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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베트남비무장지대를 가다

5. 베트남비무장지대를 가다



베트남군사분계선은 프랑스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체결된 제네바협정에 의해 북위17도선을 경계로 그어졌다. 베트남비무장지대는 군사분계선남북으로 각각 5km로 설정됐다. 우리는 베트남중부지역후에(HUE)에서 비무장지대로 출발했다. 비무장지대는 통일조국을 꿈꾸는 우리로서는 관심사가 아닐수 없다. 분단과 대결에서 통일과 단합의 상징적 공간으로 변화될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찾아간 비무장지대 지역은 군사분계선 기준으로 남쪽으로 약100km지점에 위치해 있는 곳으로, 베트남전쟁의 격전지였던 동하마을을 지나 록파일과 다크롱다리, 케산전투기지, 빈목터널 등이다.


베트남전쟁당시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한 이 일대는 격전이 벌어진 곳이 많다. 미군은 케산전투기지와 일대에 해병대를 상주시키며 북베트남군대와 싸웠고, 네이팜탄공격과 고엽제살포를 어느 지역보다 집중적으로 진행했다. 반면 북베트남군대는 호치민루트 등을 개발하며 미군을 압박했다. 


우리가 처음 들른 곳은 전쟁기간 미해병대가 주둔했던 록파일. 이곳은 미군의 고엽제살포로 바위만 남은 민둥산이 됐다고 한다. 최근에야 수풀이 나기는 했지만 커다란 나무 등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리고 역시 미해병대가 주둔했던 케산전투기지. 록파일이 고지라고 한다면 케산전투기지는 이 지역일대 중심거점 이런 느낌이다. 이 지역을 장악하기 위한 <케산전투>는 베트남전쟁 격전지중에서도 여러 의미를 지니는 곳이다.


케산전투는 1968년 1월21일 북베트남군대가 케산미전투기지일대를 포위공격하며 약77일간 벌어졌다. 기존에 게릴라전을 위주로 벌이던 북베트남군대가 포위공격전을 벌인 것으로서도 미국에서는 깜짝놀랄만한 일이었다고 한다. 또한 케산전투는 미군이 단일전투에서 가장 많은 화력을 뿜어낸 전투라고 한다. 항공지원은 1주일평균 약300회 출격에 1일 1800t의 폭탄을 투하, 70일간 무려 12.6만t의 폭탄을 투하했다한다. 2차세계대전당시 독일군이 100일동안 영국에 퍼부은 폭탄이 약 12만t이라고 하니 엄청난 화력전이었다. 미군과 공방을 벌이던 북베트남군대는 70여일만에 이곳에서 물러나는데 미군도 결국 이곳을 포기하고 1968년 6월에는 기지를 완전히 파괴하고 병력을 철수시켰다한다. 


케산전투가 베트남전쟁사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케산전투가 개시된 지 10일만에 북베트남군대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군대가 전격적으로 벌인 구정대공세와 연관된 것이다. 구정대공세는 1월31일 북베트남군대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군대가 남베트남 주요 대도시를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한 것을 일컫는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군인들은 1월31일 새벽 19명의 미대사관진격을 시작으로 사이공미공군기지, 남베트남정규군사령부 등을 급습했고 남베트남의 주요도시 곳곳에서 미군과 교전을 벌였다. 구정대공세는 약 10여일간의 공방이후 끝났지만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특히 사이공주재미대사관 등이 공격당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텔레비전을 통해 미국에도 중계가 되며 미국내에서 반전여론이 결정적으로 고조됐다. 


그래서 케산전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평가가 이어졌다한다.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구정대공세를 성공시키기 위해 미병력의 분산을 용이케하는 케산전투를 벌였다는 것이다. 결국 북베트남장군 지압의 전략에 미군이 말린 것이라는 것. 케산기지의 사령관이었던 로웰 잉글리쉬해병소장까지도 <웨스트모얼랜드가 지압의 <함정>에 빠져 아무 가치도 없는 땅 을 지키기 위해 엄청난 병력과 물자를 낭비했다>고 후일담을 남겼다한다.


이후 미국내에서의 반전여론은 점차 고조되고 1969년 1월 취임한 미대통령 닉슨은 <단계적 철군>을 발표했고, 1973년 파리조약에 따라 그해 3월29일 완전철군한다. 명분없는 전쟁에 뛰어든 미군은 막대한 물량을 동원해 전투에서는 이겼을지는 모르지만, 전쟁에서는 결국 패배자의 이름으로 철군하지 않을수 없었다. 


우리가 다음으로 찾은 곳은 <다크롱다리>. 이곳은 호치민루트와 연결되는 다리로 유명하다. 베트남전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호치민루트는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을 잇는 군수물자와 병력의 보급로였다. 호치민루트는 베트남과 라오스의 국경을 형성하는 최고봉이 3800m에 이르고 평균고도가 1000m에 이르는 쯔엉선산맥을 관통하여 뚫었다한다. 장장 2만km에 달하는 이 길은 산악지방의 소수민족 협력이 필연이었다. 맹수와 독충이 우글거리는 밀림지역을 현지 지형을 잘 아는 민중들의 협력으로 개척하고 비록 호미와 삼태기 등밖에 없지만 통일에 대한 신념으로 뚫었을 그 길. 결국 이 길은 베트남민족의 해방과 통일의 길이 됐다.


여전히 전쟁의 위험이 상존하는 코리아반도. 그리고 그 긴장도가 첨예한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한 비무장지대일대. 하지만 우리는 이곳을 분단과 전쟁이 아닌 통일과 평화의 상징으로 이른 시일안에 만들어야 할 것이다. 전쟁전야까지 치달았던 지난 8월말 남북은 우여곡절끝에 공개합의문을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그 합의는 쾌속으로 진행되지않고있다. 여전히 백악관은 주판알을 튕기고있는 것 같고 청와대는 백악관의 눈치만을 보는 형국이다.


지금 자주와 통일을 열망하는 민족민중은 이제 <조율>은 그만하고 통일연주에 들어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 시간은 마냥 기다려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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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민족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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