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을 뜨거운 시절이라고 한다. 열정과 자유가 녹아있는 계절이다. 옛소련의 젊은 로커들은 잔소리하는 어른들에 대한 반항, 짜여진 틀로부터의 저항을 자신의 음악적 정체성으로 삼았다. 반항과 저항으로 일관된 그들의 삶은 영화에서 소련체제에 대한 반대로 그려진다. 뜨겁게 역동하는 청춘에게 레닌그라드가 차갑고 경직된 공간이어서 하루가 멀다 하고 파티를 벌이지만 파티의 끝에는 공허함만 남는다. 숙취와 두통으로 대변되는 답답한 삶과 억눌린 저항의식을 이기지 못한 청춘은 옷을 벗어던지고 바다에 뛰어들어 잠기고 나서야 자유를 만끽한다. 그런식으로 영화는 시종일관 반라의 청춘이 자연속에서 음악과 자유를 즐기는 뜨거운 여름을 주창한다. 

그런데 그들이 모르는 게 있다. 반항과 저항은 목적이 아니다. 소련경찰로부터 얻어맞아 피를 흘리며 도망치는 모든 과정이 맞았다는 부분조차 일어난 적 없는 일이고, 통제된 록공연장에서 모두가 박차고 일어나 무질서한 공연을 즐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쫑난 파티장에서 스크린을 넘어 바다로 뛰어들어가 자유에 온몸을 던진 일 또한 관념적인 상상에 그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소련은 그들 사이에서 록과 함께 자라난 저항의식에 의해 망한 게 아니라 관료주의로 인한 침체와 수정주의로 인한 변질로 그리 됐다. 마치 어긋난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에 의해서 사회주의소련의 병폐가 드러난 것 같지만 사실은 소련의 한편에 맹목적인 반항이 있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적 열정과 오해와 방황으로 가득찬 당시 소련의 청년로커들의 뜨거운 계절은 자본주의로커들의 자유주의, 쾌락주의와는 달랐다. 마크와 빅토르 사이의 선후배로서 가르쳐주고 배우고자 하는 순수한 의사소통, 신선한 인물에게 향하는 마음에 흔들리면서도 선을 지키는 부부간의 신의, 상대에 대한 소유와 집착이 아니라 상대방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남녀관계는 모두 사회주의소련의 공동체적 문화이다. 그것이 빅토르를 끝내 인기 있는 가수로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마크는 빅토르와 나타샤 사이에서 괴로움을 겪지만 빅토르와의 갈등이나 나타샤와의 이혼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사회주의적인 소결론을 얻었다. 같은 장르의 다른 록영화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사회주의는 동토(凍土)가 아니다. 소련의 교조주의적 침체와 수정주의적 변질로 사회주의의 경직과 후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지금 세계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시궁창이나 다름없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진정한 의미의 동토를 벗어나고자 하는 전세계 민심은 사회주의의 일시적 후퇴를 지나가는 겨울로 여긴다. 따라서 소련의 한편에 있었던 체제에 대한 반대를 여름이라고 할 수 없다. 영화는 그것을 뜨겁고 찬란한 반사회주의의 태동인 마냥 그려놓았지만 이로써 록음악의 본질이 드러났다. 록은 자본주의만이 아니라 사회주의도 비판했다. 자본주의를 비판한다는 록음악은 청춘에게 자유주의, 쾌락주의를 전파하며 결국 자본주의문화의 시궁창에 빠뜨렸다. 록음악이 옹호한 그 자본주의가 세계를 어떻게 얼렸는가 되돌아보라. 진짜 <레토(여름)>는 자연 속의 <순수한> 로커들, 맹목적인 청춘이 아니라 목적의식적인 청년들의 손에 의해 돌아온다.

깐느국제영화제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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