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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베트남의 영원한 주석, 호치민

6. 베트남의 영원한 주석, 호치민



베트남에 가보면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는 인물. 바로 베트남의 영원한 주석 호치민이다. 우리가 방문하는 곳곳에서 베트남역사와 함께 한 호주석의 생애를 느낄수 있는 사진과 기록 등을 접할수 있었다.


우리는 베트남의 정치수도 하노이에 있는 호치민박물관을 찾아갔다. 일요일이라 인파는 더욱 북적였고 특히 학생들의 단체행렬이 눈에 띄었다. 설명을 해주는 선생님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으며, 이곳을 방문한 베트남인들의 표정역시 국부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자부심같은 그 무언가가 느껴졌다.


호치민박물관을 주변으로 호치민주석영묘가 있다. 1945년~1969년 서거시까지 국가의 주석으로 베트남을 이끌었던 호치민. 호치민주석은 유언으로 전쟁중인 나라의 사정과 민중들의 고충을 감안해 화장하여 통일베트남 곳곳에 뿌려달라는 것과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만들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한다. 생애 마지막순간까지 민족과 민중을 생각했던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호치민영묘가 자리한 바로 앞 바딘광장. 이곳은 1945년 9월2일 <친애하는 동포여러분,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습니다…베트남은 독립과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고, 또 사실 자유와 독립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베트남의 전 민족은 그 독립과 자유의 권리를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모든 정신과 역량, 생명과 재산을 바칠 것을 결의하는 바입니다>라는 베트남독립선언문이 낭독되었던 장소다. 그리고 바로 뒤쪽으로는 주석궁을 놔두고 호치민주석이 생전에 집무를 보며 실제로 거주했던 곳이 있다. 주석시기 정원사의 집이었다고 하는데 호치민주석의 소박한 품성을 엿볼수 있다. 


호치민박물관입구계단에 들어서면 커다란 호치민동상이 찾아오는 방문객을 맞이해준다. 생전에 그렇게 좋아했던 민중들을 환하게 맞이하는 인상이다. 하노이에 있는 호치민박물관은 그의 일대기를 사진과 영상, 글과 조형물을 이용해 시대별로 종합적으로 전시하고 있다. 호치민주석의 삶과 활동을 연대기별로 둘러볼수 있도록 전시가 돼있어 호치민주석과 함께하는 과거로의 여행을 하는듯한 기분도 든다. 


호치민주석의 유년기, 파리행을 결심하게 된 배경과 파리를 중심으로 한 유럽에서의 활동, 1927년 <혁명적인 정당의 건설의 필요성과 레닌주의>와 연관된 것, 1930.2 베트남공산당창당과 활동, <르 파리아>창간과 <뤼마니떼> 등 선전활동, 호치민주석이 국내에 들어와 지냈던 곳의 사진과 활동, 수감일기, 1945년 8월항쟁을 준비하고 호소하는 활동, 바딘광장에서의 연설, 항불전쟁을 이끄는 모습, 전선시찰 사진과 어린이노약자여성군인들과 함께보내는 사진, 생애 방문했던 나라들과 사용했던 옷과 물건들, 호치민주석의 서거사진과 애도하는 민중들의 모습 등이 파노라마처럼 전시돼 있다.


이 수많은 기록물 중, 베트남공산당창당에 대한 설명은 꽤 길면서도 중요하게 배치돼 있었다. 하노이에 있는 역사박물관에서도 베트남공산당창당과 활동에 대해서는 하나의 방에 집중적으로 전시돼 있었다. 베트남공산당은 1930.2.3에 호치민이 중심이 돼 창당되고 1951.2에 베트남노동당으로 재창당되다가 베트남전쟁이후 베트남공산당으로 다시 개칭된다.


호치민주석의 주도아래 창당된 베트남공산당은 극심한 내분에 시달리며 사분오열돼 있던 단체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이뤄졌다. 베트남공산당창당 이후 베트남에서의 항불투쟁은 호치민의 지도아래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베트남공산당은 <기관차>역할을 충실히 해내며 항불투쟁과 이어지는 항미투쟁을 지도해왔음을 이곳 기록물에서 확인할수 있다.


다른 하나, 당명을 베트남공산당으로 하는 과정이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지배하면서 나라이름도 빼앗았는데 북부지역은 통킹, 중부는 안남, 남부는 코친차이나로 불렀다. 베트남민중들은 자기나라의 이름도 부를수 없게 되었던 처지였다. 이 상황에서 베트남공산당창당은 베트남민중들에게 나라이름을 되찾아주며 해방과 독립의 신심을 불러일으킨 의미도 있다하겠다.


한편 이곳 박물관에 아주 인기있는 장소가 있다. 바로 흰옷을 입은 호치민주석과 함께 사진을 찍기위해 사람들이 줄을 서있다. 특히 어린아이들이 많다. <박 호(Bac Ho)-호아저씨>라 불리며 베트남민중들 특히 아이들에게 다정다감한 지도자였던 호치민주석. 많은 박물관 등에서 확인되는 사진을 보면 호치민은 아이들을 정말 좋아했던 것 같다. 아마 통일조국을 이끌어갈 미래세대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 아이들에게는 식민과 분단이 아닌 자주와 통일의 조국을 물려주어야한다는.


호치민주석은 1969년 서거 이전 <지금까지 진심과 전력을 다해 조국과 혁명, 인민을 위해 싸워왔다. 지금 죽더라도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만 더 오래 더 많은 것을 하지못하는 것을 제외한다면…>이라는 글을 남겼다한다. 마지막순간까지 오직 민족과 민중을 생각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호치민주석은 베트남독립기념일인 1945.9.2 하노이바딘광장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며 베트남의해방을 환영하며 새조국건설에 대한 다짐을 외쳤다. 우연일까. 호치민주석의 서거일이 바로 24년 지난 1969.9.2 죽어서도 민족의 완전한 독립과 해방, 통일을 바라는 그 마음이 담겨서일까. 유품으로는 헌옷과 책, 그리고 낡은 신발.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헌신하며 대적전선에서는 강인한 모습이었지만 민중들에게는 언제나 인자하며 따사로운 모습을 보여줬던 호치민주석. 


호치민주석의 영묘를 중심으로 한 금성홍기아래에는 <주석 호치민은 인민 마음에 영원하다>는 글귀가 씌여있다. 베트남민중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이름으로 살아숨쉬는 호치민주석. 그의 생애는 참된 삶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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