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민주당대변인실 <견찰> 백서발표

25일 민중민주당(민중당) 대변인실이 <견찰>백서를 발표했다.

민중민주당은 <<민중의 지팡이>를 자처한 경찰은 일제강점기부터 <민중 잡는 몽둥이>가 돼 민중들을 탄압해왔고 이는 <백만촛불>로 탄생한 문재인정권에서도 계속되고있다. 청와대를 관할하고있는 종로경찰서는 경비와 대통령의전 등을 맡으며 직·간접적으로 청와대와 긴밀히 교류하고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권력의 도구가 돼 민중탄압의 앞장에 선 경찰의 본질이 친일친미친파쇼친극우임을 폭로하며 뿌리깊은 경찰악폐를 청산하지 않는 한 진정한 경찰개혁은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이 <견찰>백서를 발간한다>고 밝혔다.

다음은 전문이다.

<견찰>백서

친일친미친파쇼친극우경찰백서

경찰의 역사는 곧 친일친미와 친파쇼친극우의 역사다. 일제치하 일제침략세력에 부역하며 항일세력을 탄압한 친일주구경찰은 해방후 미군정이 들어서자 일제히 미제침략세력의 주구로 변신해 애국·민주세력을 야수적으로 고문·학살했다. 역대 민족반역권력들은 정보경찰을 앞세워 통일민주세력과 애국민중들을 감시하고 체포하며 고문했다. 문재인정권은 경찰개혁을 앞두고 정보경찰해체여론이 높음에도 그에 역행하며 경찰권력을 강화하는 <경찰개악>의 우를 범하고있다.

이승만반역권력에게 친일친미주구·육군방첩대장 김창룡이 있다면 문재인권력에게는 친미친극우·경찰청장 김창룡이 있는가. 이 둘은 비록 군인과 경찰이라는 신분은 다르지만 <정보>를 매개로 애국세력·민중을 탄압하고 권력에 부역하며 민족반역행위를 저질렀다는데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전자의 김창룡은 여순항쟁에 나선 민중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하고 군부내 <숙군작업>을 도맡아 애국세력색출·학살에 앞장섰으며 방첩대장이 되자마자 결국 김구마저 암살했다. 후자의 김창룡은 취임한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친일친미극우세력을 비호·방조하고 그들의 난동을 부추겨 민중민주세력의 합법적인 정치활동을 교활하게 훼방하고있으며 불법채증·온라인사찰·정보수집에 몰두하고있다. 정보경찰을 비롯한 친일친미친파쇼친극우경찰의 불법·망동은 예나 지금이나 본질에서 달라지지 않았으며 그 수법은 더욱 간교하고 악질적으로 변했다. 민중들이 경찰을 개견(犬)자를 써 <견찰>이라고 힐난하는 이유다.

2020.9.13 합법적인 정당연설회를 진행하는 민중민주당(민중당)당원들에게 극우남성2명이 욕설·폭언을 퍼붓고 연설자를 폭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112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극우들의 일방적인 거짓진술만 듣고 피해자인 당원들을 오히려 폭행현행범으로 강제연행했다.

지난 4.7 민중민주당의 평화시위장소에 극우무리가 나타나 당원들을 무단촬영하고 수십명이 여성시위자를 협박했다. 4.8 민중민주당 박소현총선후보의 선거유세현장에 난입한 극우무리가 소리를 지르며 노골적으로 선거운동을 방해했다. 경찰은 이들의 집단적인 불법망동을 비호·방조했다. 오히려 <형평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거짓명분으로 우롱하며 당원을 강제로 이격시키고 범칙금을 끊었다. 경찰의 비호하에 극우무리는 아직도 광화문삼봉로에 상주하면서 시민들을 무단촬영하고 불법적치물로 통행을 방해하는 불법망동을 계속하고있다.

6.20 극우무리가 소녀상뒤편에 기습적으로 욱일기를 설치했다. 1635일째 소녀상앞을 지키는 반일행동(반아베반일청년학생공동행동) 학생들이 욱일기를 떼려하자 경찰은 학생들을 폭력적으로 저지했다. 경찰은 학생들의 양팔을 구속하고 급기야 목을 조르는 등 친일친극우본색을 드러냈고 시민들은 자국민보다 욱일기를 보호하는 경찰의 망동에 분노했다. 7.7 극우유튜버가 소녀상지킴이 여학생을 근접촬영하고 희롱하며 성추행했으나 종로경찰서는 20여분간 시간을 끈 뒤 현행범이 아니라며 어떤 처벌도 하지 않았다. 친일친미친극우 경찰의 만행은 결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2014년 경찰은 세월호참사가 일어난 직후 정보경찰 801명을 투입해 유가족들을 미행했고 2015년 종로경찰서경비과장 이규환은 세월호추모집회에서 행진하는 참석자들에게 <불법집회에 참가한 시민>, <사랑하는 가족품으로 돌아오라>며 유가족들을 조롱했다.

2016년 민중총궐기에 참여한 백남기농민은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끝내 사망했다. 경찰은 불과 10m거리에 있던 백남기농민을 집요하게 조준사격했고 쓰러진 후에도 20초동안 살수를 멈추지 않았다. 경찰의 불법적인 살수차운용을 비롯한 공권력남용에도 강신명경찰청장은 <사람이 죽었다고 무조건 사과하는 건 적절치 않다>고 망언했다.

<민중의 지팡이>를 자처한 경찰은 일제강점기부터 <민중 잡는 몽둥이>가 돼 민중들을 탄압해왔고 이는 <백만촛불>로 탄생한 문재인정권에서도 계속되고있다. 청와대를 관할하고있는 종로경찰서는 경비와 대통령의전 등을 맡으며 직·간접적으로 청와대와 긴밀히 교류하고있다. 예나 지금이나 종로서는 민중탄압의 최선봉에 있다.

민중민주당대변인실은 권력의 도구가 돼 민중탄압의 앞장에 선 경찰의 본질이 친일친미친파쇼친극우임을 폭로하며 뿌리깊은 경찰악폐를 청산하지 않는 한 진정한 경찰개혁은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이 <견찰>백서를 발간한다.

 

항일독립투사들의 <무덤>이라 불린 악질종로서

경찰은 친일에 뿌리를 두고있다. 2009년 서울경찰청이 개방한 홍보관에 일제강점기시절의 경찰제복사진이 전시된 것은 이를 입증한다.(조선일보, 2009.6.16)

친일경찰들은 민중들의 일상을 감시·탄압했을 뿐만 아니라 징용·징병을 강요해 사지로 내몰았다. 구체적으로 일제침략세력과 친일경찰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치안유지법을 실시했다. 또 사상탄압을 전문으로 하는 고등계경찰과 사상검사를 배치하고 중앙정보위원회를 설치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등계경찰은 종로경찰서 순사부장출신인 유승운이 조선총독부에 건의해 만들어졌다.(문화재TV, 2020.6.23) 고등계형사에 뿌리를 둔 정보경찰은 이름만 정보관으로 바뀌었을뿐 지금도 존재한다.(연합뉴스, 2019.8.14)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친일경찰은 범죄즉결례·태형제 등을 통해 악독하고 잔인하게 민중들을 탄압했다. 확인된 즉결처분건수만 1911년 1만8100여건, 1912년 2만1400여건, 1918년 8만2100여건에 달한다.(우리역사넷) 일제강점기 경찰에게 주어지는 최고훈장인 경찰공로기장을 받은 친일경찰 김덕기는 독립운동가들을 총으로 사살하거나 고문으로 죽였던 악질적인 친일주구다. 김덕기가 체포한 독립운동가들은 오동진, 조봉암, 안창호, 홍증식 등 1000여명이 넘는다.(레디앙, 2020.2.17) 친일경찰중에는 손발을 모두 묶어 천장에 매달아놓는 <비행기고문>으로 악명 높은 서영출도 있다.(경남도민일보, 2015.6.14)

특히 종로경찰서는 독립운동가를 감시하고 가장 악랄하게 탄압한 일제공권력의 대명사였다.(민족문제연구소) 종로경찰서에 끌려가면 송장 아니면 산송장으로 나온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공익뉴스, 2019.8.7) 당시 종로경찰서에는 80여명의 형사가 있었다. 그중 일제침략세력과 친일경찰이 사상범이라 주장했던 민족해방운동가들을 잡기 위한 고등계형사가 40명이었다.(밀양방송, 2005.12.29) 1943.9 조선인 최초로 종로경찰서장에 임명된 윤종화는 취임사에서 <종로가 병참기지반도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매일신보, 1943.10.1) 대표적인 친일경찰 최연은 혜산진경찰서고등계형사로 재직할 당시 독립투사수백명을 잡아가둔 공으로 <경찰관리공로기장>을 받았다. 해방직후 서울종로경찰서장으로 임명된 후 경기도경찰부장 스털링대위, 전경찰부장 오카와 함께 서울시내10개경찰서장 임명작업을 주도했다. 또 이익흥, 노덕술, 이하영, 윤우경, 김태일 등 수십명에 달하는 친일경찰간부를 군정경찰로 입문시켰다.(국민일보, 1992.7.30) 친일경찰 하판락은 1938년 부산수상경찰서순사부장의 경부보로 승진하면서 <고문귀신>으로 악명을 떨쳤다. 1943년 독립투사 7~8명중 3명이 그의 고문을 받다 절명했다. 잔혹한 고문과 친일행각으로 하판락은 빠르게 승진했다.(오마이뉴스, 2013.3.1) 일제강점기 <고문왕>으로 불리고 해방후에도 친일경찰의 대명사였던 노덕술은 경찰이 된지 3년만에 부장으로 승진했다.(경상일보, 2014.11.16)

 

미군정과 이승만독재시절, 친일<견찰>에서 친미<견찰>

해방과 함께 최우선으로 청산됐어야 할 친일경찰이 미군정에 의해 부활했다. 1945.9.7 맥아더포고령은 친일파의 재산과 직위를 유지·보호했고 미군정은 일제에 협력한 친일관료와 경찰들까지 통치에 적극 활용했다.(오마이뉴스, 2019.3.4)

1946.11 당시 친일경찰의 비율은 치안감100%, 청장63%, 국장80%, 총경83%, 경감75%, 경위83%로 고위경찰의 82%에 이를 정도였다.(KBS, 2020.2.18) 경찰은 일제강점기엔 일제의 앞잡이로, 미군정 아래서는 미군정의 앞잡이로 행동했다.(통일뉴스, 2016.5.24.) 친일경찰들은 중도파나 좌파정치인들을 탄압하는데 앞장섰다.(경향신문, 2018.6.10) 대표적인 사례가 노덕술의 김원봉체포였다.

독립투사들을 체포하고 고문한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까지 받을만큼 악명 높았던 노덕술은 1946년 수도경찰청수사과장으로 등용됐다.(뉴스타파, 2016.8.6) 해방후 김원봉은 <친일파청산>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노덕술에게 체포돼 <조국해방을 위해 일본놈들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다>고 통탄했다.(경향신문, 2019.4.30)

1947년 반민특위는 당시 경찰소속 최연(전수도청부청장), 이구범(전수도청부청장), 최운하(서울시경사찰과장), 이성엽(김제경찰서장), 이안순(전북도경사찰과장), 서영출(경주경찰서장), 조응선(종로경찰서사찰주임)을 검거했다. 경찰조직내 친일파들은 거세게 반발했다.(<반민특위특별조사부조사기록>해제, 민족문제연구소) 종로경찰서장출신 최운하는 친일경찰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극우세력을 동원해 특위활동반대데모를 선동했다.(국민일보, 1992.7.30) 1949년 최운하가 체포되자 6.6 서울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의 지휘로 40명의 사복경찰이 반민특위사무실을 급습했다.(뉴스타파, 2015.8.6) 이 사건은 이승만의 지시와 시경국장 김태선의 지휘 아래 조직적으로 이뤄졌다.(서울앤, 2019.4.18)

1948년말에는 노덕술과 친일경찰들이 친일자본가인 박흥식의 자금으로 청부업자 백민태를 끌어들여 반민특위요인들을 납치·암살하는 계획을 세웠다. 친일경찰들은 백민태에게 자금·권총·수류탄 등을 지급해 암살계획을 실행하려고 했지만 백민태의 폭로로 미수에 그쳤다. 당시 친일청산·반민특위활동과 관련해 친일세력의 반발과 회유·협박·테러는 끊이지 않았다.(뉴스타파, 2015.8.6)

결국 친일경찰들의 조직적인 방해로 친일파청산은 무산됐다. 반민법(반민족행위처벌법)위반으로 형을 선고받은 사람들도 모두 복권됐다. 해방후 우리민족의 숙원이던 친일숙청과 과거청산은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뉴스타파, 2015.8.6) 2020.6.4 반민특위후손모임은 경찰청장에게 반민특위습격사건과 친일부역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것을 촉구했다.(연합뉴스, 2020.6.4)

 

박정희독재시절, 군사쿠데타세력에 의해 장악된 친파쇼<견찰>

전쟁후 이승만독재정권은 장기집권을 위해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며 애국민주세력을 말살시키는 정책을 실시했다. <반공>의 기치아래 민주주의와 통일에 대한 열망은 교살당했다. <사사오입>개헌을 둘러싼 폭력정치가 난무하고 원조를 통해 소수의 자본가들이 부를 축적하는 동안 민중들의 삶은 완전히 파탄났다. 결국 3.15부정선거를 계기로 시작된 민중의 저항은 4.19항쟁으로 폭발했다. 이때에도 3.15부정선거규탄시위에 참가한 고등학교신입생 김주열의 시신이 실종27일만인 4.11 마산앞바다에서 최루탄이 얼굴에 박힌 채 떠올랐다. 그렇게 경찰의 만행은 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다.

박정희군사파쇼정권시기는 군사쿠데타세력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사회를 파쇼적으로 통치했다. 파쇼통치권력의 핵심은 정보부(중앙정보부)였다. 악명높은 파쇼적 폭압기관의 대명사인 정보부는 1961년 5.16쿠데타직후 김종필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기관으로 창설해 초대부장을 맡았다. 파쇼권력의 총본산인 정보부가 헌법을 짓밟고 민주세력들을 총칼로 탄압할 때 경찰은 그 첨병이자 행동대의 역할을 했다.

당연하게도 경찰은 군사쿠데타세력이 장악했다. 박정희파쇼통치하 첫치안국장은 육군준장출신의 조흥만이었고 이후 이소동, 박태원, 박영수 등 상당수 치안국장들이 군출신인사들이었다.(경찰청홈페이지) 박정희군사파쇼세력들은 애국·민주인사들을 정보부나 비상보통군법회의를 통해 야수적으로 탄압했다. 1961년 민족일보 조용수, 사회당 최백근, 1969년 남조선해방전략당 권재혁, 1973년 최종길, 1975년 인혁당 도예종 등 수많은 애국·민주인사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당시 치안국은 정보부의 지휘를 받으면서 민주세력을 압살하는 주구조직과 다름없었다. 과거 친일에서 친미로 둔갑해 독립운동가들을 때려잡던 무리들이 이제 파쇼권력의 일부가 돼 애국·민주인사들을 색출하고 때려잡는 돌격대역할을 했다.

1979.8.11 사측의 일방적인 폐업과 해고에 반발한 YH무역노동조합 여성노동자 187명이 신민당사 4층에서 농성을 벌였다. 그 조합원중 한명이 경찰의 강제진압과정에서 추락사했다.(연합뉴스, 2019.10.30) 이 사건은 부마민중항쟁과 10.26사건으로 이어져 박정희군사파쇼정권종말로 귀결됐다.

 

전두환독재시절, 친파쇼<견찰>의 야수적인 고문·학살

1979.10 부마민중항쟁으로 박정희군사파쇼정권은 무너졌지만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의 쿠데타로 군사파쇼정권은 그대로 이어졌다. 1980.5 광주민중항쟁을 총칼로 짓밟은 전두환군사파쇼정권은 정보부를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로 바꿨지만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안기부의 수족역할을 했던 경찰 또한 마찬가지였다. 전두환군사파쇼정권에 항거했던 수많은 노동·농민·학생운동가들이 야만적인 경찰폭력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1982.5.22 서울대생 노진수는 학생운동중 연행된후 행방불명됐고 8.22 진아교통노동자 문영수가 경찰폭행에 항의하다 경찰의 구타로 희생됐다. 1983.11.8 서울대생 황정하는 사복경찰을 피해 도서관 6층난간에서 시위를 시도하다 추락해 8일뒤 사망했다. 1986.3.10 노동자 김상원이 경찰의 불심검문에 항의하다 폭행으로 식물인간이 돼 두달여뒤인 5.26 결국 목숨을 잃었으며, 6.11 노동자 신호수가 서울서부경찰서 대공과에 연행된 후 6.19 의문의 죽음을 당한 채 발견됐다. 1987.1.14 서울대생 박종철은 치안본부대공수사단에서 조사받던중 고문으로 희생됐고 6.9 연세대생 이한열은 6.10총궐기를 위한 결의대회에서 직격최루탄에 맞아 운명했다. 6.18 태광고무노동자 이태춘이 집회과정에서 경찰의 과잉진압에 의해 추락사했다. 6.25 한국외대생 이재용은 경찰의 학내침탈소식을 듣고 피하다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8.22 대우조선노동자 이석규가 평화시위중 직격최루탄에 맞아 운명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두환정권 당시 사회풍토문란사범의 소탕을 명분으로 1980.8~1981.1 총6만755명이 체포된 삼청교육대사건은 대표적인 인권유린침해사건이다. 삼청교육대사업은 보안사령부·정보부·헌병대 등의 주도로 추진됐으며 경찰은 대대적인 검거작전에 투입돼 등급분류심사위원회에 참여했다. 검찰·경찰·지역정화위원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는 연행자들을 A·B·C·D의 4등급으로 분류해 A급 3252명을 군법회의에 회부했고 B·C급 3만9786명은 4주교육후 6개월을 복역하게 한 다음 다시 2주교육뒤 방면했다.(뉴스파고, 2014.12.5)

1982.3.18 문부식 등 부산지역대학생들은 미국이 전두환쿠데타세력인 신군부의 군사행동을 방조하고 광주학살·전두환신군부집권을 지원·인정한 것에 대해 항의하면서 부산미문화원을 방화했다. 당시 정권은 대대적인 검거작전으로 문부식을 비롯해 11명을 체포했다.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은 전두환군사쿠데타의 배후가 미국임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으로 이후 반미운동이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전기가 됐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86.10.28 전국26개대학 2000여학생들은 <애학투련>(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결성식을 위해 건국대학교에 모였다가 나흘간 경찰과 대치해야 했다. 경찰은 작전명<황소30>을 전개해 기습적으로 병력을 투입하고 5개건물에 쫓겨 농성중이던 학생 1447명을 연행하고 이중 1288명을 구속했다. 단일사건구속자로는 최고기록을 세운 애학투련(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사건은 이듬해 대선을 앞둔 정권의 대표적인 학생운동탄압사건이었다.(한겨레, 2006.10.27)

경찰은 전두환군사파쇼정권시기 수많은 노동자·민중의 투쟁을 야수적으로 탄압했다. 사북광산노동자투쟁, 원풍모방노조사수투쟁, 컨트롤데이타노동쟁의투쟁,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결성, 목동철거민투쟁, 대우자동차노조민주화·임금인상투쟁, 구로동맹파업 그리고 1987년노동자대투쟁 등 노동자·농민·도시빈민생존권과 반독재민주화투쟁을 폭력탄압했다. 경찰은 민중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군사파쇼정권의 도구 그 자체였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노태우독재시절, 군사파쇼정권연장 위해 백골단 창설

군정종식의 열망이 1987년 6월항쟁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12월대선의 패배로 군사파쇼정권은 연장됐다. 노태우군사파쇼정권은 6월항쟁의 성과인 민주노조운동, 농민운동, 학내민주화, 통일운동을 폭력탄압하기 위해 백골단·전투경찰을 조직·동원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애국·민주인사들이 경찰의 폭력만행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백골단의 기본은 1985.8.1 서울시장명의로 모집된 사복체포조로 무술유단자와 특전사·해병대출신들이 특채돼 구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경찰서에는 진압의 강도를 높이기 위한 사복제대를 운영했다고 한다.

1988.3.25 농민운동가 김길호는 1987년 부정선거규탄투쟁중 경찰에게 집단구타를 당한 후유증으로 절명했다. 4.10 한신대생 곽현정은 1986년건국대애학투련사건으로 구속된 뒤 자결했고 5.3 보안법(국가보안법)으로 수배중이던 조선대생 이철규는 불심검문에 도주후 행방불명된 뒤 5.10 변사체로 발견됐다. 1990.5.3 통일중공업노동자 이영일은 경찰과 회사측의 지속적인 탄압에 항의해 분신·자결했다. 5.18 대유공업전문학교학생 신장호는 전대협출범식에 참가하러 이동중 경찰의 불심검문을 피하려다 사고를 당해 사망했다. 1991.4.26 명지대생 강경대는 백골단에게 쇠파이프로 집단구타 당해 절명했다. 5.25 성균관대생 김귀정은 경찰의 무차별적인 진압작전과정에서 백골단에 짓밟혀 살해됐다. 연속되는 사건은 백골단의 폭력성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입증했다. 6.27 노동운동가 유재관은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에서 활동중 경찰의 침탈소식을 듣고 피하다 사망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6월항쟁이후 통일운동이 활성화됐다. 경찰은 당시 1988.6.10 남북학생회담과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의 통일선봉대 8.15학생회담성사투쟁을 최루탄난사·무차별구타 등 폭력적으로 진압하며 수천명의 학생들을 연행했다. 이후 문익환목사를 비롯해 임수경, 문규현, 서경원, 황석영 등 애국통일운동인사들이 방북후 돌아오자마자 연행됐고 1990.8.15 개최된 1차범민족대회는 폭력적인 탄압의 대상이 됐다.

1988년 여의도농민시위, 1989년 서울지하철파업 등 노동자·농민들의 생존권요구를 건 투쟁들을 폭력탄압하는데도 경찰은 앞장에 섰다. 또 1987년 전대협, 1988년 전노련(전국노점상연합회), 1988년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 1989년 전빈련(전국빈민연합) 등 6월항쟁이후 대중적 민주단체들이 결성됐는데 노태우군사파쇼정권은 경찰을 동원해 대대적으로 탄압했으며 주요인사들은 정보경찰의 불법사찰대상이 됐다.

1990년 KBS노조방송민주화투쟁, 현대중공업파업에 폭력경찰이 투입됐다.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와해를 노린 대대적인 업무조사가 벌어지고 출범5개월만에 지도부·소속노조간부 200여명이 구속·수배됐다. 1991년 <연대를 위한 대기업노조회의>간부들의 구속사태와 대우조선노조파업, 1992년 총액임금제분쇄투쟁 등 민주노조사수·노동기본권쟁취투쟁에 대한 파쇼적 탄압으로 구속노동자의 수는 노태우군사파쇼정권 5년동안 1973명에 이르렀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김영삼문민파쇼시절, 친파쇼<견찰>에 의한 죽음의 행렬

<문민정부>를 내세운 김영삼문민파쇼정권은 노태우·김종필세력과의 파쇼적 보수3당야합에 기초해 출범했다. 김영삼문민파쇼정권은 그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민주화열망·요구를 경찰을 동원해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특히 반미·통일운동과 시장개방반대투쟁·민중생존권쟁취투쟁을 야수적으로 탄압했다. 1996.8 연세대사건과 1996.12 노동법·안기부법날치기통과에 따른 노동·학생운동의 저항을 경찰이 폭력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구속자가 발생했다.

1992.11.2 전남대생 문승필은 학생운동을 하던 과정에서 경찰의 협박전화를 받아오다 철로변의 변사체로 발견됐다. 1996.12.11 경원대생 이상희는 집회중 경찰에 연행된 후 정신질환을 앓다 자결했다. 1997.2.15 철거민 민병일은 구갈철거민대책위원회활동중 경찰의 집단폭행으로 절명했다. 9.15 광주대생 김준배가 한총련투쟁국장활동으로 수배받던 중 과잉검거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90년대에는 반미·통일운동이 대중적으로 전개됐다. 1990년 남·북·해외 우리민족이 모두 참여하는 1차범민족대회가 성사됐다. 범민련은 남·북·해외 온민족을 아우르는 조직으로서 미군철수·보안법철폐·연방제통일을 제기하며 1999년까지 매해 범민족대회를 개최했다. 경찰은 해마다 전국순회투쟁을 벌인 통일선봉대활동과 범민족대회를 야수적으로 탄압했다. 김영삼문민파쇼정권은 1996.8.13~8.20 7차범민족대회개최장소인 연세대를 원천봉쇄하고 2만여명의 한총련학생들과 애국·민주시민들을 8일동안 가둬두고 헬기와 수만명의 경찰병력을 동원해 야만적으로 탄압했다. 연세대근처 대학가에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시민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연행했다. 당시 경찰에 의해 무려 5713여명이 연행됐고 그중 465명이 구속됐다.(오픈아카이브)

김영삼문민파쇼정권은 1992년 대선당시 1조2000억의 불법대선자금을 사용했다는 야당의 제기가 대학가에서 대선자금공개요구로 확산되자 이를 저지시키고 정권을 연장하기 위해 학생운동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1996.3.29 연세대생 노수석과 1997.3.20 조선대생 류재을의 사망사건이 발생했다. 특히 연세대사건을 계기로 검찰은 학생운동의 대표체인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을 보안법상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경찰내검거전담반을 편성해 전국대학의 단과대학생회장이상을 수배·구속했다.(동아일보, 1997.6.9)

김영삼문민파쇼정권이 추진한 신자유주의정책은 노동의 유연화를 기본내용으로 하는 노동법개악으로 이어졌다. 김영삼문민파쇼정권은 1996.12 열린 국회에서 노동법개정안을 기습적으로 날치기통과시켰다. 이에 민주노총은 12.26노동법개악저지총파업투쟁을 벌였고 이듬해 1.18까지 총파업참가자수가 90만5000명을 넘었다. 경찰은 노동계총파업을 대대적으로 탄압하며 무력화시키려 책동했다.

 

김대중정권, <신자유주의> 강요하며 폭력탄압 지속

IMF외환위기에 집권한 김대중정권은 <경제위기>와 <정권교체>라는 미명하에 미국중심의 <세계화>인 <신자유주의>정책을 노동자·민중에게 강요했다. 1999.12 민중대회를 계기로 김대중정권은 전농지도부20명을 비롯한 학생·노동자·민중단체운동가 등 48명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했다.(51개민중사회단체공동기자회견문, 1999.12.22) 2001.2 대우자동차부평공장노동자들의 총파업을 경찰의 폭력으로 쓸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공장인근의 부평지역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전투경찰들과 구사대가 투입됐고 지나가던 시민들까지 폭행을 당했다.(오마이뉴스, 2001.2.19)

대테러를 명분으로 만들어진 경찰특공대가 시위진압에 적극 동원됐다. 2000년 호텔롯데노조파업에 경찰특공대가 투입돼 노조원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했다. 경찰특공대는 김대중정권시기인 2002.2미상공회의소점거대학생강제해산(KBS, 2002.2.18), 노무현정권시기인 2005.5 울산건설플랜트시위진압, 2005.6 오산수청동시위진압, 2006.6 하이닉스농성장시위진압, 2008.10 기륭전자고공농성시위진압 등 수많은 농성시위에 투입됐다.(인권운동사랑방<벼리>141호, 2009.2.25) 한총련에 대한 <이적단체>규정도 김대중정권에서 똑같이 유지됐다. 한총련<이적단체>사건은 단일사건최대구속자를 기록하면서 연일 연행·구속자가 양산됐다. 1997~2001 한총련대의원594명이 보안법위반으로 구속·기소됐으며 해당시기 전체보안법구속자의 53%를 차지했다.(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1998년 김대중정권은 폭력진압의 상징인 최루탄의 사용중단을 선언했지만 대신 경찰은 시위진압에 신식탄압장비들을 도입했다. 2001년 민주노총시위를 진압하려는 경찰들에게 고무탄환공기총이 지급됐다.(시사저널, 2001.4.12) 2007.7.24 경찰청경비과장 장전배는 경찰청주최 <평화적준법시위문화정착을위한한국·일본·프랑스공공질서유지전략세미나>에서 <가까운 거리에서 경찰을 공격하거나 불을 지르려는 시위대에게는 전자충격총(테이저건)을 사용하거나 살수차에 최루액을 섞어쓰는 방안을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 <차벽겸용차량, 채증장비를 탑재한 이동위성방송송출시스템, 진압복이나 방패에 이동식카메라부착, 깃대형카메라 등을 개발해 도입을 검토하고있다>고 밝혔다. 이에 민주노총은 <테이저건사용주장은 시대착오>라고 강력규탄했다. 이미 2006.4 현대하이스코비정규직노동자들의 크레인점거농성당시 경찰이 노동자들에게 살수한 후 테이저건을 사용해 자칫 감전사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 발생했다. 외국에서 테러진압용으로 쓰이는 테이저건은 최고5만V의 전기충격이 발생해 중추신경이 마비되며 눈에 맞을 경우 실명되는 치명적 무기다.(민중언론참세상, 2007.7.27)

2002.6.13 미군장갑차가 신효순·심미선 두여중생을 뒤에서 치고 압사시키는 야수적 만행을 저질렀다. 가해미군의 처벌을 요구하는 반미촛불시위가 광화문을 중심으로 확산됐다. 이때에도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부상자가 많이 발생했다. 당시 경찰관계자는 <제네바협약에 의해 외국대사관을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다>며 <친미견찰>을 자처했다.(프레시안, 2002.12.23) 결국 불평등협정인 SOFA(한미주둔군지위협정)에 가로막혀 가해미군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했다. 11월 미군사법정에 기소된 미군2명 모두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친미견찰> 서울경찰청장 이대길은 평화적인 촛불시위에 대해 <순수한 추모행사의 범위를 벗어난 사실상 불법반미시위>라고 망발하면서 <불법행위>가 발생할 경우 경찰병력을 동원해 즉각 진압하고 주동자를 전원검거해 사법처리하겠다고 협박했다. 2003.1.1 오전6시 경찰병력2개중대를 동원해 서울광화문앞공원에 설치된 <효순이·미선이추모농성장>을 강제철거했으며(조선일보, 2003.1.2) 2003.6 효순이·미선이1주기를 앞둔 시기, 6.13행사를 절대로 허용하지 말라는 미대사관의 <지시>를 따라 촛불시위를 폭력진압하고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을 불법연행했다. 한 연행자는 전경이 방패로 여학생을 내리치려 하자 등으로 막아섰는데 폭력경찰에 의해 티셔츠와 머리채를 잡혀 끌려갔다.

 

노무현정권, 경찰악폐청산 없이 개혁 없다

보수대(보안수사대)인력은 2002년 655명에서 2006년 408명으로 감축됐고 보안법으로 검거된 숫자는 2002년 191명에서 2006년 35명으로 감소했다. 이 숫자는 이명박악폐정권이 들어서며 다시 상승추세로 돌아섰다.(동아일보, 2009.9.15) 이는 결국 보수대가 남아있는 한 정권의 성격·정책에 따라 언제든지 반민족·반민주의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으며 진정한 민주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보수대를 폐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당시 경찰청장 최기문은 취임초기부터 <앞으로 폭력적인 집회시위에 최루탄사용을 검토하겠다>고 밝히며 파쇼적 본색을 그대로 드러냈다.(매일노동뉴스, 2003.6.9) 2003년 노동자대회는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피로 얼룩졌으며 이는 정부의 개혁정책후퇴와 경찰의 과잉폭력대응 때문이었다.(민중언론참세상, 2003.11.10) 같은해 부안핵폐기장유치반대1만군민대회에서도 경찰의 강경진압은 계속됐다.(오마이뉴스, 2003.7.24) 그때 부안에는 주민2명당 경찰1명에 해당되는 약1만경찰이 한달내내 배치됐다.(부안독립신문, 2005.9.10)

최기문의 뒤를 이은 허준영 역시 폭력적으로 민중을 탄압했다. 2005.11 농민집회참가자들은 <경찰이 방패로 시위 참가자들의 머리 부위를 때리며 진압해 부상자의 태반이 머리를 다쳤다>고 설명했다.(한겨레, 2005.12.19) 인권위에서는 전용철·홍덕표농민의 사망은 경찰의 과잉폭력진압에 의한 사망이라고 발표했다.(KBS뉴스, 2005.12.27) 이후 허준영은 경찰청장에서 물러났지만 퇴임후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물러날 일이 아니었다>며 전혀 뉘우치지 않았다.(위클리조선 2044호, 2009.2.20)

허준영의 후임 이택순도 <폭력시위진압을 위해 물대포에 최루액을 넣어 사용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며 망발을 한 후(조선일보, 2006.11.24) 2007.3 한미FTA저지집회에서 집회참가자20여명과 취재기자8명이 크게 다칠 정도로 폭력진압에 열을 올렸다.(한겨레, 2007.3.11)

최기문, 허준영, 이택순 등 역대경찰청장들은 부정부패·비리와도 밀접한 관련을 보여줬다. 2007 김승연한화회장의 폭력사건, 이른바<북창동사건>때 한화그룹고문인 최기문전경찰청장이 남대문경찰서장·서울경찰청장에게 전화를 걸어 수사인력을 모두 철수시켰고, 당시 경찰청장 이택순은 한화증권고문 유기완과 골프를 쳤다.(한겨레, 2013.4.5) 최기문은 직권남용으로 징역1년·집행유예2년을 선고받았고, 이택순 역시 박연차로비사건으로 징역1년·집행유예2년을 선고받았다.(조선일보, 2016.4.16) 허준영은 경찰직에서 물러나 이명박의 힘으로 코레일사장이 됐다. 그는 2009년 파업가담자전원에 가까운 1만1588명을 징계했으며 169명을 해고하더니(비지니스포스트, 2013.12.13) 2011년 면담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을 경찰력으로 막아서고 최루액까지 발사하게 했다.(오마이뉴스, 2011.11.25) 이때 저지른 용산개발비리로 허준영은 징역1년·집행유예2년·추징금1억원을 선고받았다.(연합뉴스, 2017.3.16)

 

이명박악폐정권, 노동자·민중을 죽음으로 내몬 살인<견찰>만행

악폐청산 없는 개혁정권은 결국 군사파쇼세력에 뿌리는 둔 <이명박근혜>악폐세력에게 정권을 내줬다. 이명박악폐정권시기 경찰폭력은 더욱 심화됐다. 2008년 미국산광우병쇠고기반대투쟁에 참여한 시민들이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에 쓰러졌다. 당시 경찰청장 어청수는 <수백명이라도 반드시 처벌하겠다>며 평화적인 촛불시위를 불법행위로 매도하고 경찰폭력을 정당화했다.

<용산참사>는 경찰특공대투입으로 화재가 발생해 6명이 사망하고 24명이 부상당한 야수적인 경찰폭력의 대명사다.(중앙일보, 2017.6.21) 당시 서울시경찰청장이자 경찰청장내정자였던 김석기는 <용산참사>10주기인 2019년 기자회견에서 <지금도 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똑같이 결정하겠다>는 파렴치함을 보였다.(오마이뉴스, 2019.1.26)

어청수 다음으로 경찰청장이 된 강희락은 <용산참사>가 <폭력시위에 대한 정당한 법집행>이라고 강변하면서 반민중폭력으로 얼룩진 전경찰청장들의 전철을 밟았다.(시사뉴스, 2009.3.5.) 그는 청와대행정관 성접대의혹을 두고 <재수 없으면 걸린다>, <나도 공보관하면서 많이 해봤다> 등의 망언을 일삼더니(프레시안, 2009.4.1), 결국 2012년 <함바비리사건>으로 징역3년6월·벌금7000만원·추징금7000만원의 실형을 선고받았다.(연합뉴스, 2012.6.28)

쌍용차노조파업에 대한 살인진압은 당시 경기경찰청장 조현오가 청와대와 직접 연락해 그 지침을 받아 작전을 펼친 것으로 2018년 밝혀졌다. 진압에 사용된 테이저건·다목적발사기·유독성최루액·헬기 등은 대테러장비로 분류돼있다. 경찰은 파업기간동안 헬기6대를 동원해 211회 최루액을 난사했다.(프레시안, 2018.8.28) 경찰은 쌍용차노조파업폭력진압후 쌍용차노조측에 손배(손해배상)청구 민사소송을 제기해 <신자유주의시대>의 악랄한 노조탄압의 끝판을 보여줬다. 정리해고로부터 시작됐지만 이는 경찰의 폭력적 진압과 손배청구소송으로 이어지면서 쌍용차 해고노동자·가족들 30명이 목숨을 잃었다.(참여연대, 2019.1.31)

파업에 참여했다가 전재산과 임금까지 회사에 가압류당한 두산중공업노동자 배달호가 2003.1 분신·절명했다. 손배소송이 노동자들에게 미친 영향을 단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10여년이 지나면서 이제는 사측이 아니라 경찰이 나서 노동자개인에게 손배소송을 제기하고있다. 금속노조법률원이 2015.1~2016.8 직접 개입한 주요소송53건중 노조가 제소한 건은 20건이고 피소된 건은 33건이었다. 경찰이 노조와 노조원에게 집시법위반의 형사상 책임에 이어 거액의 손배소송까지 제기해 2중압박하는 상황이다. 민주노총을 상대로 한 손배소송중 종결된 건은 2017.9현재 13건으로 배상액은 무려 모두 2억4259만원이다. 이중 6건이 비정규직관련건인데 금액은 1억5069만원으로서 전체금액의 62.1%, 즉 과반을 넘는다.(뉴스타파, 207.9.13)

제주강정마을에 대한 경찰의 탄압은 인권침해의 종합판이었다. 10여년에 걸친 반대운동과 행정대집행의 과정에서 경찰의 인권침해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경찰청자료를 보면 해군기지공사가 본격화한 2011.8~2012.8까지 1년간 해군기지반대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동원된 육지경찰은 연인원 12만8402명에 이른다. 또 일부지역집회전면금지, 주민·활동가무차별연행, 불법감금, 폭력 등 인권침해보고서분량만 200페이지에 달한다.(제주의소리, 2012.10.4)

조현오는 경찰을 동원해 한진중공업희망버스·<천안함>사건·구제역사태·FTA·제주강정마을 등 3만7000여건의 정부옹호댓글을 작성하도록 지시했다.(한겨레, 2020.2.14) 반면 그는 수원20대여성살인사건과 같은 민생치안해결에는 총체적 부실을 보여주다 결국 사임했다. 조현오는 노무현전대통령명예훼손·뇌물수수·댓글공작 등으로 3번이나 수감됐다.

 

박근혜폭압<정권>, 친미친일친파쇼친극우와 인명경시의 절정

댓글공작으로 탄생한 박근혜폭압<정권>은 아버지 박정희의 파쇼통치를 그대로 따랐다. 박근혜는 집권초반 이석기내란음모사건·정보원(국가정보원)주도공안사건을 일으켰고 시대착오적인 <간첩>조작사건까지 벌였다.(프레시안, 2014.2.25) 또 애국·민주단체 자주통일민주주의코리아연대를 이적단체로 규정하며 이적목사의 교회까지 침탈했다. 보수대를 동원해 대대적인 압수수색·검거선풍을 벌이고 파쇼악법인 보안법을 남발하며 반민족적이고 반민주적인 파쇼적 본색을 드러냈다.(21세기민족일보, 2014.12.23)

2014.4 세월호참사가 일어난 뒤 정보경찰이 유가족에 대한 불법미행·사찰을 자행한 것으로 밝혀져 사회적으로 논란이 일었다. 당시 경기지방경찰청장 최동해는 <사전동의를 거치지 않은 절차는 잘못이지만 유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가당찮은 변명으로 유가족들을 우롱했고 경찰청장 이성한은 <미행이 아닌 에스코트였다>고 황당한 망발을 늘어놓았다.(고발뉴스, 2014.7.9) 정보경찰은 4.16세월호참사특조위의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이들을 <정적>으로 취급하는 보고서를 작성해 2014년부터 2년에 걸쳐 청와대에 보고했다.(한겨레, 2019.11.13)

2014.8 세월호참사유가족들을 향해 행진하는 시민들을 서울송파경찰서34기동대가 폭력적으로 가로막았다. 당시 현장에는 종로서경비계장과 112신고로 출동한 경찰관들이 있었지만 시민들의 항의에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며 반민주·친극우적 본색을 드러냈다.(한국일보, 2014.8.31)

2015.4.18 세월호참사1주기범국민대회에서 경찰은 병력1만3700여명, 차벽트럭18대, 차량470여대, 안전펜스 등을 동원해 6겹으로 시위대저지선을 설치하고 최루액을 대량으로 살포했다. 이로 인해 세월호참사유가족 등 수십명이 부상당했다.(중앙일보, 2017.6.21)

경찰은 19일 세월호추모집회가 폭력불법집회라며 4.16연대사무실을 전격 압수수색했다.(서울경제TV, 2015.6.19) 세월호참사1주기때 종로경찰서경비과장은 확성기를 통해 <우리경찰 잘하고 있습니다>, <캡사이신을 당당히 쏘세요>라고 망발해 시민들의 공분을 샀다.(서울신문, 2015.4.21) 2016년 경찰은 세월호참사유가족들이 농성장을 비운 사이에 차양막을 강제철거하고 노란리본을 훼손했으며 이에 항의하는 유가족2명을 현행범으로 체포했다.(프레시안, 2016.6.26)

박근혜폭압<정권>은 미대사관의 편의를 보장해주기 위해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마저 유린했다. 2015년 코리아투위(코리아연대공안탄압분쇄및박근혜파쇼<정권>퇴진투쟁위원회)가 미대사관앞에서 매일 진행하던 1인시위를 수십명의 종로경찰서소속경찰들이 원천봉쇄했다. 친미<견찰>들은 구체적인 근거 없이 <미대사관앞에서는 1인시위를 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시위자를 강제이격했다. 민중민주당은 9.25현재 1529일째 미대사관앞1인시위를 계속하고있다.

악명높은 전법무차관 김학의를 수사하던 김기용경찰청장이 2013.3.15 김학의가 법무차관으로 임명되는 날, 갑자기 경질됐고(노컷뉴스, 2019.4.4) 새로 임명된 경찰청장 이성한은 김학의수사를 중단하라고 지시하며 수사팀책임자들을 전원교체했다.(KBS뉴스, 2019.3.23) 청문회당시 논문표절·부동산투기 등으로 이미 부정부패의 도마에 오른 이성한은 유병언수사를 비롯한 각종 부실수사로 결국 해임됐다. 이성한은 임기제도입이후 7번째로 임기를 못채운 경찰청장이다.(아시아경제, 2014.8.5)

2016년 경찰의 물대포조준사격으로 백남기농민이 끝내 사망했다. 경찰의 살인진압에 의한 인명살상이 분명한데도 당시 경찰청장 강신명은 <정당한 공무집행>이라고 강변하며 사과를 거부했다.(농업인신문, 2017.9.2) 2019.8 당시 서울시경찰청장 구은수는 업무상과실치사로 유죄가 인정돼 10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나 강신명은 사건현장에 없었다는 이유로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허핑턴포스트, 2019.8.16) 살수차는 2005년 노무현정권이 최루탄을 대신하겠다며 도입한 것으로 살수차사용규정을 위반해 백남기농민을 살해했다. 박근혜폭압<정권>의 인명경시풍조가 경찰의 공권력남용으로 드러난 것이다.

강신명의 후임으로 등장한 이철성은 인사청문회에서 과거 음주운전교통사고가 논란이 됐지만 결국 경찰청장으로 임명됐다.(경향신문, 2016.8.24) 이철성은 영등포경찰서장시절 <어느 집회를 봐도 경찰이 먼저 공격하는 경우는 없다>, <차라리 전쟁상황이면 마음껏 진압했을텐데>라는 망발을 해댔다.(프레시안, 2016.8.2.) 이철성은 경남경찰청장으로 재직하던 2013년말 밀양송전탑반대집회에 하루 3000여명이상의 경찰병력을 투입하는 등 연인원38만명의 경찰을 동원해 폭력을 휘두른 경력의 소유자다.(연합뉴스, 2016.7.29)

2016년 국감에 소환된 이철성은 백남기농민이 쓰러진 2015.11.14 민중총궐기 당시 상황속보가 없다고 증언했으나 이후 새빨간 거짓임이 드러났다. 야당·시민단체 등은 <부검영장이 진상은폐·조작을 위한 시도임이 명백해졌다>며 밝히고 야당소속 국회행정안전위원회위원들은 <경찰이 고의적으로 국회와 국민을 속인 중대한 위법행위>라며 이철성사퇴를 촉구했다.(아시아경제, 2016.10.19)

정보경찰은 2013년 경남밀양·청도송전탑건설에 반대하는 주민들을 1대1로 사찰하기도 했으며 정보경찰이 (대구·경북)민심보고서(2016.1.12)를 만들어 대통령지지율상승을 위한 정책까지 제공한 사실도 여러건이 드러났다.(한겨레, 2019.11.13) 정보경찰은 친미친일친파쇼친극우의 한뿌리인 삼성을 위해서도 기꺼이 그 손발이 됐다. 삼성전자서비스노조 염호석분회장이 삼성의 노조탄압에 항의해 목숨을 끊자 정보경찰들이 나서 가족장으로 치르도록 집요하게 유도했다. 경찰청인권침해사건진상조사위는 이 사건을 경찰의 부당개입사건으로 규정했다.(한겨레, 2019.5.14)

 

문재인정권, 친미친일친파쇼친극우성 드러낸 <견찰>

<촛불정권>이라 자처하는 문재인정권하에도 친미친일친파쇼친극우<견찰>에 의해 애국·민주세력에 대한 탄압은 계속됐다. 2020.4 박근혜폭압<정권>시절 이적단체로 조작된 <코리아연대사건>으로 김병동당원에게 청구된 구속영장은 결국 법원에 의해 기각됐다. 서울지방경찰청보수대·공안검찰은 회원들이 이미 처벌받은데다 단체해산으로 사실상 종결된 <코리아연대사건>을 되살려내보려고 김병동당원을 악명 높은 옥인동(장안동)대공분실에서 2차례나 소환조사하며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반민주폭거를 자행했다.(21세기민족일보, 2020.4.27)

총선직후인 2020.4.20 서울지방경찰청보수대는 범민련남측본부사무처간부에게 10년전 보안법사건을 꺼내들며 출석요구서를 보냈다.(통일뉴스, 2020.5.6) 문재인정권이 선언한 4.27판문점선언·9월평양공동선언의 정신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경찰의 도발행위였다. 이에 범민련남측본부와 시민사회단체들은 <문재인정부는 판문점시대 역행하는 공안사건조작 말고 우리민족끼리 자주통일의 길에 나서라!>며 경찰의 탄압을 규탄했다.(통일뉴스, 2020.5.6)

이른바<경찰개혁>후 경찰이 <보안공룡>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그래서 시민단체들은 과거 군사파쇼독재정권시절에 <비밀·고문·조작수사>의 대명사로 악명 높은 대공분실을 모두 없애라고 촉구하고있다. 그러나 경찰은 옥인동대공분실을 리모델링해 서울청청사에 있는 사이버수사·과학수사부서를 입주시키고 4개보수대를 해체할 대신 오히려 서울청청사내로 이전시킬 계획이다.(뉴시스, 2020.5.10)

2019.1 문재인정부와 20대국회의 검경수사권조정법안통과로 경찰은 검찰의 수사개시권·수사종결권을 가지게 됐고 정보원의 대공수사권을 넘겨받으며 보다 강력한 권한을 갖게 됐다. 시민사회단체는 경찰권한분산·축소, 민주적 통제강화, 정치적 중립확보 등을 요구하고있으며 특히 정보경찰·보안경찰의 축소를 강하게 주장하고있다.(시사저널, 2020.7.27)

2020.6.3 민중민주당당원20여명은 미대사관앞에서 <미제국주의로 인해 숨을 쉴 수 없다>는 구호를 외치며 정당연설회를 진행했다. 4일에는 <해리스대사를 추방하라>고 요구하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4일 미대사관측이 민중민주당기자회견에 대해 <기자회견과 집회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기자회견이라고 주장한 집회를 막을 수는 없는지> 등을 경찰에 질의하자(동아일보, 2020.6.13) 경찰은 <법과 원칙에 따라 명백한 위험을 초래할 경우에만 해산하겠다>는 의견을 미대사관측에 전달했다.(중앙일보, 2020.6.12) 하지만 경찰은 6월말에 6.3 정당연설회를 이유로 민중민주당사무총장을 소환·조사했다.

2019년 검찰은 박근혜폭압<정권>시기 청와대정무수석이었던 현기환과 경찰청장이었던 강신명의 커넥션에 대한 수사를 본격화하는 과정에서 경찰청정보국이 2014년지방선거와 2016년총선 당시 청와대에 수시로 정보보고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뉴스위치, 2019.4.18) 또 이명박악폐정권시기 경찰이 <안보>를 명분으로 댓글공작에 보수단체를 동원하려 했다는 세부계획문건이 공개됐다. 10여년전에도 있었던 정보경찰과 친미친일극우단체와의 유착은 지금도 그대로 존재하며 정세가 격화되면서 더욱 노골화되고 있다. 다양한 인맥으로 얽혀있는 이 관계가 인적쇄신 없이 저절로 사라질 리는 만무하다.

실례로 2020.2 코로나확산저지를 위해 서울시·종로구가 청와대앞천막들을 모두 철거했다. (동아일보, 2020.2.13) 같은달 27일에는 광화문세종대로에 위치한 문중원열사분향소를 인력1350명·경찰1000여명·소방인력50여명을 투입해 강제철거했다.(경향신문, 2020.2.27) 반면 광화문광장 백선엽분향소는 7.12부터 두달이 넘도록 방치돼있었으며 심지어 8.20에는 코로나확진자판정까지 나왔지만 별 문제 없이 그대로 운영하고 있다.(한국경제, 2020.8.20) 문중원열사분향소철거때와 완전히 정반대다.

민중민주당은 민갑룡청장퇴임일인 7.23 경찰청앞에서 경찰규탄기자회견·집회를 가졌다. 참가자들은 악폐의 상징 민갑룡은 <퇴임이 아니라 해임돼야 한다>며 악폐경찰의 편파적이고 무책임한 대응으로 광화문삼봉로·소녀상주변이 극우무리들의 무법천지가 됐다고 강력규탄했다.(21세기민족일보, 2020.7.23)

 

경찰악폐청산 없이 경찰개혁 없다.

2003년 경찰중립화·부정부패척결·정치개입중단을 위해 경찰청임기제가 도입됐으나 진정한 경찰개혁은 이뤄지지 않았다. 10명의 경찰청장중 2년의 임기를 채운 사람이 4명뿐이라는 사실은 경찰 스스로 부패하고 위법한 조직임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백남기농민을 살해한 강신명과 밀양송전탑투쟁을 과잉진압한 이철성은 모두 공직선거법위반·직권남용으로 재판중이다. 경찰청장들이 줄줄이 재판을 받고있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무원범죄통계자료>에 따르면 2018년 범죄를 저지른 국가공무원 3356명중 절반가량인 48.9%가 경찰청소속공무원이다. 범죄를 소탕해야 할 경찰이 오히려 강력·절도·폭력·지능 등 7개범죄유형에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며 스스로가 바로 악폐의 소굴임을 확인했다.

경찰개혁은 일제·군사파쇼통치의 잔재인 정보경찰·보수대의 해체에서부터 시작된다. 3000여명의 정보경찰은 지금도 인권침해·사찰행위를 이어오고 있으며 군사파쇼시절 수많은 애국민주인사들을 연행·고문했던 보수대도 여전히 건재하다. 문재인정부는 2017.6 경찰개혁위원회를 설치하고 경찰권의 비대화를 막겠다고 강조했다. 정보경찰의 정치개입을 차단하겠다고 했으나 치안정보개념을 <공공안녕에 대한 위험의 예방 및 대응을 위한 정보>로 바꾸며 오히려 정보수집·불법사찰을 합법화하고 강화했다. 보수대도 전국보안분실18곳을 본청이나 지방경찰청사로 이전해 공식화하면서 권한을 강화할 태세를 갖추고있다.

2020.7.24 취임한 경찰청장 김창룡은 경찰개혁에 대해 언급했지만 그 이후에도 광화문삼봉로와 소녀상주변의 친미친일극우들의 난동은 계속되고있다. 경찰은 극우무리와 한짝이 돼 민중민주세력의 정당한 활동을 교활하게 방해하고 야만적으로 탄압하고있다. 역대경찰청장이 그러했듯 김창룡도 지난 악폐권력에 부역하며 경찰내에서 승승장구한 반민족·반민주<견찰>의 대표적 인물이다. 정보국과 주미대사관 경력이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이승만의 주구인 죽은 김창룡처럼 친미친극우 <견찰>인 산 김창룡은 그 본색이 낱낱이 폭로되며 결국 산송장이 되고 말 것이다.

경찰이 스스로 <견찰>이 돼 친미친일극우무리들을 비호·방조하며 폭력을 당한 민중민주당당원들을 오히려 가해자로 둔갑시키며 합법적인 정치활동을 가로막는 행태가 광화문삼봉로·소녀상에서 매일 벌어지고 있다. 친일친미친파쇼친극우경찰악폐를 근본적으로 청산하지 않는 한 <견찰>의 오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견찰>청산 없이 경찰개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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