책의 오류는 방미 2년후 발생한 쿠바미사일위기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났다. 1962.9 소련·쿠바무기원조협정에 따라 소련은 쿠바에 일류신장거리폭격기등과 SS미사일기지건설을 약속했음에도 미국의 압박에 의해 결국 이를 철회한다. 쿠바민중이 피델카스트로의 <전민중이무장해침략자를격퇴하자>는 호소에 응답해 군인이 27만명으로 증가하는등 쿠바공산당·민중의 반미항전의지가 충분했음에도 소련은 미국에 먼저 메시지를 보내며 미사일을 철회함으로써 굴욕적으로 나왔다. 뿐만아니라 소련의 심화되는 수정주의문제는 중국과의 갈등이 격화되는 주요원인이 됐다. 중국의 모택동은 1962.9 당중앙위원회8기10차전원회의에서 계급·정세·모순문제를 제기하며 당내반수정주의투쟁의 이론으로 <모순론>을 주창했다. 중소분쟁이 격화되면서 1969봄에는 소·중국경인 아무르강과 지류인 우수리강유역의 영유권을 놓고 국경분쟁도 발생했다.

소련은 미국과 1963 제한적핵실험금지조약을 체결했고 1969~79 2차례에 걸쳐 SALT(전략무기제한협상)를 진행했다. SALT는 상호간 전략핵무기 미사일수를 제한하고 정찰위성으로 검증하자는 잠정협정과 미사일요격능력에 제한을 두는 ABM조약을 핵심내용으로 했다. SALT는 나토가 1979 미순항미사일 퍼싱2의 배치를 승인하고 같은해 12월말 소련이 아프간(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결렬된다.

소련의 아프간군사개입명분은 친소사회주의정권을 타도하려는 아프간부족세력·이슬람세력을 저지하기 위한것이었다. 아프간은 1978.4 좌익쿠데타로 누르모하마드타라키와 인민민주당이 정권을 잡았으나 내분과 무능으로 인해 민심이 급속도로 이반했다. 더해 미국지원하에 반러이슬람세력이 기승을 부리고있었다. 미국은 아프간 무자헤딘(이슬람전사)들에게 달러·무기를 대줘 소련군과 싸우도록 하면서 아프간은 사실상 소련·미국의 전쟁터로 전변됐다. 10년간의 전쟁끝에 소련은 패배했다. 명분도 실리도 없이 끝난 소련의 아프간개입은 소련붕괴를 가속화시켰다.

1982 브레즈네프사후 소련의 붕괴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1985.3 미하일고르바쵸프는 정치·경제<재건>계획 <페레스트로이카>를 실시하며 사회주의기본경제체제를 해체시키고 당을 약화시키기 위해 책동했다. 소련의 기회주의적본색은 필연적으로 연방의 단결을 약화시켰고 여러 민족들의 분리·독립문제를 심화시켰다. 1991 취임한 보리스옐친은 반사회주의책동으로 소련해체를 본격화했다. 8.25 소련공산당이 자진해산했다. 12.8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는 소련해체·독립국가연합창설에 합의한 벨라베자조약을 체결했다. 1991.12 모든 공화국들이 <독립>선언을 하면서 12.31 법률상 소련은 사라졌다.

 

우크라이나를 매개로 러시아침략책동을 벌이는 제국주의세력

러시아·우크라이나국경을 중심으로 한 유럽에서의 전쟁위기가 심화되고있다. 2021.12.3 미워싱턴포스트는 미정부관계자를 인용해 <러시아는올해초우크라이나국경근처에서실시한훈련보다2배많은규모로,2022초우크라이나에대한공세를준비하고있다>·<장갑·포병등장비와약17만5000명의병력으로추정되는100여개대대전술단의광범위한이동이있을것>이라고 보도했다. 11월 미국은 러시아가 10만명으로 구성된 100개전술대대를 동원해 크림반도·러시아국경·벨라루스등 다양한 지역에서 우크라이나를 침공할수 있다는 정보당국의 평가를 유럽동맹국들과 공유했다. 같은시기 부다노프우크라이나국방정보국장도 러시아가 9만2000명이 넘는 병력을 우크라이나국경에 집결시켰으며 내년 1월말이나 2월초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위한 공격을 준비하고있다고 말했다. 미국·유럽은 초강력 대러제재의 일환으로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해저가스관 노르트스트림2폐쇄를 꺼내들었다. 노르트스트림2는 러시아북서부에서 발트해를 지나 독일북부로 이어지는 기존가스관노선에 2개라인을 추가하는 사업으로 총길이1230㎞, 연간수송량550억㎥에 달한다. 미행정부는 역대로 러시아의 국력강화로 연결될 이가스관사업을 반대해왔다.

12.4 러시아 인테르팍스통신에 따르면 미공군소속RC-135정찰기·미육군제트정찰기CL-600이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모스크바로 운항하던 민간여객기에 근접비행을 했다. 그중 1대는 민간여객기항로를 침범하면서 여객기에 접근하며 위협했다. 10일에는 러시아수호이-30전투기가 흑해상공을 비행하는 미군P-8A초계정찰기를 요격하며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 조성됐다.

우크라이나위기의 근본원인은 미국·나토의 협정위반에 있다. 1990 체결된 2+4조약(독일관련최종해결에관한조약)은 통일독일에 대한 국제적지위를 결정하고 영토·군사문제등을 해결하기 위해 동·서독2개국과 소·미·영·프 4개국이 체결한 조약이다. 국제법상 4개국의 점령지였던 베를린의 주권회복과 독일내 나토군잔류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있는 이조약에서 나토가 동독을 포함해 동유럽으로 진출하지말것에 대해 합의했다. 그러나 1999.3 폴란드·헝가리·체코, 2004.3 라트비아·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가 나토에 가입하며 러시아에 대한 군사적위협이 심화됐다. 그러던중 2003~05 그루지야·우크라이나·키르기스스탄에서 대규모시위가 연이어 일어났다. 특히 2013.11.21 우크라이나에서 유로마이단(Euromaidan 유럽광장)이라 불리는 대규모시위가 시작됐고 2014.2 대규모사상자가 나왔다. 이후 마이단저격수들이 야누코비치친러정권을 반대하는 시위를 조직하는 자들로부터 돈을 받고 활동했으며 갈등을 심화시키기 위해 친서방파·친러시아파 모두를 겨냥한것으로 추정된다. 2014.2 쿠데타로 야누코비치우크라이나대통령을 퇴진시키고 들어선 포로셴코정권의 반러정책은 우크라이나의 20%를 차지하는 러시아계의 반발을 샀으며 특히 60%가 러시아계인 크림반도가 급속도로 러시아와의 합병을 추진하게 된 직접적원인이며 같은해 돈바스내전이 발발하게 된 계기다.

현재 미국이 중심이 돼 확산시키고있는 <우크라이나침공임박설>에 대해 페스코프크렘린대변인은 <이히스테리는인위적으로조장되고있다>·<해외에서병력을데려온사람들이우리자신의영토에서벌어지는일에대해이례적인군사활동이라고비난하고있다.그건바로미국>이라고 비난했다. 더해 우크라이나사태해결의 전제조건으로 나토의 확장중단을 들고있다. 2021.12.17 랴브코프러외무차관은 언론브리핑을 통해 나토·미국등 제국주의연합세력에 보내는 안전보장에관한제안서초안을 공개했다. 제안서는 <나토확장·우크라이나나토가입중단>·<1997.5전까지나토에가입하지않은국가에추가적병력·무기배치하지말것>·<우크라이나·동유럽·캅카스·중앙아시아에서나토군이어떤군사활동도하지말것>·<중·단거리미사일배치하지말것>·<합의된접경지역에서는여단급훈련중단,군사훈련정보정기적교환>·<비상접촉위한핫라인구축>·<모든분쟁을평화적으로해결,무력사용자제>를 요구하고있다.

 

갈수록 공고해지는 북··러전략적관계

러시아·중국의 전략적관계가 공고해지고있다. 2021.8 러·중은 서부연합-2021합동군사훈련을 진행했다. 훈련에는 비상병력·중화기투하, J-16전폭기의 장거리공격, 무인기활용등 혁신적전투전술에 대한 시험이 포함됐다. 미제침략세력의 군사적압박속에 중·러의 군사적훈련은 중국의 최신무기가 러시아와 공유된다는 점에서 양국의 군사공조가 준동맹수준으로 향하고있음을 보여주는 훈련으로 평가됐다. 특히 훈련은 중국 닝샤후이족자치구 칭퉁샤전술훈련기지에서 실시됐는데 중관영매체 환구시보는 <칭퉁샤훈련기지를러시아군에공개한것은처음>·<양국의신뢰가그어느때보다높다는것을의미한다>고 언급했고 러시아경제신문 코메르상트는 <러시아군이합동훈련에서중국군의무기를사용하는것은처음>이라고 밝혔다. 10.14 연해주남부 표트르대제만에서 해상연합-2021합동군사훈련을 진행했다. 훈련에는 중국의 최신예대형구축함 005형미사일구축함, 052D형구축함 쿤밍, 054A형호위함 빈저우·리우저우, 903A형보급함 둥핑후등이 참가했고 대잠초계기·헬리콥터등도 동원됐다.

러·중의 전략적관계는 미제침략세력의 두나라에 대한 적대시정책심화에 대해 공동대응하기 위한 목적으로 강화되고있다. 양국은 1994 중국서부국경문제가 타결되면서 1996 전략적동반자관계를 선언했고 러시아가 심양의 중국공장에서 중국의 수호이SU-27K생산을 계약하며 군사·외교적으로 강화되기 시작했다. 2000.7 푸틴이 방중한데 이어 2001.7 장쩌민이 방러해 선린우호협력에관한조약을 체결했으며 2002.12 전략적동반자관계를 강화해 국제·전략적균형과 안정을 도모하기로 결정하며 15년간 군사협력계획을 체결했다. 2005.7 양국은 미국의 군사패권을 비판하며 21세기 새로운 다극적국제질서를 형성하기 위해 상호협력을 결정하고 카자스흐탄 아스타나에서 개최된 SCO(상하이협력기구) 6개국정상회의에서 2개서명을 발표했다. 하나는 중앙아시아에서의 미군의 조기철군을 촉구한것이고 다른 하나는 <색깔혁명>으로 불리는 중앙아시아에서의 정권교체에 외세개입을 반대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2005.11 미군이 우즈베키스탄에서 공군기지를 완전철수하는 성과를 낳았다. 2006 푸틴은 베이징에 방문한 당시 지난10년간 양국관계가 눈부시게 발전해 정점에 도달했다고 평가했다. 중국은 2006을 <러시아의해>로 지정했으며 러시아는 2007을 <중국의해>로 지정했다. 러·중국경문제는 2008 4300km에 달하는 양국국경중 유일하게 경계선을 확정하지못했던 러시아극동지역 헤이샤쯔섬분할방법을 확정하면서 완전히 해결됐다.

경제적측면에서도 중국은 러시아의 최대교역상대로 중·러교역규모는 2020까지 3년연속 1000억달러를 넘어섰다. 중국인민대표대회보고서에 따르면 중·러교역에서 달러결제비중이 2020상반기 46%로 떨어진 반면 위안·루블결제비중은 24%로 늘어났다. 러시아가 시베리아지역의 천연가스를 중국으로 수출하기 위한 <시베리아의힘>가스관이 2019 완공돼 러시아는 연간 380억㎥의 천연가스를 30년동안 중국에 공급할 계획이다.

2021.11 푸틴은 중국과의 관계를 <사상최고수준>·<양국관계는21세기에효율적인국제협력모델로여겨지고있다>고 강조했다. 미제침략세력이 러시아를 상대로 크림반도합병·미대선개입·미기관해킹의혹·러시아반정부인사나발니독살시도·노르트스트림2가스관건설등을 두고 군사·정치적으로 압박하고있으며 중국을 상대로 신장·홍콩·티베트인권놀음, 남중국해에서의 <항행의자유>전개를 하며 제재·압력을 행사하고있는 조건에서 러·중간 전략적관계는 계속 강화될것으로 전망된다.

북과의 정치·경제적협력관계도 강화되고있다. 푸틴은 2021.9.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 73주년에 친서를 보내 <우리두국가들사이의관계는친선과호상존중의훌륭한전통에기초하고있다>·<우리두나라인민들의이익에부합되며코리아반도와동북아지역전반의안전과안정을강화하는데이바지할것>이라고 밝혔다. 김정은위원장은 러시아연방국경절을 축하하며 2021.6.12 보낸 친서에서 <나는로씨야울라지보스또크에서진행된우리들사이의첫상봉이후새로운발전단계에들어선조로친선협조관계가모든분야에걸쳐끊임없이확대강화되리라는확신을표명>한다고 전했다.

양국간의 전통적친선관계는 김일성주석이 1949.2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과 회담한것을 시작으로 9차례 공식방문을 했으며 김정일국방위원장이 3차례 방문한것으로도 확인할수 있다. 2000.2 북·러간 친선선린·협조에관한조약을 체결하고 7월 푸틴이 소련·러시아최고지도자중 처음으로 북을 방문하며 1990이후 소원해진 북·러관계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조약은 1961 조·소우호협력및상호원조조약을 발전시킨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위원장은 2001.7.26~8.18까지 23박24일에 걸쳐 특별열차를 타고 러시아를 방문했는데 하바롭스크·울란우데·노보시비르스크를 거쳐 모스크바에서 푸틴과 정상회담을 하고 상트뻬쩨르부르크까지 시찰하며 2만1000㎞의 대장정을 단행했다. 양국정상들은 모스크바선언을 통해 <정의로운새세계구조형성에이바지할것>·<국제관계에서독립과자주권,영토완정이철저히보장돼야>·<북의미사일계획이평화적성격,자주권존중하는그어느나라에도위협으로되지않는다는입장환영>·<정치·경제·군사·과학기술·문화등여러분야에서쌍무적협조발전>·<북남·러시아·유럽연결하는철도수송로창설계획실현>·<북남통일문제에외부적방해허용하지말아야>·<미군철수가코리아반도와동북아평화안전보장에서미룰수없는초미의문제로된다>등을 선언했다.

2019.4.25 북·러정상회담은 양국의 전통적친선관계를 재확인하고 전략적관계로의 발전을 보여준 회담이었다. 두정상의 단독회의에서는 호상이해·신뢰·친선·협조를 증진하고 친선관계발전을 추동하기 위한 구체적방향·조치에 대해 합의했다. 또 코리아반도정세·국제관계분야의 여러 문제에 대해 견해를 공유했다. 푸틴은 연설에서 <북미대화실현과북남관계개선을위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지도부의노력을지지한다>·<러시아는코리아반도에서의긴장을해소하고동북아시아지역전반에서의안전을강화하기위해계속호상협력해나갈용의가있다>고 표명했다. 김정은위원장이 방러1주년을 맞아 발표한 북외무성러시아담당부상담화에서는 북·러정상회담에 대해 <전략적이며전통적인조로친선관계를새로운시대적요구에부합되게승화발전시켜나갈수있는확고한토대를마련>·<조로수뇌회담에서이룩한합의들은동북아시아지역과세계의평화와안전보장을위한전략적협동을강화해나가는데뚜렷한이정표>가 됐다고 높게 평가하며 이후 여러차례 진행된 양국간의 긴밀한 협력관계에 대해 짚었다.

 

딥스척결을 위한 반딥스와의 공조

2021.3.23 수에즈운하를 지나가던 에버기븐호가 좌초됐다. 수에즈운하관리청장은 좌초원인으로 기술적결함, 사람의 실수가 개입했을 가능성을 짚었다. 에버기븐호좌초사건에 대해 일각에서는 딥스(deepstate)척결을 위해 러시아와 미국내반딥스세력이 공조해 군사행동을 한것이라고 추정했다. 단서중 하나인 에버기븐호의 컨테이너선박은 미성년자성매매혐의로 구속돼 수감중 자살한것으로 알려진 제프리엡스타인의 공범 길레인맥스웰의 남편이 해상무역운송혁신기술분야사업체를 창립하고 일했던 경력과 연결된다. 엡스타인·맥스웰은 딥스편에서 정·재계고위층인사와 친분을 맺고 반인륜적인 행각을 벌인것으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반딥스세력인 도널드트럼프전미대통령은 엡스타인의 자살을 힐러리클린턴이 사주했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반딥스측은 에버기븐호작전을 한 이유가 딥스의 해상수송관련 국제적범죄와 연관이 있어서라고 주장했다. 무기와 마약성화학물질 아드레노크롬을 수송하고 어린이납치·매매에 대한 강한 의혹을 제기한것이다. 에버기븐호좌초를 위해 러시아와 반딥스가 군사적공조를 해 어린이들을 구출했다는것이 반딥스측의 주장이다.

푸틴이 반딥스편이라는것은 여러가지 정황을 통해 드러났다. 중관영매체 글로벌타임스는 러시아가스기업 가즈프롬산하 정유회사 가즈프롬네프트가 2021.9부터 중·러항공기급유비용을 달러대신 위안화·루블화로 받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가즈프롬네프트는 중국내 34개항공에서 항공유급유사업을 하고있다. 쑹쿠이중·러지역경제연구소장은 <미국이달러를제재무기로사용할가능성이커중국과러시아는무역안전과편의성을높이기위해달러비중을낮출필요가있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중국과의 교역에서 자국화폐를 사용하면서 딥스·국제금융세력의 무기중 하나인 달러의 패권에 도전하고있다.

푸틴은 2000 집권과 함께 올리가르히(신흥재벌)와의 투쟁을 선언했다. 올리가르히는 소련붕괴전에는 반러세력의 지원하에 <자유주의운동>을 벌이고 2경제를 주도하며 소련의 부정·부패를 심화시켰으며 붕괴직후에는 보리스옐친과 함께 국제금융세력을 등에 업고 소련국영기업을 사영화하며 막대한 부를 축재해 러시아경제를 파국으로 몰아넣은 주범들이다. 옐친과 올리가르히를 비롯한 반사회주의세력은 러시아경제제도를 구조조정하는 과정에서 IMF(국제통화기금)·WB(세계은행)·미재무부를 따랐다. 특히 냉전시대종식후 워싱턴정책결정자들사이에 <체제이행중인국가>에 대해 미국식시장경제를 이식시키자는 모종의 합의인 워싱턴합의에 주목했다. 옐친의 대리인이었던 경제학자 예고르가이다르는 1992.1 옐친에게 워싱턴합의를 소개했고 옐친이 이를 받아들이며 국제금융세력은 러시아경제를 손에 쥘수 있었다. 세금이 인상되고 산업·건설에서의 정부보조금이 삭감됐으며 복지지출을 대거 깎았다. 러시아GDP는 추락하고 국영기업·공장·집단농장등은 몰락했다. 뿐만아니라 <가격자유화>를 시행한 결과 1992~94까지 월평균 20%의 인플레이션이 기록됐다. 1992 한해동안의 인플레이션은 무려 2510%에 달했다. 1991~94까지 GDP는 매년 –12%~-19%까지 하락했다. 대다수민중은 빈곤·실업·기아에 허덕였다. 1992.2 러시아부통령 알렉산드르루츠코이는 옐친의 경제정책을 <경제적집단학살>이라 맹비난했다. 이런 상황에서 옐친은 1996 악명높은 <배당을위한융자>정책을 단행해 자신에게 선거자금을 대준 올리가르히들에게 러시아의 중요한 경제적자산통제권을 나눠주는 범죄행위를 감행했다.

푸틴의 올리가르히청산투쟁은 러시아내 부정부패·범죄집단과의 투쟁이자 올리가르히의 배후인 딥스·국제금융세력과의 전쟁을 의미했다. 대표적인 올리가르히 미하일호도르코프스키는 2003 자신이 보유한 최대석유기업 유코스의 비리를 수사하며 시작된 <유코스사태>직전 지분을 제이콥로스차일드에게 넘기며 딥스·국제금융세력중 하나라는것을 드러냈다. 로스차일드는 호도르코프스키가 <주식수익자역할>을 할수 없을경우 발효되는 미공개계약을 통해 의결권을 인수하면서 사실상 유코스의 소유자가 됐다. 2003.10 대표적인 딥스세력인 조지부시미정부는 유코스사태에 대해 러시아사법체제를 비난하며 대놓고 내정간섭을 했다.

푸틴의 은행개혁도 딥스·국제금융세력과의 투쟁의 측면에서 볼수 있다. 푸틴은 2012 재집권후 사영화된 은행을 다시 국유화하고있다. 그결과 국유화된 은행이 러시아전체은행자산의 2/3를 소유하게 됐고 국제금융세력의 입지가 축소됐다. 2018.7 상위6개민간은행중 4개가 국유화됐다. 푸틴의 소련붕괴·러시아경제파탄배후인 딥스에 대항한 투쟁과 반딥스와의 공조는 계속되고있다.

 

중동에서의 반제전선강화

러시아와 이란·시리아와의 전략적관계는 2015.9 시리아내전에 러시아가 개입하는 과정을 통해 더욱 두드러졌다. 2011.3 시작된 시리아내전은 바샤르알아사드반미정권과 반군과의 전쟁이다. 시리아반군의 배후에는 미CIA가 있다. 일례로 FSA(자유시리아군)는 미국이 직접 양성·지휘한 반정부군이다. 2013 거의 괴멸상태에 이르렀던 FSA의 군사지도자 압둘일라알바시르는 2014 미 매클래치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미CIA에 FSA의 지휘권이 있으며 FSA의 군사지도부가 미국인이라고 실토했다. 2013.12부터 FSA의 군사물자지원은 시리아북부 14개사령부와 남부의 60개조직망에 직접 전달됐으며 FSA반군들은 CIA에 직접 보고하고있다고 밝혔다. 이같은 사실은 친미국가인 터키가 미국한테 지원받은 무기류를 시리아반군에 양도한것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미CIA가 딥스에 의해 장악돼있는 정보기관이며 시리아반정부세력중 하나인 ISIS가 오바마정권하에 조직적으로 키워진 테러조직이라는 사실은 러시아·이란의 시리아내전개입은 국제반제반딥스투쟁의 일환이라는것을 보여준다.

러시아는 2016 투폴레프장거리전략폭격기·수호이공습전투기를 동원해 이란 북서부 샤히드노제공군기지를 폭격했다. 이란이 1979이래 자국영토를 이용해 외국군인이 작전을 수행하도록 허용한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이는 러시아·이란간의 군사적공조를 보여준다.

러시아·이란간의 우호적관계는 1990년대 러시아의 상황과 연결해 확인할수 있다. 러시아가 국내외적으로 불안정하고 위상이 추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란은 터키와는 달리 러시아에 적극적으로 침투하지않았다. 1999 이란은 체첸전쟁때 분리주의자들의 지원을 거부했고 OIC(이슬람회의기구)의장국으로서 친러결의안을 채택하면서 긴장을 완화시키는데 앞장섰다. 러시아입장에서 이란은 지정학적으로도 중요한 국가다. 서방의 대러제재가 계속되며 대립이 장기화되는 조건에서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제외하고 가장 인접한 중동과의 관계개선이 필수적이다. 중동의 핵심국가이자 반제전선이 뚜렷한 이란과의 전략적관계는 러시아의 대외정책에서 중요할수밖에 없다.

러시아는 이란의 부셰르원전사업을 1995 인수해 추진하며 핵에너지분야에서 협력했으며 2000에는 대이란무기수출재개를 선언하며 군사·경제적측면에서 관계가 공고해졌다. 1992~2013까지 이란은 총 34억6000만달러의 러시아산무기를 구매했다. 2010 푸틴은 대이란S-300미사일수출금지조치를 해제하며 2016.10 이무기체계의 인도를 진행완료했다. 2016.1 러·이양국은 훈련·반테러전에 관한 군사협력협정을 체결한 후 러시아는 시리아내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러시아의 시리아내전개입은 러시아·시리아간의 전통적우호관계를 바탕에 두고있다. 시리아 1971 하피즈알-아사드집권이후 러시아와의 우호관계는 단절없이 지속됐다. 하피즈정권은 비동맹노선을 추구하며 범아랍민족주의를 내세우며 소련과 우호관계를 형성했다. 소련은 1970 이집트 나세르대통령이 사망한 후 집권한 사다트대통령이 친미노선으로 전환하자 중동과의 관계에서 시리아는 더욱 중요한 핵심지역이 됐다. 더해 소련이 부동항을 얻는것은 군사전략상 매우 중요한데 1971 시리아와 협정을 체결하며 동지중해 타르투스항을 소련기항함정의 물품공급, 유지·보수를 위한 해군시설로 임차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시리아관계가 더욱 가까워진 시기는 러시아가 에너지자원을 국유화하고 서방세력과의 관계악화가 장기화되는 2000년대중반부터다. 시리아는 2008 러시아·그루지야전쟁에서 러시아를 지지하며 우호관계를 과시하기도 했다. 러시아는 시리아내전이 발발하자 4년간 정부군에 무기·군사장비·기술지원을 하며 간접적으로 개입했으나 2015.9 전략적요충지인 알레포에서 시리아정부군이 패퇴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됐다.

2017 시리아는 러시아에 타르투스항을 49년간 임대하기로 결정했고 2019에는 경제적용도로도 49년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러시아와 주변지역의 관계는 국제적반제반딥스전선에 대한 러시아집권세력의 확고한 입장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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