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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통일국제포럼①] 외세 극복하고 통일로 나아가야 … 베트남전쟁과 코리아전쟁

6.14화 전쟁과 분단의 근원


1000-1300 베트남전쟁과 코리아전쟁


발표자 : 응우옌 닥 누마이, 데랙 포드, 램지 클라크(영상) 


토론자 : 모히스 쿠기에흐만, 제하흐 알리, 크리썽티 테하폰토스, 양고은, 방진호


사회자 : 이병창



항구적 평화체제와 통일경로를 모색하는 평화와통일을위한국제포럼이 6월14일 개막했다. 조직위원장인 송무호 경기민주행동상임대표는 <코리아반도와 주변을 둘러싼 전쟁위기 적대적 관계가 날로 심화되고 있다. 상당히 위중한 상황이다. 모두가 공감하고 있듯이 지금의 최대과제는 평화라고 할 수 있겠다. 분단을 없애고 통일을 이루는 것이 아주 시급한 상황이다. 분단극복과 통일 없이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아주 중요한 과제 자주독립과 민주주의 그리고 민중해방, 인간해방의 과제도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발제자와 지정토론자 방청객 토론자들이 함께 의견을 내고 뜻을 모으고 방안을 찾아내는 것이 이번 포럼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4일오전에는 전쟁과 분단의 근원을 주제로 베트남전쟁과 코리아전쟁에 대해 논했다. 먼저 전미국법무장관 램지 클라크의 영상발언이 있었다. 램지 클라크는 <2차세계대전이 끝날 때 17살이었다.>며 당시 동료가 코리아전에서 죽은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외국인으로서 코리아인들이 바라는 통일이 간절히 보고싶다. 전쟁은 지옥이며 언제나 잘못된 것이다. 내전은 그중에서 가장 잔인한 것이다. 그것은 형에게 맞서는 아우이고, 아들과 싸우는 아버지이기 때문이다.>라며 <코리아는 사랑과 번영속에서 하나된 민족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회를 맡은 이병창교수는 <평화와 통일. 말만 들어도 가슴이 울렁거린다. 가장 아름다운 말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발표할 분들은 우리와 비슷한 곳에서 온 분들이 있다. 베트남은 우리와 운명적으로 얽혀있다.>며 토론을 시작했다.  


주발표자로 나선 베트남출신의 역사학자 응우옌 닥 누마이는 발표전에 <우리와 함께 하지 못하는 분들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신념을 위해서 그리고 정의를 위해서 투쟁하고 있는 분들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며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투쟁하다 수감돼 목숨을 걸고 20일째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는 김혜영양심수를 비롯한 코리아연대활동가들에게 연대의사를 밝혔다. 




<외세의 개입 이겨내고 자주적 국가 만들어야>




응우옌 닥 누마이는 베트남전쟁과 코리아전쟁의 공통점을 말하면서 <외세의 개입을 이겨내고 자주적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베트남전쟁은 해방전쟁이고 코리아전쟁은 통일을 위한 전쟁이었다. 냉전의 맥락속에서 모든 것이 일어났다. 주변강대국이 다 개입하고 거기서 각자역할을 분담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코리아뿐만 아니라 베트남에서도 외세의 간섭에 대항해 싸웠다는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베트남은 식민지전쟁을 두번 겪었다. 프랑스인과의 전쟁이 있었고 미국과도 싸웠다. 전쟁을 겪으면서 우리가 코리아와 공통점으로 느끼는 것은 바로 민중이 국가와 민족의 모든 것을 자주적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고 강조했다. 또 <베트남에는 고엽제 다이옥신 피해자들이 있다. 이것이 미국과 베트남의 관계에서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전했다.




계속해서 <코리아전쟁과 관련해 내가 기억하기로는 얄타회담에서 이미 많은 부분이 결정됐다. 그리고 1950년부터 1953까지 코리아반도에서 상당히 많은 사건이 일어났다. 분명한 것은 7.27정전협정은 어쨌든 이땅에 평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물론 정전협정에 싸인이 되어서 전쟁이 멈추긴 하지만 남코리아와 북코리아간의 교류가 있는 것은 아니고 지금 계속 위험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끝으로 <남코리아와 북코리아가 증오를 가라앉히고 자주적 국가를 만들기 위해 함께 길을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조언하며 <그것은 코리아반도의 주인인 코리아민중이 결정해야 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기꺼이 연대하겠다. 베트남이 승리했듯이 코리아도 외세로부터 승리할 것이라고 본다.>고 전했다.




<일본 식민지 무너졌지만 미국은 독립군 인정하지 않아>




토론자로 나선 제하흐 알리 프랑스평화단체 라뻬(La Paix)집행위원은 베트남전쟁과 코리아전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 설명했다. 알리는 <베트남과 코리아는 식민지를 겪었던 점에서 유사한 점이 있다. 그리고 두국가는 2차대전에 휘말린 경험이 있고 일본이 극동지역을 지배했던 역사와 관계가 있다.>며 토론을 이어나갔다. 




알리는 <독일과 일본이 1945년에 패전하면서 두국가의 식민지해방운동이 독립선언으로 이어지게 됐다. 그리고 베트남에서도 마찬가지로 강력한 해방운동이 있었고 당시 일본의 패전으로 인해 프랑스들이 다시 점령을 하지 못한 시기였기 때문에 독립을 선포하기 좋은 시기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휴전협정은 암묵적인 협정이다. 미국과 소련간의 싸움이 있었고 미국으로 하여금 38선까지 나올 수 있도록 소련과의 암묵적 합의가 이루어졌던 것이다.>고 지적했다. 




이어 2차대전이후 베트남과 코리아의 독립이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다고 분석했다. 그는 <프랑스는 공화국형태로서의 베트남독립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아 베트남의 황제에게 왕위를 다시 돌려주게 된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프랑스와 베트남이 독립을 두고 싸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도차이나전쟁이다.>고 설명했다. 한편 <코리아의 경우는 약간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식민지는 무너졌지만 미국이 독립군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에 코리아임시정부가 있었기 때문에 임시정부와 함께 세력을 구축하게 됐는데 이것이 이승만정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본도 남코리아의 독립운동을 인정하지 않았고 일본의 경찰권력들도 남코리아에서 상당기간동안 머무르고 있으면서 세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부분이 본질적 차이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미국이 소련이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것에 굉장히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고 분석했다.




끝으로 알리는 <코리아민중들이 지역적 차원만이 아니라 세계적 차원에서 평화와 공존을 위한 길에 기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외세개입에서 벗어나 같은 민족끼리 맞서는 상황을 그만두고 통일된 하나의 미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토론을 마쳤다. 




<베트남전쟁과 코리아전쟁은 미국의 사회경제적 체제유지 목적>




이어 발표자로 나선 데렉 포드 전쟁반대와인종차별반대를위한즉각행동연합(ANSWER Coalition)대변인은 정치적 탄압에 의해 포럼에 참가하지 못한 활동가들을 언급하며 특히 김혜영양심수는 미국에서도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데렉 포드는 <베트남전쟁과 코리아전쟁은 모두 미국의 대외정책과 반전영향, 평화를 위한 국제연대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고 말한 뒤 두전쟁이 미국내에서의 반전운동에 끼친 영향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베트남전쟁과 코리아전쟁의 공통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공통점은 냉전이라는 것이다. 냉전은 차가운 전쟁이 아닌 열전이고 많은 사상자를 낸 전쟁이었다. 이것은 국가간의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사회적, 체제적 전쟁이다. 물론 미국엘리트는 그렇게 보지 않지만 진실은 이것이다. 두전쟁은 기본적으로 사회경제적 체제를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2차세계대전이후 미국은 세계최강의 제국주의 국가였다. 이전에는 일종의 약한 제국주의국가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또 2차세계대전이후 미국이 적국이자 패전국인 일본과 독일에 강한 불이익을 주는 대신 또다른 제국주의전쟁을 위해 이들 국가를 활용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예를 들어 나치인사들은 서독에서 중요직위를 맡았다.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현재 남코리아대통령 역시 미국의 전후처리의 유산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베트남전 당시 미국내의 강력한 반발> 




이어 <베트남전의 경우 미국에서 부정적으로 기억되고 있다.>며 <가장 좋게 말할 때 실패였고 실수였다는 것이지 진실을 말하자면 미국의 제국주의전쟁이었다고 기억된다. 베트남전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내에서는 강력한 반발이 있었다. 대학가와 거리가 불탔다. 계속 시위가 일어났고 경찰과의 충돌도 있었다. 미국에서 경찰은 민간인들에게 총을 쏘고 실제 살해를 하기 때문에 경찰과 충돌한다는 것은 격렬한 충돌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반전운동은 1970년대를 관통하면서 지속됐다.>고 말했다. 




포드는 대학가와 모병센터를 비롯해 주요도시에서 일어난 반전운동이 미국의 대외정책에 상당한 압박을 가하고 전쟁을 종결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지만 베트남전이 종료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고 봤다.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패배했으며 베트남전을 승리로 이끈 것은 베트남에서 싸운 군대였기 때문이다. 




<2차대전이후 미국의 새로운 적, 공산주의와 민족해방운동>  




포드는 <2차대전이후 미국에게는 새로운 적이 생겼는데 이것이 바로 공산주의와 식민지민족해방운동>이라고 밝혔다. 그는 <1945년이후 미국에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탄압, 진보주의자에 대한 탄압이 있었다. 미국 공산당지도부는 모두 구속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10년이상 일자리도 구하지 못했다. 1950년 8월에는 당시 트루먼이 코리아전 참전을 결정한 시기였다.>고 전했다.




이어 <이때 핵기술에 대한 비밀정보를 소련에 흘려 미국과 비슷한 핵을 소련이 만들도록 도와줬다는 스파이혐의로 두사람이 체포돼 1951년 사형이 집행됐다.>고 말하고 <물론 당시에도 반전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공산주의운동이 이뤄지기 힘들었고 코리아전 반전운동이 힘을 얻기 힘들었다. 이런 상황이 남코리아의 국가보안법으로 인한 탄압상황과 비슷하다고 본다.>고 분석했다. 




<미군의 목적은 지정학적 위치 차지> 




그러면서 <미국내 코리아전이 큰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다. 실제 트루먼이 물러날 때 지지율이 낮았다. 많은 사람들이 참전이 정당했다고 보지는 않았다. 이후 미국대외정책을 주도하는 세력에게는 코리아반도가 분단된 상태여야 한다는 합의가 존재했다. 이 반도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에 수만명의 미군을 주둔시키기 위해서는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군의 목적은 북에 대한 억지라기보다는 이 지정학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 자체였다.>고 설명했다. 계속해서 <이 연장선에 있는 것이 오바마의 아시아재균형정책이다. 2020년까지 미해군의 60%가 아시아에 주둔할 것이라고 호주에서 말했다. 최근 논란이 되는 사드배치 역시 마찬가지다. 사드의 목적은 단순히 북이 아니라 중국이다. 공개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남북수뇌회담과 반전운동 중요> 




그는 <미국에서 베트남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하면 대부분 비극, 실수, 범죄라는 답을 하는데 코리아전은 미국에서 소위 잊혀진 전쟁이라고 불려 안타깝다. 이름 자체가 잊어버리고 싶어 붙인 것이다. 그래서 코리아전의 문제에 대한 인식자체가 굉장히 낮은 상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앤서는 반전운동단체로 대중의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몇달간 코리아연대과 함께 연대활동을 했다. 주남코리아대사관 앞에서 항의시위도 했고 매년 광복절에도 시위를 한다. 2013년 7월27일에는 정전협정60년을 맞아 행동을 했다. 당시 미국정부가 정전협정을 축하하는 행사를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우리가 뛰어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주목할 수 있도록 했다.>며 앤서콜리션(ANSWER Coalition)의 활동을 소개했다. 




이어 <우리가 주장한 것이 북미평화협정체결, 미군주둔중단이었다. 코리아반도의 상황은 워싱턴에서 결정되고 있기 때문에 미국에서 활동하는 우리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본다. 또한 올해는 6.15수뇌회담 16주년이다. 수뇌회담은 획기적 사건이었다. 통일과 대화에 대한 열망은 계속 존재했지만 수면위로 불러내고 더욱 움직임을 강화하기 위한 공간을 마련한 계기였다고 본다.>며 반전운동과 코리아에서의 수뇌회담의 의의를 강조했다.  




앤서, 북미관계정상화와 북미평화협정체결 요구 




한편 포드는 <1990년대에 미국은 가만히 기다리면 북이 붕괴할 것이라고 봤고 남이 북까지 흡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제국주의 국가가 과거 소련에 소속된 지역이나 위성국가들을 1990~1991년에 흡수한 것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날 것이라고 봤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북코리아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1990년대 초반이 지나간 후 클린턴 행정부는 관여정책으로 방향을 바꿨고 1994년 제네바협정이 체결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앤서콜리션의 활동이 미국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며 미국정부가 북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도록 압박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역사를 새롭게 쓰고자 한다. 역사는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형성되는 것이다. 코리아의 해방과 평화를 위한 운동에 도움을 주길 바라고 미국에서도 그런 활동을 계속하겠다.>며 적극적인 연대의지를 재차 표명했다. 




포드의 이같은 분석과 연대발언은 청중에게 큰 박수를 받았다. 이병창사회자는 <말로만 듣던 응답하다 팀을 직접 보게 됐다. 데릭은 베트남전과 코리아전에 대한 미국의 태도의 차이점에 대해 말해줬다. 미국의 정책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지금 응답하라팀이 미국정책을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다.>고 밝혔다.




이어 토론한 모히스 쿠기에흐만도 본격적인 토론에 앞서 구속된 활동가들과 단식투쟁을 하는 활동가, 탄압받는 노동자에 대한 연대의사를 표명하고 이는 코리아만의 투쟁이 아니라 세계공동의 투쟁이라고 강조했다. 




<미국의 목표는 일본의 식민지를 미국이 대신 지배하는 것> 




그는 <미국의 궁극적 목표는 일본의 식민지를 미국이 대신 지배하는 것이었다.>며 <미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전복되기를 원치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미국은 사회주의세력이 코리아반도에서 세력을 잡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코리아독립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필리핀의 독립, 인도네시아의 독립, 베트남의 독립을 수용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이들의 목적은 민족의 해방이 아니라 제국주의자들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 궁극적 목표였다. 이것이 실체적 문제의 본질>이라고 규정했다. 




또한 <베트남전쟁과 코리아전쟁은 미국이 재정을 지원한 점에서 같지만 그 성격이 다르다.>고 분석했다. 그는 <프랑스가 1945~1954년 베트남전쟁을 일으켰다. 어떻게 일으켰을까? 미국이 재정지원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미국은 같은 정책을 코리아에도 적용했다. 제국주의가 뻗어나갈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미국의 궁극적 목표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냉전의 맥락에 있는 것이다. 냉전은 실체다.>고 강조했다. 




<코리아전은 미국과 사회주의체제와의 전쟁>




그는 베트남전쟁이 민족해방운동, 민족해방전쟁의 성격을 가지고 있고 코리아전쟁은 미국과 사회주의체제와의 전쟁인 점에서 그 성격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어 <데렉 포드가 말했듯 미국은 동북아에서 지정학적, 경제적 중요성 때문에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점이 있는데 북에서는 사회주의체제가 마련됐다. 즉각적으로 전쟁이 이 2체제간의 전쟁이라는 성격을 가지게 된다. 이 전쟁은 공산주의위협에 대해 미국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국제정세로 볼 때 상당히 위험한 전쟁으로 인식된다.>고 말했다. 




또 코리아전쟁 당시 미국이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 분개하면서 <그 행위에 대해 기소는 물론 용서를 비는 행위도 없었다.>고 개탄했다. 그는 <코리아전쟁은 전쟁이라는 범죄성격을 가지고 있다. 민간인학살이 있었고 북에서는 생화학무기를 사용했다. 그 강도로 볼때는 사실 2차대전에서 있던 독일에 대한 폭격보다 더한 강도의 폭격이 있었고 상당히 잔인한 범죄가 저질러졌다. 북에 대해서 상당히 큰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고 말했다. 




<코리아전쟁에서 미국은 패배>




쿠기에흐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리아전쟁에서 미국이 패배했다고 밝혔다. 그는 <판문점에 갔는데 누군가가 흥미로운 말을 해줬다. 협상테이블에서 보면 유엔의 국기가 있다. 유엔 감독하에 미국에서 전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저희들이 평화협정에 서명을 할때 정전협정이든 사실은 두개대표단은 자기국기를 가지고 돌아간다. 협상테이블에 내려놓지 않지만 이때 판문점에서 서명한 미제독은 너무 화가나 <나보고 이 미국의 첫번째 패배의 합의서에 서명하라고 하다니>라고 분노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역사적으로 베트남전쟁과 코리아전쟁에 대해 <두전쟁이 민중해방에 있어 20세기에서 상당히 중요한 사건이고 이 전쟁을 통해 미제에 대항하는 것이 하나의 시스템이 됐다. 단순히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 싸움에서 승리자도 있었지만 민중희생이 상당히 컸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고 현재 힘의 관계가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코리아가 궁극적으로 해방돼 진정 민중이 원하는 사회체계를 만드는 자주권을 가지기를 기원했다. 




<전쟁 아닌 평화적 통일 지향해야>




이어 토론자로 나선 방진호 문화활동가는 베트남전쟁과 코리아전쟁의 역사적 배경에 근거해 그 성격을 비교했다. 방진호활동가는 <베트남전쟁과 코리아전쟁, 두전쟁은 사실상 베트남과 코리아에서 미국이 일으킨 전쟁으로 이 역사 깊숙이 미제국주의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물론 차이점도 명확한데 베트남은 1973년 미군이 철수하고 전쟁을 통해 통일했고, 코리아는 1953년 정전협정이후 아직까지 휴전상태이며 하나의 코리아를 위해 계속해서 투쟁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베트남의 경우 <북과 남이 자체의 힘으로 얼마든지 통일을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을 외세의 개입으로 인해 대리정권이 세워지고 참혹한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고 말하고 <남코리아의 경우 일본의 식민지였으며 해방이후 바로 미군정이 들어섰다. 베트남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개입으로 인해 수많은 민중들이 고통을 겪었고 조국의 분단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며 외세개입을 배척하고 자주적 통일을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덧붙여 <베트남전쟁으로 민중들은 수없이 많은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미군은 베트남전쟁 당시 네이팜탄 등을 포함한 엄청난 양의 포탄을 베트남전역에 쏟아부었으며 살포한 고엽제의 양은 자그마치 2000만갤런으로에 달했다. 480만명의 베트남민중들이 고엽제에 노출되었고 이는 후세대까지 이어져 장애문제 등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최근 주남미군의 탄저균·페스트균·보툴리눔반입을 언급하며 <코리아전에서도 세균무기를 사용한 바 있는 미국이 주남미군기지에서 생화학실험을 한다는 것은 결국 남코리아민중들을 세균전의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끝으로 <베트남민중들의 거센 저항과 미국내의 반전여론은 외세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이 전쟁으로 인한 민중들의 고통은 불가피했다. 전쟁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 좋고 피할 수 없다면 전쟁의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손자병법의 말이 있다. 전쟁은 결국 민중들의 피로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코리아에서의 통일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뤄야 할 것이다.>고 정리했다. 




<전쟁은 천연자원을 착취하고 약탈하기 위한 것>




키프러스출신의 진보활동가 크리썽티 테하폰테스는 <자신의 조국인 키프러스 역시 코리아와 마찬가지로 분단돼있어 코리아민중들이 바라는 평화와 통일에 대한 염원이 자신의 일 같다.>고 말했다. 테하폰토스는 <전쟁탄압에 대항하고 평화와 통일의 단어라는 단어를 들으면 내 심장이 뛰는 것을 느낀다.>고 전했다. 




이어 <전쟁이라는 것이 사실은 그 땅에 있는 천연자원을 착취하고 약탈하기 위한 것이었고 새로운 것들을 찾아나서기 위한 것이었다. 자국에서의 자원이 바닥난다고 생각하면 전쟁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 역사다. 1차대전부터 영국과 프랑스 등 많은 제국주의 국가들은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찾아나섰다. 동맹국이 되기도 하고 적국이 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분단국가에 살고 있으면 전쟁은 우리의 일상속에 있다. 외국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경찰의 강압적 조치가 있을 수 있다. 우리 동지가 구속된 것을 보라. 이런 식의 탄압이 있다. 다섯번째 남코리아방문인데 올때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구속되는 것을 본다. 통일을 위해, 다른 시스템을 위해 싸울 때 탄압을 받는다.>며 키프러스 역시 평화통일활동가들에 대한 탄압이 심하다고 밝혔다. 




그는 <사안에 대한 이해와 투쟁대상을 명확히 해야 할 필요성을 제시하고 연대의 힘이 실체를 분명하게 인식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며 <만나서 같이 이야기 나누고 공유하면서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우리손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높여야 한다. 우리가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앞으로 나아간다는 명언이 있다. 하지만 만나지 않고 이야기하지 않고 공유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변화와 평화, 새로운 앞날을 위해 나아갈 수 없다.>고 강조했다. 




<1973년 파리평화조약 주목>




자주통일민주주의코리아연대 양고은공동대표는 김혜영양심수석방을 위한 노숙단식농성을 마치던 날 포럼토론자로 참석해 청중들로부터 격려를 받았다. 양고은공동대표는 <코리아의 통일은 전쟁방식이 아니라 평화적 방식으로 진행돼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외국군의 개입과 주둔이 없어야 한다.>고 말하며 베트남평화협정과 코리아정전협정의 특징을 분석했다. 




양고은대표는 <파리평화조약을 주목하고 있다. 1973년 1월말 파리에서 북베트남, 남베트남, 미국사이에 조인된 약속조약이다. 당시 모든 참가국은 1954년 제네바협정에 의해 승인된 베트남의 중립, 주권, 통일성, 영토를 존중한다고 했다. 닉슨대통령이 종전을 선언했고 미국은 3월말에 남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파리평화조약 이후 미군이 철수했고 2년만에 남베트남이 붕괴됐고 그뒤 1년만에 베트남이 통일됐다.>고 말했다. 




이어 <코리아의 경우 1953년 7월27일에 연합군 총사령관, 중국군, 조선인민최고사령관이 협정했다. 협정60항에 외국군철수조항이 있으나 1953년 미남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면서 지금까지 전시작전지휘권이 주남미군사령관이 가지고 있고 남코리아는 사실상 군사적으로 점령되어 있다.>고 말했다. 




<평화적 방법의 통일방안 절실>




양대표는 <평화적 방법의 통일방안이 절실한데 서로의 체제를 존중하는 연방제방식을 주목하고 있다. 동북아평화체제 수립이 필요한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고 특히 누마이에게는 파리평화조약에 대해, 데렉으로부터 북미평화조약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다.>고 물었다. 




응우옌 닥 누마이는 <파리에서 열린 베트남평화조약이 체결됐던 배경에는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전세계 시민들의 지지가 있었고 특히 미국내 반전평화운동가와 프랑스국민들의 도움이 컸다.>고 밝혔다. 그리고 <앞으로 세상을 만들어갈 주인인 젊은 세대가 평화에 대해 특히 관심을 가져야 하며 자원에 대해 연구할 필요성이 있으며 미국, 중국, 러시아, 유럽연합 등 외세는 지금도 계속 계산하고 있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데렉 포드는 미국이 언론을 이용한 북코리아 악마화와 날조를 거두고 사람으로 보는 관점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무지를 거두고 사람으로 볼 때 관계가 개선되고 평화협정체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쟁과 분단의 근원-베트남전쟁과 코리아전쟁>을 주제로 진행된 첫토론은 3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참가자들의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베트남의 사례는 코리아의 평화와 통일에 많은 교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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